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세 개의 십자가 (눅 23:32-43)

첨부 1


세 개의 십자가 (눅 23:32-43)  

<그날 십자가는 세 개였다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번 주일부터 성금요일까지를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주간이지요. 고난주간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했습니다.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폭도로 돌변합니다. 자기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생각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실망했던 것이지요! 

이제 고난주간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당시 로마인들에게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살인자와 노예반란, 아주 사악한 범죄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고안한 사형제도였습니다. 신 21: 23절을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십자가형을 몹시 혐오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느니 차라리 돌에 맞아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해골의 곳,' 골고다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었습니다. 정중앙에 우리 주 예수님을 매달기 위한 십자가가 있었고, 두 사람의 행악자들이 좌편과 우편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마 27: 38; 막 15: 27). 이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십자가에 처형될 만큼 큰 죄를 저지른 흉악범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비롯한 두 명의 강도를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십자가에 매단다면, 성경에 나오는 위치와는 사뭇 다르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과 강도 두 사람을 똑같이 매 달수는 없기에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고, 예수님은 이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있게 해서 거룩하신 예수님과 흉악범들을 구분시키고자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분명히 예수님을 정중앙으로 해서 두 명의 강도들이 왼쪽과 오른쪽에서 각각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불의한 흉악범들과 함께 숨지도록 배려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사 53: 12은 말씀합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메시아 예수께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게 하도록 강도 두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함께 십자가형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잔인무도한 강도 두 사람 사이에 끼여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섬세한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짐승들에 둘러싸여 태어나셨던 예수님은 죽음 역시 가장 비천하고 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강도들과 똑같은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최후의 갈림길'> 

두 사람의 강도들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많은 죄를 저질렀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무지막지해서 전과가 아주 좋지 않은 무장 강도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최고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며, 더욱이 성경은 이들이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강도들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도적들이요 산적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도적들입니다. 강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달란트를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친구와 기회와 시간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위하여 쓰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영적인 도적들이요, 십자가 위에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강도가 똑같이 십자가 위에서 최후를 맞았지만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한 강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했습니다. 39절을 보세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을 조롱했던 무리는 크게 세 부류였습니다. 

먼저 35절에 보면 '유대교의 관원들과 백성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조롱했습니다. 

또한 36-37절에 보면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주면서 희롱했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강도 한 사람이 이들 무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메시아라? 이들은 예수님의 무기력이 하나님의 무능에 대한 본보기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의 동료 한 사람이 예수님을 비웃는 모습을 지켜 본 다른 편 강도는 그를 점잖게 꾸짖습니다. 

40-41절을 보세요.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강도는 분명히 최후의 순간을 맞으면서 자신의 죄를 깨달은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한 사람의 강도는 마지막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이 사람은 달랐습니다! 자신은 죄를 지었기에 당연히 받아야 할 십자가형을 받고 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힐만한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심을 확신했습니다. 

이 강도의 마음을 이렇게 움직인 이유는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과 용서 때문입니다. 34절을 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기도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강도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강도는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합니다. 

42절을 봅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께서 운명하신 다음에 천국에 들어가시게 될 때 자기도 기억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결국 그의 소원대로 이 강도는 예수님과 더불어 낙원에 들어가는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은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수제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아닙니다. 정반대로 일생 동안 못된 짓만 골라했던 흉악범, 강도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 첫 번째 손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가 '기독교 최초의 설교'라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 즉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조차도 깨닫지 못한 구속론적 진리를 이 강도 한 사람이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제자들은 메시아가 버림받고,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버리고 제 목숨 하나 보전하기 위하여 모조리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도 강도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무기력한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아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와 똑같이 죄인의 모습으로 무기력하게 죽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옳게 깨달았던 것이지요! 

<'역전승(逆轉勝)의 십자가,' '완패(完敗)의 십자가,' 그리고 '완승(完勝)의 십자가'>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강도의 믿음을 예사롭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께서 능력이 많으실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물을 포도주 만드실 때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자기와 똑같이 십자가 위에서 무기력하게 죽어 가시는 지금,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은 물론이고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한 가운데 빠진 예수님께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도움이 필요할 때 결코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 속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식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도는 자기와 함께 무기력하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께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믿음은 거짓이 없고 순수합니다. 이와 같이 거짓 없는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았을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엄청난 기적을 행할 때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다음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덮었을 때가 아닙니다(눅 23: 44 참조).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려 죽은 자들의 몸이 많이 일어난 때가 아닙니다(마 27: 51-2 참조). 이와 같이 아직 그 어떠한 부활과 승천의 조짐도 기대할 수 없었던 절망적인 상황 한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의지했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 먼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뒤 강도들이 뒤이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천국 낙원에 먼저 도착하신 예수께서 예수님을 인정한 강도를 틀림없이 기쁨으로 영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은 구원받은 강도를 “예수님의 지상 최후의 동반자요, 천국 최초의 동반자”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그는 세례나 성만찬도 받지 않은 채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100%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는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만 할 형벌을 받고 있지만 예수님은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낙원에 들어갈 아무런 자격도 공로도 없지만 순전히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낙원에 이른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구원받은 강도 이야기를 읽으면서 9회 말 3: 0으로 지고 있는 한 야구팀의 마지막 타자를 연상하게 됩니다. 2사(死) 후 만루가 된 상태에서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의 풀 카운트 상태에서 타자가 투수를 노려봅니다. 만일 여기서 삼진 아웃이 되면 경기는 3: 0으로 지고 맙니다. 바로 그 때 타자는 온 사력을 다해서 투수가 던진 볼을 힘껏 내려 쳤는데 홈런입니다. 만루 홈런을 쳤습니다! 그래서 지고 있었던 팀이 4: 3으로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바로 이와 같이 역전의 홈런을 친 야구 선수와도 같습니다. 그는 한번 도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가운데 십자가 위에서 난생 처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냥 죄인으로 죽느냐, 아니면 그동안의 죄를 다 씻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는 역전의 만루 홈런을 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패배하고 있던 인생의 수레바퀴를 일거에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강도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에게도 똑같이 역전의 홈런을 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그는 내세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죄책감도 없습니다. 더더욱 그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와 똑같은 십자가형의 죄수로 생각하면서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강도와 구원받지 못한 강도를 갈라놓는 것은 누가 죄를 더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더 가까이, 혹은 더 멀리 떨어져 있느냐도 아닙니다. 순전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나가 천당과 지옥을 갈라놓았습니다!

여러분, 이 두 사람의 강도야말로 온 인류를 그대로 대변합니다. 구원받은 세계와 구원받지 못한 세계는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갈라지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선하고 상대적으로 더 악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구분되지도 않습니다. 

온 인류, 온 세계, 온 문화가 오직 십자가 하나로 구분됩니다. 십자가 한 편에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지요. 십자가 다른 편에 죽어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어느 편에 서 계십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하는 강도 편에 서 계십니까? 아니면 끝까지 자신의 죄악을 자백하지 않은 채 불신앙에 가득 차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롱하는 편에 서 계십니까? 

한쪽 강도의 십자가는 완패(完敗)의 십자가였습니다. 역전할 기회가 똑같이 주어졌지만 불신앙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인생에 완전히 패배한 사람이 지는 십자가였습니다. 하지만 또 한 쪽 편의 강도가 진 십자가는 역전승(逆轉勝)의 십자가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면서 십자가 위에서 가장 무기력했던 예수님을 믿어서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비록 이 땅위에서의 삶이 부끄러운 전과로 가득 찼지만 다가오는 내세에서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역전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그 시간까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 10)라는 말씀을 이루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완승(完勝)의 십자가입니다. 

<'어떤 십자가를 선택하려는가?'> 

렘브란트(Rembrandt, 1606-69)의 그림 중에 「세 개의 십자가」(The Three Crosses)라는 명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정중앙에는 예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좌우편에 두 강도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 모여서 야유를 퍼붓는 군중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 하나 하나가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모퉁이 한구석에다가 그림자에 가려 간신히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나 그려 넣었습니다. 미술사가들은 이 사람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렘브란트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그날 폭도들과 함께 동참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때 그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주인공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달린 강도들처럼 천국이냐 지옥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입장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십자가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십자가입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