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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6> 조선신학교장 송창근 목사 “아들처럼 길러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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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에 본정이라는 일본거리가 있었다. 지금의 충무로다. 본정 이정목(二丁目)에서 북쪽으로 구부러진 거리가 영락정이었다. 여기엔 일본인들이 만든 천리교 중앙본부가 있었다. 이 자리가 변해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가 된다. 또 다른 두 개의 천리교 절이 있었다. 하나는 장충단에, 또 하나는 동자동 15번지였다. 공교롭게도 이 세 개의 천리교 절들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동창인 세 사람의 목사가 차지했다. 장충단은 김재준 목사가 야고보교회(현 경동교회)라고 이름 붙였다. 동자동에는 송창근 목사가 성바울교회(성남교회)를 세웠다.

남산 위 신궁터에는 나의 고향 목사이며 고고학자인 김양선 목사가 신궁터 집들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의 꿈은 신궁터 위에 신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김 목사는 아버지의 제자이고 어머니와 소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나는 신궁과 절터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운 4명의 목사 행적에서 건국을 앞두고 민족과 종교라는 두 가지 짐을 져야 하는 새 시대 사명 같은 것을 느꼈다.

서울에 오니 인사동 승동교회 아래층을 빌려 쓰던 조선신학교는 동자동 성바울교회로 옮겨져 있었다. 천리교가 쓰던 붉은 벽돌 3층 집이었다. 교장이었던 김재준 목사를 만났다.

“어디서 왔어?” 퉁명스러웠다.

“신의주에서 왔습니다. 의산노회 목사후보생 합격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평안도구먼….”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가봐!” “예?” “입학 시기가 지났어.”

내 귀에는 너 같은 평안도내기는 사라져 버리라는 선언으로 들렸다.

나는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김 목사는 왜 평안도를 그렇게도 싫어했을까. 존경하고 기대했던 신학자에게 예기치 못한 냉대를 당하니 정말 이분이 뛰어난 문장과 박식함을 가진 학자 김재준이 맞나 싶었다. 나는 가을학기를 포기하고 신학교 진학을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어머니가 송창근 목사를 찾아가셨고 내가 김 목사로부터 당한 이야기가 오갔다. 송 목사는 김재준 교수를 대신해 새로 조선신학교 교장이 됐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권사님, 동진군을 내 집에 보내시지요. 아들처럼 길러보겠습니다.”

어머니의 강권으로 나는 송 목사 집 2층에 살게 됐고 조선신학교 문과에 들어갔다. 1947년 봄이었고 장준하와 문동환이 급우였다.

한편 그해 4월 조선예수교장로회 33회 총회는 중대한 신학 문제를 두고 대구제일교회에서 모였다. 조선신학교 신학생들도 내려와 있었다. 김재준 교수의 고등비평과 성경유오설에 반기를 든 30대 학생들이었다. 김 교수의 구약강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한 학생 중에는 적지 않은 수가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이들이었다. 모두 신사참배를 거절했던 영웅들이었다. 당시 51명 이름으로 총회에 제출된 진정서는 총회 공식문서로 접수됐다. 총회는 진상조사에 나섰고 교계가 소란해지면서 수습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쫓겨났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만주 봉천에서 귀국하지 못했던 박형룡 박사를 초빙키로 했다. 모금이 시작됐고 나는 이 일에 앞장섰다. 서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신학이나 교리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신학교 재건이 문제였다. 조선신학교를 떠난 51명의 신학생은 ‘신앙동지회’를 조직했다. 나는 ‘불기둥’이라는 신앙동인지를 편집하는 주간이 됐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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