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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님은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는가? (요 1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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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는가? (요 13:1-35)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대명절입니다. 과거에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를 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애굽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종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는 애굽을 7년 흉년에서 구원해준 요셉의 공로 때문에 유대인들은 애굽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으면서 편안하게 생활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나타나면서부터 유대인들의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애굽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노역을 시켰습니다. 나중에는 유대인들의 숫자가 늘어가니 아들을 낳으면 죽이게 했습니다. 고통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애굽왕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10가지 재앙 중에 마지막 재앙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끝까지 버티던 애굽왕 바로와 애굽 백성들은 장자가 죽는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애굽 온 나라가 하나님을 대항하다가 슬픔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바로왕은 장자의 죽음이라는 재앙 앞에서 두 손을 들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날 애굽에서 나오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애굽에 10번째 재앙이 내리던 날이 유월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을 잡아서 고기는 먹고 피는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밤에 죽음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어린양을 잡고 양의 피를 바른 집에는 죽음의 천사가 지나갔지만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집에는 죽음의 천사가 들어가서 장자를 죽이는 심판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을 잡아서 고기는 먹고 피는 문설주와 문인방에 발라야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고 구원을 받았던 거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받아드리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십자가의 도를 받아드리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본문은 유대인들의 대명절인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드시게 되었습니다. 유월절 식사를 하시던 주님께서 갑자기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돌출행동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웃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외출 나갔다가 들어올 때 발을 씻기 위해 문간에 놓아둔 물 항아리에서 물을 퍼서 대야에 담아 오시더니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에는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남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아주 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신 그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지만 실상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죄인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을까요? 오늘 설교는 그 부분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 3가지를 말씀합니다. 
 
1.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제가 세어보니 57번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작별하시는 내용을 다룬 13장에서부터 21장 사이에 무려 45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강조한 진리,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강력하게 각인시키기를 원하셨던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으로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 13장에서 사랑과 관련된 2가지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첫째, 자신을 귀하게 보고 사랑하십시오. 
   
주님은 누구를 사랑하셨습니까? 먼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1절에 보니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셨던 자기 사람들이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먼저는 예수님이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주님의 일군으로 세워주신 12제자들과 그 외에 주님을 수종들며 주님과 동거했던 수십 명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좀 더 넓게 생각하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 3:16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동기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도 사랑의 동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이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사 43: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못을 박으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불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실 만큼 나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주고 나를 살리실만큼,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벌거벗고 죽으실 만큼 나는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사 43:4에 보니 하나님께 구속 받은 우리들은 보배롭고 존귀하며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평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보배롭고 존귀하며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다 같이 해봅시다. “나는 하나님께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을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시지만 믿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평가와 달리 자신을 하찮은 존재, 쓸모없는 존재, 심지어 쓰레기 같은 존재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이성호교수님이 쓴 [자녀교육의 비법은 없다]는 책 서두에서 한 통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느 연구단체에서 서울시내 중학교 학생 2,000명을 상대로 의식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때 제시된 질문 가운데 하나는 “당신은 지금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5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첫째로 전혀 그렇지 않다. 둘째로 대체로 그렇지 않다. 셋째로 그저 그렇다. 넷째로 대체로 그렇다. 다섯째로 매우 그렇다. 그런데 조사대상 학생 2,000 명 중 긍정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에 표를 한 학생은 불과 27%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00명 중 27명의 학생만이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73명의 학생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거나 자신을 그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자신을 존재할 가치가 없거나 그저 그런 존재로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시각을 바꾸십시오. 세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로 자신을 보십시오. 천지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너는 나에게 최고의 가치가 있는 존재다. 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나를 줄만큼 너는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다”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귀하게 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34절을 보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38절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고 베드로를 빼고 다른 제자들의 발만 씻겨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베드로의 발도 씻겨주셨습니다. 또 21-28절을 보면 주님은 가룟 유다가 은 30냥에 주님을 팔아먹을 것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발도 씻겨주셨습니다.
   
유월절 떡은 비스듬히 누워서 옆 사람의 가슴에 기대어 받아먹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그 때 가룟 유다의 위치가 예수님의 왼편이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른쪽에 있던 요한의 머리가 예수님의 가슴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머리는 가룟 유다의 가슴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좌우에는 가룟 유다와 요한이 앉았습니다. 이 때 주인의 왼편 좌석은 연회장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이며 가장 친한 친구를 위한 자리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되어질 일을 아시면서도 가룟 유다를 그 만찬에 참석하게 하셨고 만찬 석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자리에 앉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으로는 힘든 일입니다. 아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만나면 가슴이 콩닥 거리고 손이 벌벌 떨립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반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방법은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다른 표현은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상황을 기록한 행 7:54-60을 보면 그는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서 죽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집사님이 죽음 앞에서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저는 성령충만이라고 믿습니다. 행 7:55을 보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체험입니다. 목사님이 하루 저녁에 기도했습니다. “주님, 좋은 사람도 있고 미운 사람도 있는데 좋은 사람의 발은 얼마든지 씻겨 주겠는데 미운 놈이 와서 발 씻겨 달라고 하면 내가 못할 것 같습니다.”, “물론 못하지.”, “그럼 안 해도 괜찮지요?”, “천만에...” “미운데 어떻게 합니까?” 주님이 답을 주시더랍니다. “나를 품에 품으면 할 수가 있다. 나를 품에 품으면 할 수 있지만 나를 떠나서는 못한다. 나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의 발도 씻겼다. 나를 마음속에 모셔드리고 의지하면 너도 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우리의 인격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 대학생 선교회 CCC 라는 단체를 이끄시던 김준곤 목사님은 성령충만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살아계셔서 교계를 이끄셔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대단한 사랑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목사님의 가족이 다 공산당에게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목사님의 눈앞에서 목사님의 부친과 아내가 공산당에게 맞아 죽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목사님도 너무 매를 많이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때 미군 함정이 나타나는 바람에 겨우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목사님의 가족을 죽인 공산당원들을 미군들이 잡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빵을 들고 미군에게 찾아가서 공산당원에게 주고, 미군에게 사정사정해서 풀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텐데 풀어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미군이 목사님의 간청에 못 이겨서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산당원들이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산 속에 들어가서 계속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김목사님은 성경책을 들고 산 속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공산당원들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 공산당원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108명이 모이는 시골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대단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사람의 인격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롬 5:5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충만할 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2. 우리도 그렇게 섬기라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철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너무나 몰랐습니다. 그들은 항상 누가 크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눅 22:24에 보니 이날 저녁 만찬 시간에도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다투었습니다. 그날 만찬이 주님의 공생애 중에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누구 한 사람도 주님의 발을 씻겨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길은 전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먼지투성이였습니다. 건조기에는 발이 먼지 속에 파묻히고 우기에는 진흙 속에 빠졌습니다. 거기다가 그 당시 사람들이 신고 다니던 신발은 샌들입니다. 그러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는 발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문 앞에는 물 항아리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손님이 왔을 때에는 종이 손님의 더러워진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만찬에는 발 씻어 줄 봉사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웃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시고 나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본을 보이셔서 제자들도 주님처럼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제자들처럼 섬김 받기는 좋아하고 섬기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섬겨주면 기분이 좋고 나를 섬겨주지 않으면 마음에 서운함을 갖는 이상한 심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심리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은 역설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역설적인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주의 일을 하다가도 불평하고, 남을 섬기다가도 불평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섬김을 받는 자가 크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것입니다. 마 23:12에 보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합니다.
   
강철왕 카네기의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여기! 사람들을 잘 섬기다 간 사람, 고이 잠들다” 사람들은 카네기를 사람들을 잘 섬긴 사람으로 기억했던 것입니다.
   
카네기는 젊은 시절 일주일 동안 일하면 겨우 2불 40전을 받던 공장 직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살다가 나중에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열심히 살고 많은 돈을 번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많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했느냐 어떻게 살았느냐가 것입니다. 

그는 돈을 벌고 돈을 모으는데 목적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을 잘 섬기고 봉사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돈이 없어 공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장학금을 주면서 도왔습니다. 또 소외되고 그늘진 사람들을 재정적 많이 도왔습니다. 문화 사업과 사회복지 사업에도 기꺼이 많은 돈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공공도서관에 6,000만 불, 교육제도 개선을 위해 7,000만 불, 오르간이 없는 교회에 오르간 7,000대 등 도합 3억 6천 5백만 달러라는 거액을 봉사기금으로 내 놓았다는 것입니다. 

대충 계산해도 한국 돈으로 약 4천억 원 정도 됩니다. 4천억은 지금도 큰 돈인데 100년 전에는 얼마나 큰 돈 이었겠습니까? 그는 돈을 버는 달란트가 있었기 때문에 돈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카네기가 남긴 돈에 관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것은 수치다. 돈은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다 쓰고 죽어야한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나 우리의 예배에 감동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우리는 믿음 위에 서야 하고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의 신앙이나 우리의 예배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감동하는 것은 우리의 섬김입니다.
   
신창원이라는 유명한 탈옥범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현대판 홍길동처럼 여겨지는 신출귀몰한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그에게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창원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어느 목사님사모님의 계속된 편지에 감동을 받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믿고 싶어 하게 된 것은 어느 한 여인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창원이 탈옥범으로 여기저기 쫓겨 다니던 어느 날 신림동에 있는 한 연립주택에 여자 혼자 있는 집에 침입을 했습니다. 여자는 당황했겠죠. 신창원은 “난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냥 여기서 조용히 하룻밤만 지내게 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이내 침착해졌습니다. 

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른 살 쯤 되어 보이는 여인은 시골에서 올라와 대학원을 마치기까지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까 신창원이 배가 고파서 밥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은 조용히 일어나 된장찌개를 끓여 주었습니다. 며칠씩 굶은 신창원은 너무 고마워 맛있게 먹으면서 뭔가 보답을 하고 싶어서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소원이 뭐예요?” 그랬더니 “뭐 별게 있겠어요. 돈 벌기 힘들 때면 돈방석에 한 번 앉아보는 거죠.” 

그러자 신창원은 잠시 주차장으로 내려가 골프 가방을 가져왔습니다. 그 안에는 어딘가에서 신창원이 훔친 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믿어줄 뿐 아니라, 얘기를 들어주고, 따뜻한 된장찌개까지 끓여준 그녀를 정말 돈방석에 앉게 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느새 새벽이 되자 그녀는 “밤에 일하는 남동생이 올 때가 되었으니까 이제 돌아가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신창원이 신발을 신으려 하자 여인은 신창원에게서 받은 돈 가방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신창원이 놀라서 “돈 받을 것도 아니면서 왜 탈주범인 나에게 잘해주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맑은 눈으로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죄인이 쫓기고 힘들어할 때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신창원은 그 순간 내가 언젠가 자유의 몸이 되면 그녀가 믿는 그 하나님을 믿고 싶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세상은 우리의 신앙에 감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섬김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섬기는 삶을 살라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3. 우리도 날마다 죄를 자백해서 깨끗해지라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기시다가 베드로 순서가 되었습니다. 6-10절에 보니 베드로는 주님에게 너무나 송구스러워서 말했습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 실수 없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베드로는 놀라서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요즘은 집집마다 샤워 시설이 되어 있어서 날마다 온 몸을 씻습니다. 그런데 옛날 가난하고 어려운 2000년 전에 이스라엘, 그 나라는 비가 많이 오는 나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목욕은 1년에 한번 정도하는 것이고 발은 매일 씻어야만 했습니다. 워낙 건조하여 먼지가 많았고, 샌들을 신고 다녀서 먼지로부터 발을 보호하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발을 씻지 않는다고 주님과 상관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발을 씻지 않아서 주님과 상관없다면 우리 이웃 나라 중 한 나라 사람들은 구원 받기 힘들겠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잘 안 씻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목욕한다는 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회개나 속죄, 혹은 칭의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모든 죄를 용서받아서 의로워졌습니다. 죄인으로 태어나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원죄부터 시작하여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지은 모든 자범죄까지 그리고 앞으로 지을지도 모르는 모든 죄까지 모조리 다 용서받는 것입니다.
   
발을 씻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목욕을 했으나 날마다 발을 씻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모든 죄를 용서 받아 의인이 되었으나 연약하여 다시 범죄하여 더러워진 죄를 날마다 자백하며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요일 1:9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자백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상관’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발을 씻듯이 죄를 씻어내는 사람은 주님과 상관이 있는 사람이고 죄를 씻어내지 않는 사람은 주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상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로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뜻은 ‘아랫사람이 직책이 높은 사람의 전리품이나 재물, 영광 등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이 누리시는 하늘의 축복과 상급과 영광에 함께 참여할 수 있고,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그런 것들을 누릴 수 없습니다.
   
죄를 자백하는 참회의 기도는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어버립니다. 닫힌 축복의 문을 엽니다. 묶인 저주를 푸는 것입니다.
   
작가 오혜령 씨는 76년엔 36살의 나이로 세계언론인 작가협회 사무총장이 되었습니다. 70년대에 희곡 작가로, 배우로, 방송인으로, 또 수필 작가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는 미션 스쿨을 다녔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30대 꽃다운 나이에 위암과 임파선 암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3개월 살수 있다는 의사의 사형선고를 받은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일 달력의 숫자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나가면서 죽을 날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물만 먹어도 토했고 혈변을 보는 고통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 동안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서 마음대로 살았던 자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았습니다. 며칠 동안 화선지에 붓글씨로 자기 죄를 써가며 아프게 회개했습니다. 밤을 새며 눈물로 회개하고 또 회개하며 천국에서 주님을 만날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왔구나.” 

스스로 임종준비를 하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않았습니다. 어깨를 만져보았습니다. 복숭아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배를 만져보았습니다. 복수가 차올랐던 배가 완전히 꺼졌습니다. 그는 회개 기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주님께서 자기를 만져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 기도를 하는 오혜령씨를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참회의 기도를 생활화 하십시오. 날마다 세수하듯이 날마다 주의 보혈로 씻김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씻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따라 여러분에게 찾아온 모든 저주가 떠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렘 5:25에 보면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죄를 처리하지 않고 죄를 품고 있으면 그 죄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들을 막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날마다 죄를 자백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들, 영적, 육적인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까?
1.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2. 우리도 그렇게 섬기라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3. 우리도 날마다 죄를 자백해서 깨끗해지라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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