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세 개의 못 (눅 23:26-38)

첨부 1


세 개의 못 (눅 23:26-38)


런던의 한 식당 주인 에밀 메틀러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돈을 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어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기독교 단체에서 사람이 나와 도와달라고 하면 현금 서랍을 열어 상당한 액수의 돈을 기부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선교본부에서 나온 사람이 보는 앞에서 현금 서랍을 열었는데 그 안에 지폐와 동전들 사이에 못 하나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람은 “못이 왜 그 안에 있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에밀은 15센티미터 정도 되는 큰 못을 집어 들면서 “나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가 지불하신 값과 그 때문에 내가 진 빚을 잊지 않으려고 이것을 나의 돈과 함께 넣어두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에밀은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주님께 사랑과 감사의 빚을 진 것을 잊지 않으려고 그 못을 사용하였습니다. 에밀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놀라운 은혜를 항상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풍성히 헌금할 수 있는 마음을 더하게 하려고 그 평범한 물건을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신 갈보리의 대속을 얼마나 자주 생각합니까? 지극히 세상적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 에밀의 모범은 단순히 가시관이나 못이나 창에 찔림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고 A. W. 토저 박사에 의하면 한 젊은 성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는 질문으로 오래 믿은 성도에게 접근하였습니다. 그 성숙한 성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세 가지를 뜻한다.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다. 둘째, 그는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 셋째, 그는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오직 한 방향만을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한꺼번에 두 가지 방향을 대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엘 가기 원하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롯의 부인과 같습니다. 그들은 한 길을 달리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것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오직 한 길, 죽음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아무리 뒤를 보려고 해도 뒤는 더 이상 볼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습니다. 아니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못 박힌 자들은 뒤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니 십자가는 그에게 끝입니다. 극장의 막이 내렸습니다. 영화가 끝났습니다. 마지막 자막들이 쭉 올라가고 있습니다. 출연, 감독, 도움을 준 사람들 하는 식으로 내가 행한 모든 일들이 선한 일, 악한 일들이 화면에 쭉 스쳐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못 박힌 자리에서 다시 내려올 수도 없습니다. 못이 그를 십자가에 고정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이요 마지막 죽음까지의 고통뿐입니다. 아무리 후회해도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신 바울 사도의 말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그의 옛 생활로 되돌아가지 못 합니다. 옛 생활은 영원히 끝난 것입니다. 

셋째로 못 박힌 사람은 자신의 계획이 없습니다. 그는 더 큰 집이나 더 좋은 차를 꿈꾸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끝낸 것입니다. 이제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마지막 고통의 시간들일 뿐입니다. 그가 아무리 매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고 해도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모습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습니다. 벌거벗겨진 모습으로 피투성이인 채 못 박힌 그 모습 가운데 그의 꿈은 다 사라져 버렸고 그의 매력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무슨 계획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계획은 더 이상 실행될 수가 없습니다. 이제 한 가지 계획이 있다면 고통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한 시라도 빨리 죽는 것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세 가지 면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우리는 종려주일의 화려한 모습만 봅니다. 멋진 모습만 그립니다. 예수 믿어 복을 받고 은혜 가운데 행복하고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왜 그리도 지지리 궁상만 가득한 것일까요? 어느 한 구석을 보아도 벗어날 길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저 갈수록 어깨만 더 무거워집니다.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어만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을 바꾸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다시 묻습니다. 정말 행복하십니까? 지금 천국을 누리고 계십니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했는데 정말 마음에 평안과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합니까?

그렇다면 우리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무슨 날입니까?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올라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찾던 수많은 순례객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따르며 길에는 옷과 나뭇가지들을 깔아놓고 손에는 종려나무를 들고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외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던 감동의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한데 동시에 종려주일은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고난 주간이 어떻게 끝납니까?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온갖 희롱을 당하시고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맙니다. 다시 말해서 종려주일은 곧 고난 주일입니다. 그 화려한 환호성이 그 감격이 어째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비난으로 바뀌고 말았던 것일까요?
그럼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 종려 주일 고난 주일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의 길은 배신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한 마디로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네게 복을 주겠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브라함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우리들이야 그 말씀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갈 3:6~7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이어서 8~9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우리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은 곧 믿음을 따라 반응하는 우리들에게 이어지는 것이요 따라서 우리도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받아야 하고 모든 족속이 우리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도록 하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한데 문제는 우리가 과연 그런 삶을 누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는 우리가 지금 얼마나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하나님 정말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 맞습니까 하고 탄식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줄 압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기 전에 먼저 주신 명령이 있습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더 이상 세상 방식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세상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믿는 구석을 남겨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데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누구 나를 좀 도와줄 사람 없소 하는 것이 우리네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사실이지 우리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돕는 배필이 주는 의미는 단지 부부 사이에 서로 도와야 된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돕는 배필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서로 돕는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서로 돕는 배필이 되기 위해서서 얼마나 수고하고 계십니까? 내가 도움을 받으려고 하기에 앞서서 먼저 도와주려고 하는 자세가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가 실망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생각해 보면 가장 속상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배신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속았다, 누가 나를 힘들게 했다, 누가 나를 어렵게 만들었다, 누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등등의 말을 우리가 합니다. 그 말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다 누구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말도 해 봤나요? 그건 어디까지나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잘못 생각해서고 내가 잘못 처신해서고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바로 헤아리지 못해서고 그런 생각들을 해 봤나요?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고 난 다음 12 제자를 부르십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먼저 예수님과 한 번 두 번 만나고 난 다음 그 부르심에 순종해서 예수를 따른 사람도 있었고 어느 순간 일터에서 딱 마주쳤는데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에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예수를 따른 제자도 있습니다. 여러 모양 여러 방법으로 제자들을 부르셨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친히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는 주님이 기도하시고 난 다음에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택하심에 어떤 실수가 있었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어째서 주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제자 가운데서 그것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세운 제자 가운데 하나에게서 배신을 당합니까? 무엇이 가룟 유다로 하여금 예수를 돈을 받고 팔아먹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건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벧전 1:2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보배로운 택하심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이요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믿음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욕심과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가룟 유다 그는 예수님께 사랑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는 제자 중 하나입니다. 보십시오.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재정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재정 전문가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리였던 마태가 그런 면에서는 더 적임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회계 전문가를 제쳐놓고 자기에게 돈 주머니를 다 맡길 정도로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룟 유다가 무엇 때문에 예수를 배신합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를 돈 받고 팔아넘깁니까? 그것도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을 말입니다. 

그건 가룟 유다의 출신 성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열심당원 출신입니다. 다시 말해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 운동가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을 통해 로마 통치 하에 있는 나라가 독립되기를 해방되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시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마냥 하는 말이 나는 죽으러 왔다고 하십니다. 거기에서 실망한 것입니다. 이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다 자기가 잘못 안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군사적인 왕이 되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지지리 궁상맞은 산골 출신의 어렵디 어려운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생각에만 잠겨서 예수를 오해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팔아먹기로 작정을 합니다. 한데도 그런 그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주님이 그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그에게 빵을 떼어주고 잔을 채워주십니다. 군사들을 데려온 가룟 유다를 보면서도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물론 여기서 친구라고 하신 헤타이레라는 말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시는 친구인 필레오와는 그 뜻이 약간 다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은 직업상 아는 친구 그냥 단순한 친구라면 요한복음 15장의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신 친구라는 말 필레오는 아주 친밀한 마음과 마음을 함께 나누는 친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실망을 하곤 있지만 여전히 그래도 그를 친구의 범주에 넣어주고 있습니다. 그건 가룟 유다가 회개하며 그 자리에 엎어지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가룟 유다는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보세요. 지난 시간 우리가 보았듯이 마가의 다락방에서도 저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면서 빵을 주셨을 때 그가 회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리를 떠나버립니다. 
한데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회개의 기회를 다시금 주십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까지 그 마음을 바꾸지 않고 주님의 품에 안기지 않고 자기 목을 매어 주님의 품을 영원히 떠나지 않습니까? 주님은 끝까지 한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자기 스스로 좌절하고 자기 스스로 떠나고 자기 스스로 피하여 방황하는 사람이 그래서 불쌍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주님 앞에 단순히 아는 친구 헤타이래입니까? 아니면 아주 친밀한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필레오입니까? 

따지고 보면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배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된 인생 되도록 부르셨는데 스스로 멸망의 길로 걸어 들어가고 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속으로 우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를 헤타이래가 아닌 필레오로 부르고 싶어서 그에게 한 마디 야단도 치지 않으시고 참고 기다리시는데 가룟 유다는 끝끝내 그렇게 하지를 않아 필레오가 될 기회, 택함 받은 자로서 영광의 자리에 앉은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저주와 멸망의 길로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자기의 욕심 때문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자기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틀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명예가 하늘 영광보다 중요했고 당장 세상의 돈 몇 푼이 하늘 영광보다 중요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의 명예 때문에 세상의 몇 푼, 돈의 있고 없음 때문에 나를 필레오로 부르시며 양의 모든 필요를 따라 채우시는 양의 목자가 되시고자 하는 주님의 품을 떠나 스스로 방황하며 헤타이래로 전락해 스스로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그로 말미암아 다시금 예수님으로 마음 아프게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시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주님의 길은 내려놓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하늘의 천사들을 수없이 동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세상 다 뒤엎어 버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왜요?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스스로 택하십니까? 그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시라면 그냥 쉽게 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이 걸어야 할 그 길을 직접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걸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본을 보이십니다. 너희도 이렇게 살아라 이를 위해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노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힘들어 하고 무엇 때문에 우리가 좌절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는지 잘 아십니다.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은 어떤 삶이었습니까? 그건 먼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욕심 내 생각 내 방식을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습니다. 첫째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잘 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몸만 건강한 것이냐 아니면 몸과 마음이 다 건강한 것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몸이 건강해도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아니 그러다보면 몸도 망가져버리게 되고 맙니다. 한 마디로 폐인이 되고 맙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유행처럼 퍼지는 성형 때문에 놀란다는 것입니다. 아니 누구나 다 돈을 들여 예쁜 모습으로 바꾸다보면 다 같은 모습이 되고 말 것인데 그러면 잘 생겼다고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꾸며진 아름다움이 얼마나 갈까요? 아니 성형을 해서 변신을 해 놓으면 그 사람은 안 늙습니까? 그러면 언제까지 성형만 하면서 살 겁니까? 우리는 잘 생겼네 못 생겼네 하지만 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은 나를 세상의 제일 잘 생긴 사람이 아닌 유일한 존재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도 누구와 같은 모습으로 바꾸어주세요 하면 그래서 모두가 누구와 같은 모습이 된다고 하면 그거 서로 알아보기나 할까요? 

돈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가지고 있으면 만족할까요? 아니 지금 부족하고 지금 빚지고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돌이켜 보면 욕심 때문이요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와 필요한 건강과 필요한 지혜와 필요한 물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필요를 넘어 욕심을 부리다 보니 더 가지려고 하고 많이 가지려고 하고 빨리 가지려고 하다 보니까 탈이 나는 것이요 내 분수를 넘으려고 하니까 탈이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반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건 내려놓는 삶입니다. 주님은 하늘나라 보좌가 그 자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내려놓고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것도 왕궁이 아닌 산골짝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왕의 아들로 오실 권한이 없으십니까? 예수님이 부자의 아들로 오시면 안 될 이유라도 있으셨나요? 그런데도 주님은 다 내려놓으셨습니다. 얼마든지 예수님이 말을 타실 수도 있었습니다. 한데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듭니다. 호산나 외칩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누가 강요를 한 것일까요? 아니에요. 이게 하나님의 역사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려놓는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낮은 자리로 간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저도 경험해 보지만 결코 쉽지를 않아요. 얼마든지 대접을 받을 수 있는데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는데 그걸 마다하고 아래 자리로 내려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고 하는 것이 윗자리를 차지해보면 알게 됩니다. 그 막강한 자리를 내놓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이 참으로 이상한 게 그런 자리를 마다하고 내려놓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존경을 하는 게 아닙니다. 무시해 버려요. 그러니까 내려놓는다고 하는 것은 존경받고자 하는 그런 마음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럴 때 내가 섭섭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데 그게 여전히 쉽지는 않아요. 어찌 사람인데 섭섭한 마음이 없겠어요? 오죽하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울며 기도하셨겠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세요. 하지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하기가 쉬운 줄 아십니까? 내가 윗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뜻도 됩니다. 반대로 내가 윗자리를 내려놓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상처를 받는다는 뜻도 됩니다. 결국 누군가에게는 상처입니다. 한데 그 상처가 나만 받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함께 받는다는데 있습니다. 세상이 참으로 이상해서 저마다 이용해먹으려고만 하지 이용당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홍목사 너는 어떠냐 하신다면 저도 할 말은 없어요. 

나름대로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만 그래도 아직도 부족해서 옆에서 보실 때 피식 웃을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젊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 육십이 넘어 승합차를 직접 끌고 다니다 보니 어디를 가든 우습게 보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뻔히 그 눈치를 아는데 그거 감당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셨는데 나는 예수 팔아 호화 호식한다면 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쉽게 생각한 것도 많습니다. 쉬울 줄 알았어요. 한데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좀 무시를 당해도 그건 참겠는데 그런 나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까지 무시를 당할 때는 진짜 속상합니다. 그런데 그게 주님의 마음입니다. 악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로 하여금 속상하게 만들고 그래서 좁은 길로 가고 험한 길로 가기를 포기하도록 만들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고만 합니다.
 
한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잘 먹고 잘 살고 호화호식하며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세상 같지만 역사의 물줄기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손길을 받을 수 있습니까? 누구의 손을 하나님이 붙잡아 주십니까? 바로 연약한 자요 희생하는 자요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입니다. 

예수님은 “주님, 나로 하여금 주님을 따르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그 청년을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이가고 말았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다면 결정하기가 쉬웠겠죠? 요즘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남들만큼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데 그렇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수입보다는 지출이 많기 때문입니다. 

왜 지출이 많습니까? 그거야 쓸 일이 많기 때문이겠죠? 그럼 그건 반드시 그렇게 써야만 됩니까? 그거 안 쓰면 안 되는 거냐고요? 문제는 서록 경쟁하다시피 서로 더 쓰려하고 더 많이 쓰려 하기 때문입니다. 뭐 산에 다니는데 입는 옷이라고 하는 것도 요즘 무슨 아웃 도어니 해서 대단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옷이 한 벌에 몇 십 만원 심지어는 백만 원이 넘는 옷도 우습게 알아요. 아니 어린 아이 유모차만 하더라도 몇 백만 원짜리 외제 유모차에 태우면 아이가 더 건강하게 더 지혜롭게 자라나요?
5학년 3반 김하진이 쓴 소나기라는 삼행시가 있습니다.

소, 소방차가 불난 집 불을 끈다
나, 나는 신나게 구경을 했다.
기, 기절했다 우리 집이었다.
우리 교회 김하진인지 다른데 김하진인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아이의 순박함이 잘 담겨있습니다. 반면에 재미있는 글 하나를 더 소개하겠습니다.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라고 “아인슈타인” 우유를 먹여 키웠습니다.
근데 아들이 초등학교 다니는데 영~ 세계적 인물은 못될 거 같아서 우유를 바꿨습니다.
서울 대학이라도 가라고 “서울 우유”로요.
근데 이놈이 중학교를 가니...서울대도 가기 힘들 듯 합니다. 
아쉽지만 한 단계 낮춰야 할 거 같아 “연세 우유”로 바꿨습니다. 
근데 실력이 택도 없어 마음을 비우고 좀 더 낮춰서 건국대학이라도 가라고
“건국 우유”를 먹였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ㅠㅠ
고등학생이 되니... 건국대 근처도 못갈 거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유를 바꿨습니다. “저 비방 우유”로요.
저어~쪽 지방에 있는 대학이라도 붙어주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우수개 소리입니다만 여기 슬픈 우리 자화상이 있습니다. 자기 개성을 찾아 자기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기 보다는 그냥 개성 없이 부모의 욕망을 따라 자식을 키우려고 하고 그것도 경쟁적으로 남들보다 나은 자식을 만들려고 하는 그 욕심 때문에 사실은 자식을 망치고 나를 망치고 삶은 더없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기러기 아빠가 왜 생깁니까? 아니 외국 나가서 공부하면 그 자식이 특별한 자식이 됩니까? 물론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죽습니다. 외로움에 견디다 못해 아버지는 죽습니다. 물론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버지라고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짜 사랑일까요? 
한데 주님은 다 내려놓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려놓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나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여전히 이악스러운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주님의 절규가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하나님께로 부터도 완전히 버려지기까지 그렇게 예수님은 자신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보배로운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어를 더 욕심낸단 말입니까?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여기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좀 부족하게 먹으면 안 되나요? 외식은 안 하면 안 되는 건가요? 꼭 비싼 음식을 먹어야만 되는 건가요? 몇 백만 원짜리 옷을 입으면 더 달라지나요? 

솔직히 우리 욕심을 버립시다. 이왕이면 좋은 거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게 바로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약이라는 것은 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절제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말도 절제하고 우리 생각도 절제하고 우리 삶도 절제해야 합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 이거처럼 무서운 말이 없습니다. 남들도 다 하는 데라는 말 거기에 속지 마십시오. 옷이 체면이라고요? 그런 말에 속지 마십시오. 남들이 어떤 눈으로 보느냐 거기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만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세상을 정말 멋진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멋진 세상의 중심에 바로 이렇게 주님처럼 내려놓고 또 내려놓는 그래서 내려가고 내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모든 것을 쉽게만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어제 컨테이너 하나를 옮겨왔습니다. 신학교 사무실 겸 강의실로 쓰던 컨테이너입니다. 신학교로 사용하던 교회가 이웃 교회와 통합을 했습니다. 한 분이 건강이 여의치를 않아서 목회를 접어야 하는데 그러자니 나이도 있고 살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합해서 그분의 뒤를 좀 더 도와드리기로 했습니다. 목사님이 사실 수 있는 집을 하나 얻어 드리고 몇 년간 작지만 교단에서 연금이 나올 때까지 만이라도 생활비 일부를 지원해드리기로 했습니다. 

작은 교회라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이렇게 해서 가능하게 됐습니다. 그래 컨테이너를 어디다 둘 수가 없어서 차라리 우리 교회로 옮겨오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냥 쉽게 지게차 부르고 트럭 불러서 날름 싣고 와서 다시 내려놓으면 될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입구의 간판이 문제입니다. 폭도 별로 여유가 없지만 더 큰 문제는 위가 닿아서 트럭이 못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밖에서 지게차로 들어 올려서 들어와야 하는데 그러자면 지게차 두 대가 앞뒤에서 균형을 맞추어 들어오면 될 거라 했는데 지게차 기사가 와보더니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듭니다. 

이렇게 저렇게 재보더니 도저히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간판을 떼어내고 들여온 다음 다시 간판을 달거나 아니면 트레인을 불러서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간판 업자를 불러서 물었더니 작업용 트레인이 없이는 그 작업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지금은 트레인이 작업을 나가서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금을 주고 큰 트레인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 우선 컨테이너는 앞 집 중고 상회 앞에 임시로 내려놓고 큰 트레인을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려서 새벽이 아니면 작업을 할 수가 없고 거기다가 지게차도 한 대 다시 불러서 제자리를 찾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분이 말합니다. “혹시 목사님이세요.” “예 그렇습니다.” 했더니 “저도 창록교회에 나가는데요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혹 바닥에 파이프를 깔고 그 위에 컨테이너를 얹어서 지게차로 뒤에서 밀면 비용도 줄일 수 있고 더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고는 지게차 사무실에 전화 걸어서 “아주 기술이 좋은 분으로 큰 지게차에 파이프 좀 가지고 오도록 했으면 좋겠는데 먼저 사람을 보내서 한 번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랬는데 얼마 있다가 큰 지게차가 그냥 온 겁니다. 아니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저렇게 재보더니 그냥 들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지게차 발을 끼워서 왔다고 하면서 단지 옆에서 차를 막아 주시고 옆에 닿는가 안 닿는가만 잘 조심해서 봐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살짝 들어서 두 기둥 사이로 양쪽 10cm밖에 안 되는 공간 사이로 위로도 5cm밖에 여유가 없는데 그 사이로 통과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직접 평형도 잡아주고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해주고 돌아가서 얼마나 감사했던 지요? 

처음 점심시간 될 때가지만 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게 제 욕심이었나요? 너무 쉽게만 생각했나요? 그랬다면 용서하시고 이게 어떻게 해서든 들어와야 한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세요. 순적하게 길을 열어주세요 기도했는데 이렇게 믿음의 사람 보내주셔서 자기가 시간을 기다렸다가 자기 트레인으로 하면 한 몫의 돈을 벌수도 있을 텐데도 오히려 교회 걱정을 해주며 자기가 주선해서 다 일을 만들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고 이웃 주민들도 제가 평소에 보지도 못했던 분들이 나서서 다 도와주고 컨테이너가 들어올 때도 옆에서 차를 막아주시고 옆이 닿지 않는가 함께 보아주며 도와주시는 걸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아직도 풋풋한 정이 살아있음을 보며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때로는 우리들에게 피해만 주는 이웃들 같았는데 우리가 이렇게 곤경에 처하니 앞집 중고 상회도 불편을 감소해 주셨고 이웃들도 마찬가지 오히려 한 마음으로 교회를 염려하며 일을 도와주려고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거기다 마침 교회에 와 계셨던 김종태 집사님까지 아침부터 일 마쳐진 오후 세시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으셔서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를 위하는 일에는 이런 역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라고 큰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이런 작은 사랑의 나눔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세 개의 못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못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신 것입니까? 아니면 못이 있기에 주님의 역사가 완성된 것입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기 전에, 큰 것 좋은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오히려 가장 평범한 것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깨닫고 행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는 이 고난 주일이요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 오히려 주님을 찾고 그로 말미암아 응답하시는 주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활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모든 모습이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