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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갈보리 언덕의 세 십자가 (눅 23: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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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언덕의 세 십자가 (눅 23:32-43)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되새기는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에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며 맞이했기에 종려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이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며 어느 때보다 더 경건하게 지내야 하는 주간입니다. 이 주간만큼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탐하거나, 육신의 쾌락은 좇는 것을 피하며, 가능하다면 며칠이나 아니면 하루 한 끼씩이라도 금식하며 지내는 것도 좋습니다. 이것은 경건의 연습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4:7~8 말씀하시기를“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연습)하라 육체의 연단(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를 골고다, 또는 갈보리 언덕이라고 부릅니다. 갈보리는 라틴어이며, 골고다는 히브리어로서 같은 의미인데“해골의 곳”이라는 뜻입니다. 지형이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당시 로마뿐 아니라 아프리카, 애굽, 파사, 헬라 등지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형은 너무 잔인하고 끔찍한 형벌이기 때문에 로마 시민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형벌을 예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갈보리산 위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모양과 처형 방법은 같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첫째, 자기의 죄 값으로 멸망한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당시 십자가에 못을 박아 사형시키는 것은 흉악범을 처형하는 극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두 강도가 그렇게 처형되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양심의 법에도 어긋나고, 국법에도 어긋나며, 하나님의 법에도 어긋나는 죄를 범하다가 국법에 의해 처형당해 죽었습니다. 이 죄수는 마음이 완악하여 마지막까지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까지 조롱하다가 죽었습니다. 본문 23:39에“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하며 주님을 조롱했습니다. 이 강도는 육신의 생명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그의 영혼까지 멸망하여 지옥의 형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해 요한계시록 20:10~15에 밝히시기를“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았던 강도가 간 지옥이 이곳입니다. 생명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고 하셨는데, 이 생명책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죄를 회개하므로 구원받은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23:40~41에“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비방하는 강도를 꾸짖는 또 다른 강도의 말입니다. 이 강도가 말하기를“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다.”라고 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을 찾고 계시며,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13에 말씀하시기를“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 구원자로 믿었습니다. 본문인 누가복음 23:42에 강도가 말하기를“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회개한 강도에게 나타내신 용서의 약속,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 강도가 평생 동안 한 일은 죄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깨닫고 회개하므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창세 이후로 이 세상을 살다간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행운을 맞은 사람을 찾는다면 바로 이 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평생 자기 멋대로 온갖 못된 죄를 지으며 살다가 죽음직전에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수양이나,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4:12 말씀에“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되어 나올 때, 하나님이 내리신 마지막 재앙이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심판의 기준이 문설주에 양의 피가 묻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가 묻어 있는 집에는 저주가 임하지 않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반면 문설주에 양의 피가 묻어 있지 않는 집에는 죽음의 저주가 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비밀이며 구원의 기준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아닌 양의 피가 저주와 생명의 기준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상징 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으면 구원이요, 믿지 아니하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29에 예수님을 가리켜“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빨래를 짜면 물이 나오고,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온다. 구약을 짜면 짐승의 피가 나오고, 신약을 짜면 예수님의 피가 나온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시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맨 처음 천사는 금덩어리를 찾다가 "아니야, 이런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충분히 가지고 있어." 하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한 움큼 쥔 금덩어리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천사는 하나님께 바칠 귀중한 물건을 찾느라 세상을 두루 살폈지만 안타깝게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죄인의 부르짖음이 들렸습니다. 발끝을 들어 올리고 살그머니 그가 꿇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지켜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죄로부터 구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옳지, 이제야 찾았다!" 천사는 금으로 만든 상자에다 눈물방울을 담아 하늘로 가지고 왔습니다. 천사는 이 땅에서 제일 귀한 보석을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죄인들이 돌아와서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자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도행전 2:21에“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려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에 대하여 듣고 알아야 합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들으려면 누군가가 전해야만 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순서에 대하여 로마서 10:13~14에 말씀하시기를“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전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생명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 복음은 부뚜막의 소금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할 사명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전하기만 하면 성령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199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지존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살인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인육을 먹었던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김현양이 교도소에서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작곡가이며 사랑의 교회를 다니는 이재명 집사님이었습니다. 김현양이 이재명 집사님께 이런 감사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난날 사회를 어지럽히던 살인자 김현양이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이 세상 서로를 존중하며 아껴주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면 저 같은 죄인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란 것도 잊지 말고 전해주세요. 이재명님이 나눠주신 사랑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조금 남은 생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야겠지요. 이재명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김현양 올림.”
처음 체포되었을 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전혀 죄를 뉘우치지 않던 그 모습이 변하여 이렇게 순한 양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화 시켰습니까? 그것은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 4:1-2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고난 주일을 앞두고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에 직접 매어 달리는 체험 행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감동을 받는 것은 매우 귀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정신에 가장 부합한 것은 십자가의 피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깨달은 사람의 삶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불 못인 지옥에 갈 영혼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거리를 걸어보는 것, 십자가에 매달려 보는 것은 그 순간 깊은 감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동이 복음증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헛된 행사일 뿐입니다. 그런 체험적인 행사를 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곧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 4:1-2)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남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구원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갈보리 언덕의 세 십자가 중, 가운데 세워진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죄가 아닌 남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마태복음 9:13에 말하기를“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찰스 대니(Charles Darney)라는 프랑스 사람이 중한 죄로 인해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시드니 카톤(Sydney Carton)이라는 미국인 변호사였습니다. 시드니 카톤은 프랑스 친구를 위해 자신이 대신 죽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외냐하면, 그 사람은 아내와 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될 형편이고, 자기에게는 딸린 식구가 없기 때문에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형집행일 전날 감옥에 찾아가 면회를 하면서 변호사인 자신의 옷을 벗어 죄수인 친구에게 입혀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죄수복을 입은 그 변호사는 마침내 끌려 나가 단두대에서 처형이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나“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요한복음 15:13을 되새기면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생명을 버린 친구의 희생으로 인해 찰스 대니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죄를 그냥 용납하시지는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죄 값으로 멸망당하는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죄 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므로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함께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18에 말씀하시기를“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하셨습니다. 

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관원들은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면서“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누가복음 23:35)라고 했습니다. 로마 군병들도 비웃으며“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누가복음 23:37)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죄인 된 우리들은 구원하시고자 극형의 고통을 묵묵히 참으시며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생이 있는 하늘나라를 잇는 구원의 다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21에 말씀하시기를“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길 가운데 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 길 가운데 가장 좋은 길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6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만이 인간을 위해 죽으셨고, 그분만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토록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 믿고 순종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고, 참된 만족이 있고, 진정한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된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 4:1-2) 고 준엄하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증거의 유무는 우리가 선택할 사항이 아닙니다. 오직 순종해야 할 뿐입니다.“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극치입니다.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섬기는 사람에게 험한 세파를 이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이 시간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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