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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그 분께서 오셨습니다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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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께서 오셨습니다 (마 15:21-28)

종려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노래하며 환영했습니다. 

종려주일의 주제는 <주님의 오심>입니다. 신학자 <몰트만>의 표현을 빌린다면 예수님께서는 <오시는 하나님, Coming God>입니다. 그 분은 하늘 보좌를 떠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지금도 인생의 고난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오고 계십니다. 따라서 오시는 그 분을 환영하는 것이야말로 종려주일을 지키는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어떤 방법으로 영접해야 할까요? 지금은 예수님께서 몸으로 우리 곁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옷을 벗어 길에 깔 수도 없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배경은 갈릴리 지방에서 서북쪽에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입니다. 21절은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라고 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구약 시대에 페니키아 문명을 일궈낸 중심지입니다. 

<페니키아>는 그리스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인데, 그 곳에서 나는 조개껍질에서 고가의 자줏빛 염료가 생산되었기 때문에 <붉은 염료를 파는 상인>이라는 뜻으로 페니키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페니키아의 로마식 발음은 <포에니>입니다. 

이들은 세계 최초로 알파벳을 만들어 사용했고, 양쪽에서 노를 저어 빠르게 움직이는 갤리선을 처음으로 만들어 지중해를 제패했습니다. 페니키아는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에게 멸망한 후, 북아프리카로 이주하여 카르타고를 세웠고, 카르타고는 지중해를 놓고 로마와 각축을 벌이다가,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하여 주전 146년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에 가신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에 예수님께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 5-6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은 최우선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하셨고, 이방인에게로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던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땅인 두로로 방향을 잡고 가실 때, 제자들은 매우 의아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두로로 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방인들에게도 은혜의 보따리를 풀어 놓으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은총에 접촉하지 못하게 한 것은 일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원대한 구원 계획이 이미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종결 부분인 28장 19-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여기서 <모든 민족>이라고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사람은 물론이요, 사마리아 사람, 이방인 모두가 복음 전파의 대상임을 밝히셨습니다. 

또 사도행전 1장 8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땅끝>의 모든 민족이 복음을 받아야 할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이방인에게 처음 주시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주님의 마음>을 읽길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은혜를 주고자 하시는 마음>입니다. 두로와 시돈 지방까지 가셔서 은총을 선포하길 원하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은혜 주시길 원하십니다. 두로를 향하던 주님, 그 후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주님은 지금은 우리를 향해 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종려주일을 지키는 방법은 <주여, 제게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부르짖으며 그 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당신께로 나와서 은혜를 받길 기다리십니다. <은혜를 주려 하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은총을 가장 먼저 받는 영광을 차지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본문 22절은 그 주인공이 이름 있는 정치인도 아니요, 유명한 학자도 아닌, <가나안 여자 하나>라고만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여인이 지극히 평범한 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큰 위로가 됩니다. 그녀가 특별하고 저명한 인물이었다면, 유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좌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 가나안 여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녀가 <한 가나안 여인>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한 남자>요, <한 여자>로서 충분히 주님의 은총과 구원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얻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입었을까요?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그녀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이 문제가 그녀를 예수님께로 이끌었습니다. 그녀에게 생긴 심각한 문제란 딸이 귀신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본래 두로와 시돈은 영적으로 암흑의 땅이었습니다. 구약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세벨이란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에게 시집와서 왕비가 되었는데, 그녀는 이스라엘을 온통 바알과 아세라 우상으로 뒤덮었던 간악한 여자였습니다. 남편 아합을 망하게 만들고, 그녀의 시신마저 개과 새들의 먹이가 된 비참한 여인이 이세벨이었습니다. 그 이세벨은 다름 아닌 시돈의 공주였습니다. 그녀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심하게 섬긴 것은 그녀가 성장한 이 지역이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보듯이 이 지역은 악령의 권세가 강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여인의 딸이 그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녀는 불쌍한 딸을 놓고 울부짖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방법은 단 하나, 예수님을 만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딸의 문제는 그녀에게 절망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그녀를 주님께 나아가게 만드는 끈이 되기도 했습니다. 

삶에서 부딪히는 위기와 문제들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할 때가 많습니다. 현재 우리도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질병, 경제적 고통, 악령의 역사, 우울증, 인간관계의 실패, 우리 공동체를 위협하는 제반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주님께 가지고 나갈 문제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주님께 나아갈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문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넋을 놓고 앉아만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본문의 여인만이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정말 특이합니다. 왜 그녀만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그녀만이 예수님께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가능성이 벽에 부딪힌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주님 앞에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본문 22절을 보세요.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이 시간 그녀의 짧은 기도를 배우길 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는 매우 짧지만, 강렬한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예수님이란 분이 계시다는 것, 그 분이 능력 많은 구원자임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그것을 보여주는 힌트가 있습니다.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은 이 여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언급합니다. 

마가복음 7장 26절에 보면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수로보니게>란 단어는 <수리아>와 <페니키아>가 합쳐져 생긴 말로 이해합니다. 즉 수리아에 사는 페니키아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여기서 의미가 있는 것은 <수리아>란 지명입니다. 수리아는 갈릴리 지역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서 후에 안디옥 교회가 있었던 곳까지 망라합니다. 

그런데 이미 이 지역까지 예수님의 소식이 퍼져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24절을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를 보여주는 대목인데, 이미 그 때 예수님의 소문은 온 수리아에 퍼져가고 있었고, 본문의 여인도 예수님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딸을 데리고 갈릴리 지방으로 내려가서라도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놀랍게도 그 분이 자신들의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여러분, 여인이 예수님 소문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훨씬 정확히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하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녀가 예수님께로 달려간 것처럼, 우리도 당연히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우리 마음에 고통이 고이기 시작할 때, 이것저것 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할 일은 예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다면 여인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녀를 어떻게 맞이하셨습니까? 일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찾아왔을 때 귀찮아 하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복음 7장 2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급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원하셨는데, 숨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찾아온 것을 별로 반기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본문의 전개되는 내용을 보아도 예수님께서 그녀를 귀찮아하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부르짖을 때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는 조용하게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계속 뒤에서 쫓아오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견디다 못한 제자들이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23절을 보세요.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했지요?  제자들의 건의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매우 냉담합니다.

24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러면 그렇지, 선생님께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가지 말고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전하라고 하시지 않았었나? 이 곳 두로로 오실 때, 이상한 생각을 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전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생각은 변치 않았어. 저 여자가 저렇게 부르짖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으시지 않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여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5절을 읽어봅시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러나 이 때 예수님은 마지막 펀치를 날리셨습니다. 26절을 보면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자신을 개에 비유하시는 이 심한 말씀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평소에 자비로우시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 앞에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이 틀림없이 화를 내면서 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27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그녀의 이 대답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더 할 말씀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을 개라고 하면서까지 부스러기 은총이라도 달라고 요구하는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28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이 본문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매우 은혜 베푸시는 일에 인색한 분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능력을 가지고 이 여인의 딸을 고쳐주시는 게 뭐가 어려워 이토록 여인을 당황하게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런 것일까요? 소문을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기분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은혜를 주신 것입니까? 은혜를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인의 너무 지독하게 따라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까?  그래서 본문은 우리에게 <너도 독한 마음을 먹고 기도해라. 인색하신 예수님께 은혜를 받아내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자존심이 상해도 포기하지 말고 달라붙어라!>, 이런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 숨어 있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숨어 있는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아, 난 네가 귀신들린 딸로 고통 받으면서도 그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고 버틸까봐 염려했다. 네가 내게 나와 부르짖지 않을까봐 걱정했어. 그런데 네가 와서 이처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으니 정말 기쁘다. 일찍이 이 수리아 지역에 내 소문이 퍼지게 한 것은 다 내 포석이었다. 지금쯤이면 충분히 내 소문이 퍼졌을 테니, 이제 가면 누군가는 나를 맞으러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네가 날 영접하는구나! 너는 온 세상의 이방인 중에서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첫 사람이다. 단단하게 포장된 선물의 포장을 뜯는 것이 그리 쉽겠느냐?  그러나 포장을 뜯는 것이 어렵다고 선물을 포기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느냐? 내가 이방인에게는 은혜를 주지 않을 것처럼 말한 것, 너를 개에 비유한 것은 네가 끝까지 포장을 뜯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 시험해 본 것이다. 난 네가 중간에 포기할까 염려했다. 됐다. 이제 하늘로부터 내리는 구원의 은총이 너를 시발점으로 해서 온 세상에 퍼질 것이다. 이제 나는 곧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십자가를 질 것이다. 그 십자가에서 흐르는 내 보혈과 부활에서 드러날 생명이 네가 사는 두로와 시돈에도 흐를 것이며, 온 세상에도 흐를 것이다. 너는 이방인의 땅으로 은총이 흘러가도록 물꼬를 튼 사람이다. 넌 날 기쁘게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마저 날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서, 내 구원의 은총을 입을 사람들은 너희 이방인들이다. 넌 그 첫 열매이다.> 

이 여인과의 만남이 있은 후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셔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확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모든 민족>, <땅끝>으로 가는 복음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구원의 은총이 이방인의 땅에도 흐를 수 있도록 막힌 담을 뚫어 물줄기를 낸 기념비적 사건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던 사람들이 손에 들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어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본문의 여인은 <기도라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계속 부르짖은 기도야말로 그녀의 손에 들린 종려나무 가지요, 호산나의 찬송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예루살렘 주민보다 훨씬 먼저 종려주일을 맞이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2천여 년 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온갖 문제를 가지고 나와 눈물로 부르짖는 사람의 삶에 들어오십니다. 눈물의 기도, 그것이 우리가 흔들 종려나무 가지입니다. 은혜를 얻을 때까지 다가서서 부르짖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2천여 년 전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지금 예수님은 각자의 삶에, 각자의 가정에, 지극히 은밀하게 개인적으로 임하고 계십니다. 그 분께 여인과 같은 굴하지 않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임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맞아들이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 분이 오셨습니다. 지금도 오고 계십니다.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영혼과 인생을 구원하시고 치료하시고 축복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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