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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고난의 열매 부활 (요 11: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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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열매 부활 (요 11:38-44)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고난과 부활 

욥 19:23-26 요 11:38-44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력으로 말하면 가장 절정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나타나더니 중병자들을 고쳤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청중들이 몰려갔습니다. 좋게 보면 신선하고 새 인물의 출현으로 그 시대의 대안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기대감이 컸습니다. 

그런데 나쁘게 보면 기존 질서를 무너트리고 사회에 불화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있습니다. 집권자들이 보면 분명 국론 분열자입니다. 빌라도가 볼 때는 로마가 원하는 것은 안정인데 예수가 불안을 일으키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제자들은 죽은 예수의 십자가를 전하고 다녔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알기로는 십자가는 무서운 형틀입니다. 그 무서운 형틀에서 처형된 그 예수를 전하고 다닙니다. 그 예수는 분명 죄수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었습니다. 또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육신을 입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한사람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헬라인들이 듣기에는 무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불신하였고 거부하였고 반대한 것입니다. 

  
한가지 생각할 일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피상적으로 현실만 보고 너무 쉽게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답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답이 나왔다 하면 그것이 진리이고 보화입니까? 오늘은 좀 깊이 생각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좀 깊이 생각 해 보면 답이 나오게 되고 좀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는 누구인지, 누구이기에 원초적 질병들을 고칠 수 있는지, 그는 왜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었는지, 그는 왜 십자가에 죽으면서도 말이 없었는지, 모든 사람들이 항변하는데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죽어갔습니다. 

왜 일까, 그는 과연 누구인가, 사람들은 깊이 생각을 안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생각 없이 쉽게 판단합니다. 고민해 보지 않습니다. 깊이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깊은 곳에 숨겨진 이유나 원인이나 진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저 제자들이 지금 왜 저렇게 목숨을 걸고 뛰어다니며 전도를 하고 다니는지, 저들은 왜 목숨을 걸고 저 십자가를 전하고 다니는지, 저들이 말하는 부활은 분명 거짓말 같은데 왜 저렇게 피를 토하면서 부활을 전하고 다니는지, 사람들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갠지스 강둑에 앉아 있는 도승에게 “어떻게 하면 신을 만날 수 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 도승은 그 젊은이를 데리고 물로 내려가 물속에 집어넣고 한참을 있다가 올렸습니다. 그리고 질문했습니다. “물속에 들어가 있으니까 뭐가 가장 필요 하던가”, “공기입니다”, “자네는 물속에서 공기를 갈급함 같이 신을 찾아보라 그러면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값없는 것들은 하나같이 쉽게 발견하고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값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갈밭에서 금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바닷가 갯벌에서 진주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어쩌다가 만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게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사람들은 너무 쉽게 예수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깊은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쉽게 포기하고 쉽게 단념을 합니다. “그는 죽을 죄인이고, 십자가는 형틀이고, 부활은 제자들의 속임수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일이 자기들 시대에 자기들 삶속에서 벌어졌는데도 아무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 영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십자가는 거치는 것이 되었고 헬라인들은 복음이 미련한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죽음의 의미  

오늘 현대인들은 이 죽음의 의미를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매일 배설물을 쏟아냅니다. 배설물을 쏟은 다음에는 반드시 쳐다보아야 합니다. 냄새도 맡아 보아야 합니다. 배설물의 색깔도 보아야 합니다. 내 몸 안의 질병은 내 몸 안에서 쏟아낸 배설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모두 수세식이라 보기도 전에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보내 버립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죽음도 죽음 가까이에서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할아버지 죽음의 모습을, 부모님의 죽음의 모습을 죽음 곁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죽어가는 사람들은 쪽방에서 혼자 죽어가고 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혼자 죽어가고 오늘 노인들이 혼자 살아가다가 혼자 쓸쓸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죽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아이들도 죽음을 보지 못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교육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전에는 죽음을 옆에서 보았습니다. 병풍 너머에 산사람과 죽은 사람이 가까이 함께 있었습니다. 문지방 넘어 지척에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병원 영안실에 가 봐도 분향만 하지 죽음은 저 멀리 다른 공간에 떨어져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람들이 죽음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더욱 멀어져서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삶이 있으면 그곳에 죽음이 있습니다. 삶 전체는 죽음입니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분위기는 죽음 이야기를 흉측한 것으로 알고 가급적 피하려고 합니다. 사회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죽음은 아예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죽음도 잊어버렸고 누가 죽었다 하면 장례식장에 잠깐 갔다 금방 일어납니다. 그리고 고령사회가 되다 보니까 죽음에 신경 쓰지 않고 현실과 무관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데 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은 인생의 변두리가 아니고 우리 인생의 근처 한 가운데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물어야 합니다. “나의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나의 신앙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의 죽음은 무엇인가”를. 그래서 옛날 할머니들은 손자들에게 이야기를 한참 해 주시고 끝날 때는 반드시 “잘 살다가 죽었대”라고 이야기를 끝맺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지막에는 “성공했대”로 끝납니다. 그동안 성장과 발전만 따졌지 이런 문제들은 생각도 따지지도 묻지도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죽음은 예수의 죽음입니다. 4가지 의미가 있는 죽음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은 탄생 전부터 언급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50, 52, 53장에서 언급이 되었습니다. 예상치 않은 죽음이 있을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죽음은 탄생할 때 동시에 언급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고 성전에 결례를 받으러 갔을 때 늙은 신앙인 시므온이 아이를 안고 온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5)고 말해줍니다. 마태는 예수의 탄생으로 많은 어린 아이들이 학살당할 것을 이야기(마 2:16) 해줍니다.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죽음의 그림자를 말해 왔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의 죽음은 “너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내 삶 가운데 있고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죽음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이 너를 위한 삶이고 너를 위한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죽음은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100% 너를 위한 죽음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신 죽음입니다. 네 번째는 다시 살아날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살아날 죽음을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 다음을 말하고자 하는 죽음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  

본문은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이야기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사로를 살려내는데 목적이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 그 다음을 말씀하고자 함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며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는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자신의 부활을 예고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묻힌 무덤에 가십니다. 무덤 앞에서 죽은 나사로를 부르십니다. 그랬더니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세마포로 싸인 채로 나옵니다. 여러분은 이 무덤을 우리나라의 무덤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사로가 묻힌 무덤은 굴이었습니다. 굴속에 시체를 갖다 넣어 둡니다. 그리고 굴 입구를 돌로 막아 놓는 것이 그 당시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부르시니까 죽은 나사로가 굴속에서 세마포로 싸인 채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세마포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싸는 천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삼베옷인데 이것을 수의라고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평생 두 번 세마포로 쌉니다. 한번은 태어났을 때입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을 보면 예수께서 태어났을 때 “강보에 맏아들을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강보는 보잘 것 없는 포대기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났을 때 스스로 포대기를 싸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싸 주어야 합니다. 

또 한 번은 사람이 죽었을 때 세마포로 쌉니다. 그 때도 스스로 세마포를 싸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싸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은 죽는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납니다. 사람은 그때부터 죽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 지점에서 세상에 죽음과 부활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실례를 나사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사로 집으로 갑니다(요 11:13). 가까이 갔을 때 그때 누군가가 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 11:13).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도 병들어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도 병들고, 죽고, 무덤에 묻히고 썩습니다. 무덤에 묻힌 나사로의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났습니다. 죽음은 악취를 남깁니다. 그래서 죽음은 악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였다고(요 11:33)하였습니다. 

여기 “통분히 여겼다”는 말은 “화가 나다”라는 말입니다. 죽음 때문에 사람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속수무책입니다. 이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보시고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통분히 여기신 것입니다. 아들을 잃고 통곡하는 부모들을 보십시오. 그 순간 화가 납니다. 인간은 이렇게 무력한가 하고 화가 납니다. 예수님은 그 심정으로 통분히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함께 울어주십니다. 형제를 잃고 부모를 잃고 통분해 하는 가족들을 위해 함께 울어주십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화가 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으로 가셔서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은 이 부르심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이 부름은 이다음 부활해야 할 때 예수님이 우리들을 부르실 그 음성입니다. 그 때도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자 무덤에서 나사로가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전에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나사로가 죽고 무덤 속에 들어 나흘 만에 살아나옵니다. 이 일련의 사건은 불과 얼마 후에 있을 자신의 모습을 미리 연출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왜 무덤에 들어갑니까. 죽은 자가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살아 나오기 전의 과정입니다. 죽음은 부활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무덤과 부활을 보여주기 위한 전제였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보되 죽음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강보로 싸고 죽어서 세마포로 싸고 무덤에 묻혔습니다. 죽음은 그것으로만 끝난다면 인간처럼 허무한 존재도 없습니다. 세상을 좀 잘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그래도 덜 억울할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고생고생하고 고난 받고 가난 속에서 불편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할 것입니까. 부자가 지옥에 갔어도 덜 억울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 갔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갔으니 망정이지 지옥에 갔어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한 인생입니까. 세상에서 거지로 살고 죽어서 지옥가고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본문은 예수님은 여기서 죽음 뒤에 더 황홀한 부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죽음 뒤에서 부활이라는 강한 생명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숨겨진 부분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곧 단절이고 끝이라고 보고, 절망하고 눈물 흘리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사건에서 두 가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얼마 후 자신도 죽었다가 살아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부활을 설명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인류에게 주어진 진정한 복이고 은혜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죽음은 축복이고 은혜이고 감격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 부활 때문에 순교도 하고 종말을 기다리기도 하고 죽음을 감사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죽음관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죽음은 어둡고 불길한 것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느 노 목사님의 사모님이 먼저 소천 하였습니다. 무덤에 하관을 하고 내려오다 다시 올라가더니 무덤 앞에서 “내 곧 올게 조금만 기다려”그러고 내려 오셨습니다. 이것은 동화가 아니고 현실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모습입니까. 무엇이 멋입니까. 진정한 멋은 죽음 앞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죽으나 사나 다 좋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더 사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고백입니까. 죽음 앞에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고 오히려 초연하고 감사함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죽음 앞에서도 자신 만만합니까? 예수님이 이 길을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실연시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이 그 길을 실제로 가심으로 확증시키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십자가 뒤에는 이 놀라운 생명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만이 아니고 생명을 주는 나무였습니다. 

우리는 골고다에서 이 생명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인간의 생명도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좁은 문을 통과하느라 고난을 겪은 다음에 비로소 새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연의 새 생명도 겨울 엄동설한 매서운 추위 속에서 거의 죽어가는 고난을 겪은 후에 봄이 되면 새싹으로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도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무덤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왜 무덤에 들어가는가 하면 부활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골고다와 십자가는 새로 태어나기 위한 하나의 관문이고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거쳐야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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