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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짐 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갈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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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짐 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갈 6:1-5) 

한때 조선일보 칼럼을 썼던 [이규태] 씨가 <바가지 철학> 이라는 글을 썼었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바가지에 금이 가 쓰지 못하게 되면 버리질 않고 주렁주렁 엮어서 고이 보관해두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로 화가 치밀어 폭발할 기미가 보이면 살짝 금이 간 바가지를 부엌에 늘어놓습니다. 세간을 부수러 부엌에 들이닥친 아버지가 이 바가지를 짓밟음으로써 그 바가지 깨지는 소리로 울화를 풀게 하신 것입니다. 금이 간 요강이나 뚝배기도 버리질 않고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긴요하게 썼다고 합니다. 

아무리 화가 났다 해도 세간을 무차별로 파괴하는 것을 막고자했던 옛 어머니들의 숨은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부엌에서 바가지를 박박 소리가 나도록 긁는 것으로 며느리가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이 같은 심리의 연장선에서 합리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소리만 요란스럽고 경제적 손실을 극소화시킴으로써 화를 푸는 현명한 전통적 스트레스 해소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 어른들은 그만큼 화를 병이 안 되게끔 속으로 풀 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한국에 있어 박은 긁어대건, 짓밟아 깨건 울화를 속으로 푸는 스트레스 문화재였다고 하니 우리 선조들이 그토록 지붕이 가라앉을 것 같이 데굴데굴 많은 박을 기른 이유를 새삼스레 알 것만 같지 않습니까? 

한데 요즈음에는 박도 기르지 않고 아무리 긁어대고 밟아대도 소리가 그것만큼 요란하지 않는 플라스틱바가지로 탈바꿈한 탓인지, 속으로 화를 풀지 못하고 걸핏하면 분화구처럼 겉으로 화를 내뿜는 것이 예사입니다. 옛날 같으면 바가지를 깨고 긁는 것으로 해소시켰던 <고부갈등> 이나 <부부불화> 가 가출이나 별거, 이혼, 죽음 같은 극단으로 흐르고 있는 파멸 율이 높아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늘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것이 <스트레스> 입니다.  이 말은 <경고반응> 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는데 몸에 해로운 정신적·육체적 자극이 가해졌을 때 그 생체가 나타내는 반응을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스트레스가 아시아국가 중 한국인에게 가장 심하다고 합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65% 이상이 만성적 스트레스를 호소해 1위였고, 다음이 홍콩인 62%, 대만인 61% 순이었습니다. 그리고 태국인이 42%로 가장 낮다고 합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구조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 라고 설명하면서 그 유형을 나열합니다. 분단 상황이 일으키는 <전쟁 스트레스>, 인구가 많은 도시생활에서 생기는 <대인관계 스트레스>, 교통문제가 일으키는 <약속시간 도착 스트레스>, 허술한 교육제도가 야기하는 <사교육비 스트레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회식 스트레스>,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지도층이 제공하는 <지도층 불신 스트레스> 등이 한국인을 괴롭히고 있는 대표적인 스트레스의 유형들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40대 남성 사망 율 세계 1위, 간암 사망 율 1위, 직장인 스트레스 1위, 교통 사고율 1위, 1인당 연간 흡연 량 1위...더 이상 말하면 이것도 스트레스가 될까봐 이 정도로 그치겠습니다. 

이처럼 스트레스가 쌓이고 인생의 짐이 무거워질 때 신앙인인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오늘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신앙인들이라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교회 안에서 만납니다만 서로에게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합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스트레스가 없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 안고 살아갑니다. 그때마다 풀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돌아서면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 안에 산다고 해도 이것은 연속됩니다.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도 가끔씩 이 문제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신앙 안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신앙으로 풀면 됩니다. 오늘 본문에 그 방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세 가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요, 둘째는 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에서 균형을 잘 이루며 사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관계는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입니다. 다음이 나 자신의 성실성입니다. 그리고 성도로서의 이웃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와의 관계에는 좋은 교우관계도 있지만 때때로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게 해서 문제가 되는 관계도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바로 되면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로서로 격려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혹 내가 넘어지거나 나약해질 때에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합니다. 

또 위로해서 힘을 주기도하며 나태해지려고 할 때에 의욕을 심어주기도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가 지닌 아름다운 힘입니다. 하지만 교인이라고 해서 다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막 완전을 향해가는 그 도상에 있는 상태입니다. 조금 먼저 출발한 사람, 그 뒤에 선사람, 막 시작한 사람...여러 형태의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유치원생부터 대학생,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여기에서 다 똑같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대학원생은 대학생을, 대학생은 고등학생을, 중학생을, 유치원생을 먼저 이해하고 본을 보여서 함께 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누구나 다 성경에 대해서 해박하게 알 수는 없는 겁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기도를 유창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교인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지 틀렸다고, 잘못되었다고 무시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과 고백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몰라도 내가 주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그 분을 구주로 고백하며 변함없이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리라는 것이 본질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만 그 외의 것들은 좀 더 열심히, 열정적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하게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이것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야 하는 일들입니다. 도움을 주고, 때로는 필요한 도움도 받고, 가르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이 관계가 조화를 이룰 때 성도의 교제는 아름다워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라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신앙생활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3대의무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해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동정하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둘째는 용서하는 의무입니다. 배웠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합니다. 셋째는 사랑하는 의무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하는데 까지 나아가야합니다. 

요즘 가장 대두 되는 문제가 학교폭력문제입니다. 며칠 전에도 경북 청도에서 고등학생이 학교폭력을 못 견디고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단속을 강화한다, CC-TV를 설치해야한다는 등 해법을 내 놓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어른들이 이해와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늘 이기는 법만 가르쳤지 배려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도 밝히는 바입니다만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을 만큼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연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키엘 케고르] 가 말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인간적이다. 그러나 죄에 머무는 것은 악마적이다.” 문제는 죄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부족한 존재이지만 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그 죄에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혼자 살게 하지 않고 서로 돌보도록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교제라는 신앙생활의 덕목이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누구나 상대방에 대해서 세 가지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이해해주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남편이 나를 이해해 주고, 자녀들이 나를 이해해주고, 부모도 이웃도 나를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고, 둘째는 믿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제일 불쾌한 일이 남에게 의심받는 일이요, 불신당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덮어주기를 바랍니다. 

말하자면 용서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실수를 비난 없이 비밀을 지켜주었으면 하는 솔직한 마음이 사람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면 다른 사람도 똑 같은 마음일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짐을 서로 지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법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용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 반대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한없는 관용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하고, 책망하고, 정죄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일진대 오늘 성경은 완전히 뒤집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릇 사람은 사회성을 띠고 살아갑니다. 교회생활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 보일 때마다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도록 힘써야합니다. 나 자신부터 돌아보고, 내가 대신 질 수 있고, 거들 수 있는 짐이라면 서로 나누어져야 옳습니다. 서로 짐을 지는 것이 필요한 시대에 신앙으로 우리들이 행해야만 할 거룩한 사명이 곧 짐을 서로 지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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