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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이 원하는 기독교?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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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원하는 기독교? (행 3:1-10)

제가 대형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할 때였습니다. 아침이면 교회 사무실로 몰려오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교회 사무국에서 나누어 주는 사발면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빵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일까요? 최근 들어서 교회에서 사회복지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실제로 많은 대형교회들이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해 장애인복지관이나 노인복지관 등을 위탁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기독교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린 이유가 사회복지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2010년 1월 15일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2009년 한국 교회의 사회적 섬김 보고서’를 출간했습니다. 그 안에‘한국교회는 얼마나 한국 사회를 섬기고 있는 것일까?’라는 자료에 보면 개화 초기로부터 한국 사회복지의 뿌리 역할을 해온 기독교가 사회복지법인 수에서 불교 104개소, 천주교 58개소에 비해 상당히 높은 194개소의 법인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지역사회복지기관 운영에 있어서도 높은 실적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복지와 구제, 그것은 교회가 본래부터 힘써온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저희 교회 또한 열심히 그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복지를 감당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지, 기독교가 세상에 무엇을 줄수 있는 지를 설명해 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Ⅰ.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정한 기독교란 무엇일까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기독교는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지 교회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움직임이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제 구시, 현대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오후 3시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시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미문을 막 들어가려 하는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걷지 못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앉은뱅이가 구걸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누군가 아름다운 문, 성전 미문에 데려다 놓은 것입니다. 미문은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 안의 첫 번째 장소인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출입구로서 사람들이 많이 통행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구걸을 했을까요? 사도행전 4장 22절을 보면 그 사람의 나이가 40세 정도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지난 40여 년간 그는 누가 미문에 데려다 놓지 않으면 안 되는 무기력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허물로 인해 무기력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시편 51장 5절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렇습니다. 나면서부터 우리는 무기력했습니다. 죄와 유혹에 무기력합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40여 년간 무기력하게 살았던 앉은뱅이 걸인처럼 무기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걸인에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3장 8절을 보시0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일시적 만족으로 인해 다시 허무와 절망에 빠지는 사람들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무기력한 죄인, 무기력한 걸인을 위해 베드로와 요한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그를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장 3-4절 보시죠.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태어나면서부터 구걸하는 인생이 아니었습니까? 40여 년간 미문에 앉아 있었던 인생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누가 그를 쳐다보기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그를 주목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는 ‘블레포“라는 헬라어인데, 영어로 번역하면 'look at'이라는 의미입니다. 의도적으로 시선을 멈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주지만 기독교는 무기력한 자에게 시선을 줍니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죄와 허물로 망가져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를 주목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기력한 세상을 위해 멈추어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기력함을 느끼고 계십니까? 아니면 종교행위를 하기 위해 미문으로 들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자신의 힘으로 살고 계십니까?

Ⅱ. 한발 더 나아가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정한 기독교란 무엇일까요?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답을 먼저 말씀드린다면 기독교는 세상이 원하는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걸인을 주목하면서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걸인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3장 5절을 보시죠.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미문에 들어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볼 때 걸인은 무심코 쳐다보았습니다. 그냥 시야에 두 사람이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멈춰 서서 주목하자 걸인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쳤고 기껏해야 동전 한닢을 주고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멈춰 서서 “우리를 보라”고 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주려고 하는 것이지? 더 이상 구걸하지 않도록 엄청난 은과 금을 주려는 것일까?'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을 보시죠.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얼마나 실망스러웠을까요? 큰 적선을 바라며 시선을 고정시켰던 앉은뱅이 걸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내게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에 실망하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가 자신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돈을 기대합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성공을 기대합니다. 질병의 치유나 심리적 치료를 기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멋진 음악과 찬양을 통한 감동을 기대하고, 어떤 사람은 탁월한 도덕과 철학을 기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회적 봉사나 정치적 개혁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멋진 예배당과 건축물을 기대하기에 건물이 잘 지어진 교회로 몰려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가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주려는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어나 걷게 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40년간 앉은뱅이 걸인의 지인들은 그를 성전 미문에 앉혀 구걸하게 함으로 생계를 유지시켰습니다. 또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걸인에게 값싼 동정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준 것은 걸인의 근본적인 문제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참 안타깝지 않습니까? 성전 미문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사람들이 주는 값싼 자비를 기다리는 걸인의 모습. 혹시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Ⅲ. 마지막으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정한 기독교란 무엇일까요?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복음입니다.‘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새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을 다시 보시죠.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내게 있는 것, 기독교에 있는 것, 아니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요?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심오한 철학과 탁월한 프로그램이 제공되어도 사람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직 삶을 바꾸는 위대한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교회 안에 복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릭 홀랜드는 “담대한 복음전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복음을 자주 전하면 사람들이 회개하고, 사회가 변화되고, 민족이 개혁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교훈을 가르친다. 예수님이 구원자요, 주님이시라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깃들어 있다. 그와 반대로 충실한 복음 증거를 외면하는 설교는 교회를 죽어가게 만들고 사회를 부패하게 만든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설교되고, 복음이 가르쳐지고,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이 살아있는 교회가 별로 없습니다. 릭 홀랜드는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복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설교에서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은 별로 없다고 증언합니다.

지금은 기독교의 위기입니다. 교회가 구제와 사회봉사를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에 좋은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에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다른 것들을 행하는 기독교를 향해 마틴 로이드존스는 기독교의 이름을 가장한 사이비종교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그것을 '자선 베풀기'라고 말합니다.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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