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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성함을 위한 기도(2) (엡 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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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함을 위한 기도(2) (엡 3:14-19)

인터넷에서 한 여학생이 쓴 이런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과정에 대해서 간증식으로 쓴 글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에 예수를 믿는 한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고3이라 수능 준비에 다른 친구들은 모두 스트레스를 받으며 정신없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친구만은 늘 평화로워보였습니다. 표정도 늘 밝고 온화했고,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예능을 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 남아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저녁 시간이면 그 친구는 늘 먼저 집에 가곤 했습니다. 그 친구와 학기 초에 친해질 기회가 있었지만, 그 친구는 늘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자신은 워낙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자라서 교회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와의 사이가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그는 다른 친구와의 사이에 문제가 생겨 마음이 굉장히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친구가 자신에게 찾아와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 친구는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끝까지 다 들어주었고, 설령 자신이 잘못한 부분이 있어도 그 점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힘든 자신의 마음의 고통까지 다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친구가 자신을 용납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후 더욱 가까워진 그 친구는 늘 자신을 이해해 주었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겠다는 말도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학교생활에 신이 나기 시작했고, 학교에 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 친구랑 함께 있는 시간들이 너무 행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좋아졌기 때문에 그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 친구가 전해준 복음을 들으면서 신기하게도 그 말이 믿어졌고, 결국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는 그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로 글을 맺고 있습니다.  ‘그 친구를 만나게 해 주시고 그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주시고 그 친구를 통해서 복음을 듣게 해 주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여러분, 내 삶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지금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 가운데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크신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가운데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힘입어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무지 가운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세상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 기쁨과 감사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머물며 사는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귀한 것을 가슴에 품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그렇습니다. 세상 그 무엇을 담는다 해도 다 담을 수 있을만큼 큰 사랑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내가 받고 있음을 알고 그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세상보다 크고 넓은 사랑의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만 우리 가슴에 담겨져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늘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늘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우리의 가슴에 담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박고,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창조하신 가장 귀한 최고의 걸작품 중에 하나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인 교회에 소속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소망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속 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겉모습을 가꾸고 치장하는데 시간을 들이고 돈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물러 우리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마음에 머물러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잠깐 와서 머물다 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주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모시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의 삶과 인생에 주인이 되시면 우리는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우리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 마음과 인생의 집의 열쇠를 주님께 넘겨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인되시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복하고 바른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기도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알 때, 그리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은혜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말에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한계가 있고, 그 지식으로 헤아리는 사랑에도 역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식은 선악과를 따먹은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그 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부족함 없이 살던 아담과 하와에게 단 한 가지만을 제한하셨습니다. 그것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세기 2:17)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맙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벌거벗은 수치를 알게 되었고, 죄악으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뱀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했고, 그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본 아담과 하와의 눈에도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 지혜롭게 되기는커녕 범죄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지식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식은 선악과를 따먹는 지식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조차 알지 못하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을 따르는 지식입니다.
 
그런 지식을 갖고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사랑은 때로 상처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제한된 지식으로 우리는 상대방에게 필요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내 입장에서 내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사랑을 베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사랑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제가 자주 생각해 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빵집에 한 청년이 매일아침 찾아와서 식빵을 하나씩 사가지고 갔습니다. 그 청년은 건강이 안 좋은지 얼굴이 늘 창백했고 가난해서인지 항상 속에 아무 것도 들지 않는 값싼 식빵만 사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빵가게의 여주인은 매일 값싼 식빵만 사가는 그 청년이 불쌍해보였습니다. 영양가 없는 값싼 빵만 먹기 때문에 그렇게 허약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측은한 마음에 아무도 모르게 식빵에다가 버터를 듬뿍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넣지 않는 식빵인 양 싼 값에 그 식빵을 청년에게 팔았습니니다. 그리고 빵집 여주인은 선한 일을 했다고 마음에 뿌듯함을 느겼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청년이 빵가게를 찾아와서는 불같이 화를 내다가 낙심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사연을 들어본 즉, 그 청년은 설계사로 도시 설계전에 응모하기 위해서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간 식빵은 설계도를 그리다가 잘못 그린 것을 지우는 지우개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그날 식빵 안에 버터가 들어있는 줄 몰랐던 그 청년은 잘못 그린 설계도를 지우려다가 식빵 안에 들어 있는 버터 때문에 설계도를 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빵집 여주인은 청년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을 베풀고 싶은 순수한 마음으로 식빵에 버터를 넣어주었는데, 그것이 결국 그 청년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식 안에 있는 사랑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선을 베풀기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는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사랑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 인간의 사랑에는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사랑에 빠진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자신의 욕망이 묻어나 있습니다. 욕망에 끌린 사랑을 하기도 하고,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자신의 욕망이 배제된 사랑은 우리 인간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의 지식의 한계와 욕망이 묻어나는 사랑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에는 그런 제한도 없고 욕망도 없습니다. 그것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말에 담겨진 또 하나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를 가지고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까지 십자가 위에서 다 내놓으신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이나 지혜를 가지고 헤아릴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네 가지 차원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온 세상 사람을 다 품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세상 모든 사람,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에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까지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에게도 사랑을 베푸셨고, 귀신들린 사람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그 분의 사랑은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 가난한 자를 다 포용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이방인들까지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구원을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게 우리 주님의 사랑의 너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반면 인간의 사랑은 변질됩니다. 아무리 죽도록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고 맹세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바뀌고 사랑의 내용과 질도 다 변질됩니다. 결혼식을 할 때에는 목숨을 다해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지만 얼마 못되어 사랑이 미움으로 바꿔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대부분 감정이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는데, 우리 인간의 감정은 수시로 변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 또한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한번 우리를 사랑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우리 주님의 사랑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랑입니다. 감히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크신 사랑입니다. 아무리 황홀한 사랑의 감정에 깊이 젖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닮아가거나 따라갈 수 없는 사랑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고귀한 사랑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사랑하시며, 당신을 배신하고 모욕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신 최고의 사랑이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네 번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고, 죄 때문에 마땅히 지옥에 가야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야할 지옥까지 갖다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신앙고백으로 사도신경을 외우는데, 우리가 외우는 사도신경에 빠진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중에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원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지옥에 내려가신 후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가야할 지옥을 우리 대신 갔다 오신 것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깊숙이 있는 것까지도 다 헤아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마음 아파할 때 나보다 더 마음 아파하시는 분, 내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쓰러질 듯 힘들어할 때 나를 바라보시면서 더 힘겨워하시는 분, 내가 기뻐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때 나를 바라보시면서 행복에 겨운 춤을 추시는 분, 내가 주님을 외면하고 멀리할지라도 두 팔을 벌리고 잠잠히 나를 기다려 주시는 분, 내가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릴지라도 내 등 뒤로 와서 나를 가만히 껴안아 주시는 분, 그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그런 속깊은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 넓고, 길고, 높고, 깊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그 사랑에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주님의 넓고 길고 높고 깊은 사랑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우리 안에 충만해진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한 마디로 한다면 ‘한 없이 크신 주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빈궁한 삶 가운데서도 풍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 가운데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찬송가 304장) 그 찬송은 1917년 레만(F. M .Lehman, 1868-1953)이라는 목사님이 만들었습니다. 독일 출신의 레만 목사님은 4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11살 때 예수를 믿었습니다. 노스웨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그는 주로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시골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보니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공장이나 병원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 찬송을 지을 당시 레만 목사님은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치즈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만 목사님의 부인이 점심 도시락에 시를 하나 써서 넣어주었습니다. 그 시는 11세기에 한 랍비가 쓴 하다무트(Hadamut)라는 히브리 시였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말로 다 할 수 없도다. 하늘 전체를 양피지로 삼고, 땅위의 모든 초목을 꺽어 펜을 삼아, 온 세상의 물을 다 잉크로 하여, 온 인류가 필기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쓸 수 없도다.’ 이 시를 읽는 순간 감동이 밀려왔고, 영감을 받아 찬송시를 섰습니다.
  
레만 목사님은 1948년에 쓴 『‘하나님의 사랑’의 뒷이야기』(History of the Song, The Love of God)라는 책에서 그 찬송시를 만든 뒷이야기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1917년 어느 날, 나는 일하다가 잠깐의 짬을 내어 아내가 준 도시락을 쌌던 신문을 펼쳐 들었다. 거기 가가 막히게 좋은 히브리 시가 있었다. 나는 레몬상자에 걸터앉아 벽에 기대어, 몽당연필로 첫째 연과 둘째 연과 후렴을 작사하고, 셋째 연은 히브리 시를 운을 맞춰 고쳤다, 그것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이다.” 
  
그리고 이 찬송이 세계적으로 알려져 우리가 감동적으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1974년부터였습니다.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북음화 국제대회 이튿날 저녁 예배 때에 한 맹인 여가수가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녀는 우리나라 6.25전쟁 때 두 눈을 잃은 전쟁 고아로, 미국에 입양되어 각고의 노력 끝에 음악수업을 마치고 가수로 활동을 하고 있는 킴 윅스(Kim Wicks)라는 가수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전도자인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다니면서 부흥회 때마다 찬양을 불러 많은 사람을 감동시킨 여인입니다. 그 때 그녀가 부른 그 찬양이 그곳에 모인 4000여명의 각국 교회 대표들에게 감동을 주어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독일에서 이민을 와서 어렵게 공부를 하여 목사가 되었는데, 시골교회에서 생계도 꾸려갈 수 없을 정도로 사례비도 못 받고 치즈 공장에서 일하면서 생계비를 마련해야 했던 레만 목사님은 시 한 편을 통해서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만큼 채워져 있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메마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슴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메말라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고 경험하여,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가득하게 하소서.’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사랑을 갈구합니다. 더 크신 사랑을 베풀어 주시길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는 자만이 그 풍성하신 사랑 안에 거하며, 그 풍성하신 사랑에 감동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며 살았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7)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힘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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