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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진리와 사귀는 자입니다 (요이 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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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리와 사귀는 자입니다 (요이 1:10-13)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하나님의 평화가 이 땅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지도자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선한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얼마 전,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목은 ‘북한이 우리나라를 못 쳐들어오는 이유?’였습니다. 북한이 우리나라를 못 쳐들어오는 이유라는 것이 첫째로, 거리마다 총알택시가 많이 있어서. 둘째로, 골목마다 대포집이 많이 있어서. 셋째로, 간판마다 부대찌게가 많이 있어서. 넷째로, 집집마다 핵 보유한 핵가족이어서. 다섯째로, 밤마다 폭탄주가 터져서 랍니다.

처음에는 저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찜찜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우리들이 이렇게 태평하게 지내도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면이라도 사재기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국민들이 전쟁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많이 단련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래 전,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올 때부터, 그리고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이후부터 우리는 이미 전쟁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단련되었거나 서서히 무뎌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걱정이 되는 것은 늑대가 나타났다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말에 하도 속아서 정말로 늑대가 나타났을 때도 믿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수고를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지혜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국정의 최고 결정권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실을 사실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고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정말로 전혀 다른 생각에 지배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딤전 4:2)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969년, 달에 로켓을 쏘아 인간이 달에 발을 디딘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지금도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논리를 제시하며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인간이 달에 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사건을 총체적으로 조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는 사실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념에 의하여 규정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특히 성경 해석이 그렇습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가장 비성경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는 숨은 목적에 따라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어떤 인간을 위한 것인가를 두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훌륭하고, 관련 근거가 된다는 성경 구절을 딱딱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한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자신의 논리, 신념의 울타리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것이 요즘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문제입니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9)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 즉 예수님의 말씀에서 지나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교훈 즉,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이 바른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는 사람,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더 가까이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앞서간 사람들에게서 지혜를 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말씀이 해석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과 함께 이성과 전통과 경험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신앙의 기둥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성경대로 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을 곡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소극적인 대응으로 거절하라고 합니다.
  
I. 거절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각’은 아주 조심하여야 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사도 요한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만일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이 교훈과 다른 것을 전하거든 그를 집 안으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공동]입니다. 여기에서 ‘이 교훈’은 그리스도의 교훈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고 거짓된 진리를 자랑하며 선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 단호하게 거절하여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 ‘서로 사랑’을 계명으로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는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미워해도 좋다는 말씀으로 오해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여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잘못된 생각까지 받아주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모든 생각도 용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사랑하지만 그 생각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교회를 향한 말씀에서 이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로마서 16:17 말씀입니다.

(롬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당시에 ‘순회 전도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나 요한처럼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곳저곳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손님을 후하게 접대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같은 유대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더욱이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은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가 나가서 전도하지는 못하지만 전도하는 사람을 대접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교사로 나가지는 못하지만 선교사에게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하기 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순회 전도자를 위한 대접은 당시 교회의 덕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 순회전도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들은 사도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고후 11:4).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율법의 멍에를 지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행 15: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요이 1:7). 온갖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씨만 좋은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까지도 영접하였습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전도자라는 이름에 속아서 그들을 대접하는 경우가 흔하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주의할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이렇게 강력한 어조로 단호하게 거절하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1절 말씀입니다.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다른 교훈을 전하는 사람을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도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은 그들이 하는 악한 일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여하다[koinwnevw/코이노네오]’는 말은 ‘공유하거나 교제를 나누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그것에 함께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2. 이단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착한 마음이 다른 사람의 악한 의도에 이용을 당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착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그것이 교회를 헐고 성도를 분열시키는 일에 이용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잘못된 판단으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과연 ‘나는 잘 몰랐다!’고 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담임목사로써 우리교회의 성도들에게 교회 밖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이것은 우리만이 바른 교회이고 다른 교회는 잘못되었다고 교만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여러분이 어느 한 곳에 치우침이 없는 건강한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교도 하고 판단도 할 수 있는 분별력 있는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에도 건전한 비판과 갱신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다만 저는 여러분이 잘못된 신앙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신앙은 자칫 맹목적일 수 있습니다. 조금만 신기하면 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삼, 사년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어머, 어젯밤 꿈에 봤는데 장소까지 똑같네. 진짜 하나님이 집사님을 사랑하시는가 봐요.”

이런 말을 들으면서 혹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단이라고 부르는 어느 곳에서는 교회에 다니고 있는 성도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아예 거짓말을 하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포교를 위하여 상대방을 속이는 것을 ‘모략’이라고 까지 합니다. 그들의 교육 자료에는 ‘세상은 우리의 연극무대이며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본대로 최면을 걸고 자신감 있게 하라’, ‘카멜레온 앵무새가 되라’, ‘귀신까지도 속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우연을 가장한 37 가지 상황도 연출한답니다. 발각에 대비해 거짓으로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연습까지 시킨답니다. 거짓말을 하게 하는 교육도 상황에 따라 구체적으로 진행하는데, 전도법, 섭외 방법, 섭외 후 관리 방법, 말씀 유도 멘트, 신학원 인도 후 관리 멘트, 입막음 방법 등 28가지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미 이렇게 말합니다. 디도서 3:10입니다.

(딛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단을 피하고, 멀리하는 하는 것은 적극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구원하여야 할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섣부르게 상대할 수 없습니다. 착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속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속으면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반드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전문가를 지원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거짓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그리스도라는 신앙에서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런 신앙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하여 단호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옆에 앉은 사람이 ‘그 이단’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고 꼼꼼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도들이 서로 의심하게 하는 것은 또 하나 그들의 전략입니다. 그들은 헛소문을 퍼뜨려 교회를 이간질시킵니다. 그것은 성도에게 사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탄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사귐을 깨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II. 사귐
  
사귐은 이단들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사귐은 교회의 본래적인 모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이라는 강력한 교제를 통하여 이단이라는 세균을 녹여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거절하여야 할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고 더욱 풍성하게 나누어야 할 사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2a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사도 요한은 짧은 편지를 마감하면서 그들에게 쓰고 싶은 말이 많이 있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종이와 먹으로 써 보내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사도가 바라는 것은, 그들에게 가서,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대면하다[stovma/스토마]’는 얼굴의 갈라진 틈으로 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글이 아니라 말로, 간접적인 방법 보다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만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는 편지라도, 전화로라도, 문자로라도 소식을 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집적 만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만남을 통한 성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13절에서는 마지막 인사를 나눕니다.

:13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사도가 머물며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 전하는 인사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안하다[ajspavzomai/]’는 말은 본래 ‘팔을 접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경례하다, 포옹하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한 걸음에 달려 갈 수는 없지만 가까이 있으면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성도의 교제입니다. 우리에게는

1. 나누어야 할 성도의 교제가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을 자연스럽게 고칠 수 있는 건강한 교회의 특징입니다. 

광주 이단대책위원장인 강신유목사는 1994년 개척한 교회의 청년회가 신천지 때문에 와해되자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단에 빠진 사람을 상담하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동안 9 년간의 상담 경험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3 박자가 맞아 떨어질 때 신천지에 빠져들게 됩니다. 신천지 피해자들은 대부분 구원의 확신이 없는 교인들입니다. 반면 성경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욕구가 무척 높았어요. 신천지는 이들의 정보를 재빨리 입수했고 아주 교활하게 접근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지만, 성경을 배워보려고 하는 사람은 초신자의 좋은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을 교회가 먼저 사랑으로 품고 말씀으로 양육하여야 합니다. 성도들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교회가 서로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사람과 교제하지 않는 자는 야수이거나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라는 말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사귐과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니 이단의 꼬임에 빠지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이단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성도의 사귐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다시 한 번 속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속회는 다른 교회에서 구역예배 또는 목장, 셀이라고 부르는 소그룹입니다. 우리는 주일 낮에 모이는 대그룹 즉 주일예배를 통하여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듣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상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그룹만으로는 결코 성도의 교제와 돌봄과 세움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을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는 소그룹 즉 속회가 필요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배우는 것은 대그룹에서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소그룹에서입니다. 

물론 현재와 같은 관리 속회에서는 이런 사명을 다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회복하고 서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통로는 속회 외에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남녀청장년 선교회 모임이 있을 수 있으나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나눔과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돌봄과 세움을 경험하는 곳은 속회뿐입니다. 먼저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속회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변화하는 속회에 참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사도가 그토록 서로 만나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1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2b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가 그토록 서로 만나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였던 이유는 기쁨을 넘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가 그들을 찾아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였던 이유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하게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2.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기쁨이라니 좀 세상적인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는 기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만드실 때 자주 사용하셨던 말씀은 ‘보시기에 좋았더라.’였습니다. 빛을 만드시고도(창 1:4), 땅을 만드시고도(창 1:10), 식물을 만드시고도(창 1:12), 낮과 밤을 만드시고도(창 1:18), 어류와 조류를 만드시고도(창 1:21), 땅의 동물을 만드시고도(창 1:25)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a)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복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뻐하셨던 하나님은 그 지으신 사람들이 또한 기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신 10:13).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가 기쁘기를, 행복하기를 원하고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요 15:11).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웃으면 나쁜 세균이 죽은 것처럼, 교회가 기쁨을 회복하면 이단이라는 세균을 녹여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시장에서 싸게 파는 가방의 짝퉁을 보셨습니까? 싸구려의 짝퉁을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짝퉁이 있다는 것은 고급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단이 많을수록 정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단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심하여야 합니다. 자칫 영혼의 기쁨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욱 행복한 성도 건강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단에 참여하지 않는 단호함뿐만 아니라,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는 친밀함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단에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성도의 교제와 사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의 예배와 성도의 교제가 살아있는 건강한 교회의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리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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