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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 (신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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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 (신 12:1-7)
 
주일 아침, 한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허둥지둥 예배에 들어갔습니다. 자리를 잡았을 때는 이미 예배가 시작된 지 오 분 이상 지난 후였습니다. 그날도 주일예배는 지난주와 다름없이 정해진 순서를 따라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주보에 적힌 별 모양의 표시를 따라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예배순서를 따라갔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표기도에 이어 성경봉독을 하고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서론도 채 끝나기 전에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눈꺼풀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졸음을 쫓기 위해 가끔 고개를 흔들어보고 허벅지를 꼬집고 떨어트린 성경책을 다시 주워보지만 졸음의 위력은 너무도 컸습니다. 

부부는 설교 드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고개를 숙이고 깊은 묵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부모가 다 고개를 꾸벅이고 있는 사이 아이는 주보로 비행기를 접어보기도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습니다. 너무 지루해진 아이는 졸고 있는 엄마의 옆구리를 고사리 손으로 툭 쳐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근엄한 톤으로 말하고 있는 아저씨(목사님)의 연설은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몸을 비틀고 요동을 치다 인내가 한계점에 달한 이 아이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저 아저씨한테 빨리 요금 주고 집에 가자!”(이재기, 회복의 은혜, 132-133)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시 이 아이의 부모에게 볼 수 있었던 모습은 아닙니까? 혹시 우리 아이들이 우리가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는 “엄마 저 아저씨한테 빨리 요금 주고 집에 가자!”라고 말하지는 않을까요?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와 예배의 자리를 지킨다고 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가 분명 예배의 자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⑴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4절 말씀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이 말씀에서 ‘그처럼’ 이라고 할 때 ‘그’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가나안 사람들 -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위해서 쫓아내야 할 가나안 지역에 살고 있는 이방민족들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들처럼 행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들이 무슨 일을 했기에 그들처럼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2절과 3절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2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 둘째, 이들이 믿는 신은 사람의 손에 의해서 조각된 것, 셋째, 우상을 섬기는 장소를 자기들 편의대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우상을 만들고,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곳을 택해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무슨 뜻입니까? 가나안의 이방민족들이, 우상을 섬기는 방식대로 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우상 숭배가 뭐냐 하면, “내”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이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렇기에 불교를 믿어야만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어떠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연말연시에 새해의 운세를 점치기 위해 이곳저곳 다녀야만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굿을 해야만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가 중심이 되면 우상숭배자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사고의 틀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면, 그 사람 역시 우상숭배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배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 되기는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누구를 위하여 지었습니까? 하나님. 무엇 때문에요?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말씀드리면 성도들 중에는“‘예배 성공, 인생 승리’라는 제가 늘 주장하는 말씀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라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 예배성공 인생승리 이 말씀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 성공, 인생 승리”라는 표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진리입니다. 첫째, 예배에 성공하자는 것은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온전히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진리입니다. 

둘째, 예배 성공을 통한 인생의 승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진리입니다.‘인생승리’라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명예를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유명인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드라마를 아시죠? 예전에 한창 인기몰이를 했던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금순이’ 역할을 한 연예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혜진. 한혜진 씨는 독실한 크리스챤입니다. 그녀의 미니홈피를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크리스챤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한혜진 씨는 ‘굳세어라 금순아’ 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일류스타가 되었는데, 사실 이 드라마가 처음 방영되었을 때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도 받았습니다. ‘금순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고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도 과하다’는 등 많은 비난이 쏟아졌었습니다. 

아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본래 ‘금순이’ 역할은 한혜진 씨가 맡게 될 역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연예인이 맡아야 했었는데, 섭외가 순조롭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한혜진 씨가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 얼마나 실망스러웠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도 9개월간의 장정을 잘 소화해낼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났는지 아십니까?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미 많이 지친 상태에서 상상도 못할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시간을 내어 주일 청년부 모임(예배)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일주일을 살아갈 위로와 여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에 가서 이렇게 글을 맺습니다. “다음 작품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요즘, 가끔은 나의 생각이 앞서 염려가 밀려올 때도 있다. 그러나 나의 앞길에 무엇이 펼쳐지든 나는 그저 기대하고 기뻐하고 감사리라 열심히 다짐해 본다. 늘 내 곁에서 ‘굳세어라 혜진아’하고 외쳐 주시는 그분이 계시기에.”(가이드 포스트, 2006년 1월호, 40-41) 

성도 여러분, 한혜진 씨에게 진정한 승리는 무엇입니까? 인기 있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유명인이 된 것입니까? 힘들게 살던 그녀의 가정이 한혜진 씨 덕분에 집을 사게 되었는데, 그것인 진정한 승리입니까? 물론, 이런 것들도 인생 승리의 한 부분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고백대로 “‘굳세어라 혜진아’ 하고 외쳐 주시는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된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한혜진 씨 역시“하나님을 더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바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할 때,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 될 때, 그런 예배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이자, 우리를 축복해주실 밖에 없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예배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⑵ 하나님께서는 드림이 있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6절 말씀입니다. “6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성도 여러분, 예배에는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만 드려서는 안 됩니다. 마음도 드려야 하겠지만, 그 마음을 담아 예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번제, 희생, 십일조, 거제, 서원제, 낙헌 예물,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드릴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배는 드림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은혜도 받아야 하겠지만, 먼저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드림이 아니라 지불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려고 하면 물건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값을 지불해야만 물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해서 드린다면, 은혜는 우리가 거기에 합당한 값을 지불해서 얻는 것이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린 아이의 말이 생각나십니까? “엄마 저 아저씨한테 빨리 요금 주고 집에 가자!” 비록 풍자한 이야기이지만,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일까요? 왜 이 아이는 헌금을 요금이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무엇인가를 받았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요금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헌금은 요금이 아닙니다. 헌금을 드려야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입장료가 아닙니다. 헌금 많이 드리면 이 앞자리에 서 있고, 헌금 적게 드리면 저 뒷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헌금이 드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무엇보다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헌금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헌금을 많이 드리면 좋은 자리에 앉고, 적게 드리면 나쁜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입니다. 

마가복음 12장 41절 이하에 보면, 어느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습니다. 두 렙돈이 얼마 정도 되냐면, 노동자의 일당을 60,000원이라고 할 때, 한 렙돈이 500원도 채 안 되는 돈이니까, 두 렙돈이라 해도 1000원도 안 되는 아주 적은 돈입니다. 그런데 이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가리켜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십니다. 

여러분, 정말 그곳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 과부보다 많이 드린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는 부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체면치레 정도로만 드려도 이 과부보다 훨씬 많이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이 가장 많이 드렸다고 하는 것은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와는 정반대의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사건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의 값이 얼마짜리였습니까? 300데나리온.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할 때, 적어도 1500만에서 2000만원에 달하는 고가의 향유였음을 뜻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 여인도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다는 것 때문에 칭찬을 받게 되는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칭찬한 이유가 고가의 향유를 부었기 때문입니까?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이 여인은 몸을 팔던 여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가지고 있던 고가의 향유는 몸을 팔아서 구입한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여인이 자신의 몸을 팔아 구입한 향유를 여러분의 몸에 붓는다면,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좋아하겠습니까? 더욱이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인 통념으로 볼 때, 아무리 고가의 향유라 할지라도 부정한 방법에 의해서 벌어들인 것을 가지고 이런 일에 사용한다면 좋아했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행동을 칭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마음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를 기쁜 마음으로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성도 여러분, 헌금은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는 둘 중에 한 여인만을 칭찬했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발아래 향유를 부은 여인을 칭찬했어야 했습니다. 

지금 제가 ‘헌금은 마음의 문제, 믿음의 문제’라고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헌금을 적게 드려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헌금이 마음의 문제, 믿음의 문제’라는 말은 때로 헌금이 부담이 되더라도 드릴 수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보세요. 그녀에게 있어서 두 렙돈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였기 때문에, 두 렙돈을 드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부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향유의 부인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도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드린다는 것은 분명 부담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드렸다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드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헌금 생활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 - 분명 경제적으로는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담이 될 정도로 헌금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할 때, 돈에 의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돈 때문에 시험 들지 마세요. 돈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습니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돈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재물도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시지 않으면 있다가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정성껏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면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7절 말씀입니다.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찌니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에 복을 주시고,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축복해주시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속에는 언제나 불평이 감사로, 슬픔이 기쁨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부족함이 풍부함으로, 답답한 일이 속 시원한 일로, 눈물이 웃음으로, 고통이 능력으로 변화되는 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을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숨어계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뭔가 뚜렷한 대책이 없을 때,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저버리고 어디론가 숨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숨어있는 듯한 하나님도 예배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미 테니(Tommy Tenney)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을 발견하는 관건은 우리의 예배이다.”(토미 테니, 갓 캐처스, 49)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위력이자, 이것이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 중의 특권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예배의 특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맥체인(R.M. McChenyne)은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분으로, 어느 날 헌신자들과 함께 선교 여행 중 사막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맥체인 목사님을 비롯한 일행들이 이집트의 발틴이라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물이 떨어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그날이 주일이었는데, 그들을 안내하던 아랍인이 날씨가 용광로처럼 뜨겁고 먹을 양식도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여행하기를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맥체인 목사는 분노하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주일의 안식은 이 같은 광야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사람이 없다면 우리라도 이 적막한 땅을 이 주일에 찬양의 노래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 아니냐? 이 주일에 좋으신 하나님을 즐거워할 나의 특권을 빼앗지 말라.”(이재기, 회복의 은혜, 146-147)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질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물질 때문에 어려우십니까? 바쁘고 힘든 일상 때문에 마음 편안한 날이 없습니까? 가족들 간의 남모르는 갈등으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십니까? 그렇다면, 분명 여러분은 광야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광야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예배만은 빼앗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우리가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면서도 꼭 지켜야 할 축복의 자리요, 위로의 자리요, 회복의 자리요, 능력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통해서 삶의 즐거움을, 기쁨을, 능력을, 위로를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입니다. 우리의 편의대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예배는 모두 우상숭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드림이 있는 예배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하겠지만, 은혜 받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없는 많은 예물보다, 마음이 담긴 최선의 예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입니다. 드림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즐겁게 하십니다. 기쁘게 하십니다. 예배의 특권을 빼앗기지 말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013년 모든 예배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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