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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시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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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유가(儒家)에서는 인간의 행복을 다섯 가지로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오복(五福)이라 하였는데 첫째는<수(壽)>라고 하였습니다. 즉 오래오래 죽지 않고 천수(天壽)를 다함이 복이라 하였습니다. 둘째는<부(富)>라고 하였습니다. 즉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또한 남을 괴롭히지도 않으며,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복이라 했습니다. 셋째는<강령(康寧)>이라고 했는데 강(康)은 육체적 건강을 말하고, 령(寧)은 마음의 건강을 말하는 것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하여 편안하게 사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유호덕(攸好德)>이라고 합니다. 즉 덕을 좋아하는 일상적 태도로서 남에게 늘 주는 연습을 하고 남을 도우려 애쓰는 가운데 선행으로 덕을 쌓는 것이 복이요, 다섯째는<고종명(考終命)>이라 하여 일생을 깨끗하고 건강하고 덕을 좋아하며 주변에 많이 베풀고 적당하게 오래 살다가 마지막 죽음에 임해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 살기를 바라던 소망은 지금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2002년 생명표 작성 결과>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은 73.4세, 여성80.4세로 전체적 평균으로는 77세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20년에는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81세로 늘어날 전망이라고 하니 참 좋은 세상에 사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만약에 인간의 행복을 생명의 길이로만 잰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의 권역에 도달해 있는 셈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을 어떻게 생명의 길이로만 잴 것입니까? 오래 산다는 것이 행복의 으뜸 조건일 것은 틀림없지만 오래 살되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그 밖의 조건들도 고루 갖출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바뀌어야합니다. 오래 살되 인간답게 살아야합니다. 오래 살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수명은 길어지지만 그 삶의 질이 후패(朽敗)해져 간다면 이것은 결코 행복의 삶이 아닙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육신은 강건해져 가는데 영혼이 피폐해져 간다면 더 이상 삶의 가치란 찾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고로 무엇보다도 인간 본래의 존재를 아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생명연장의 시대니, 생명가치의 시대니 합니다만 정말 모든 것이 편안하고 생명연장의 꿈에 들떠 있는 이 시대일수록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혼이야말로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그 옛날 고린도교회를 향해 편지하며 강한 의지로 말했듯이 영혼의 문제를 직시해야합니다. 고후4:16에서 바울이 말합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속사람, 즉 영혼이 문제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이 오래 사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여기고 그것을 위해 전력투구하느라고 잃어가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영혼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심도 있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히려 모든 것이 풍성하다 하고 무엇이든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야말로 정말 하나님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는 생각해야합니다. 무엇이 먼저인지를 생각해야만합니다. 어떤 것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해야만합니다. 가장 질 높은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삶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가장 질 낮은 삶을 사는 사람은 그 삶의 기준을 인간에게로 두는 사람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써서 온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진[스티븐 코비]박사가 친구들과 함께 쓴 책 중에<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부제를 붙인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이 말하고 있는 핵심 부분에 보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만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만이라는 것은 우리 감성의 기생충과 같아서 마음에 있는 기쁨과 행복을 다 뺏어 가버린다고 합니다. 결국 이 기생충과 같은 자기 교만이 나를 망친다고 합니다.

보세요, 우리가 사는데 있어서 경제적인 문제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먹어야 살고, 입어야 삽니다. 그러나 경제적 수입이라고 하는 것을 놓고 볼 때 여러분은 얼마가 있어야한다고 기준합니까?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의 양식, 필요한 만큼의 경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내가 얼마나 필요한가? 내게 얼마나 요긴한가?’라고 하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의 수입과 비교하는 데서부터 불행해지는 것입니다.‘저 사람이 저 정도의 수입이라면 나는 이 정도는 돼야지’하는 생각입니다. 내 자동차와 남의 자동차 비교할 거 없습니다. 내 집과 남의 집 비교할 것 없습니다. 내 수입과 남의 수입 차이 따질 것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하다 보니까 정신없이 더...더...하다가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 받으려는 마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생각이 앞서서 인생을 망칩니다. 그 칭찬과 인정의 대상이 사람입니다. 반드시 인정을 받아내야만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내가 사랑하면 그것으로 행복입니다. 사랑해서 주었으면 그것으로 내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인정받고 싶어 하고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부터 불행이 시작 되는 것이거든요.

또 배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배워서, 즐기고 또 효율적으로 살 것인가 생각하질 않고 무조건 최고 점수만 목적으로 합니다. 일단은 최고의 자리에 있어야 맘 편하고 또 그것을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성공은 결과가 아니고 느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서 성공도 되고 실패도 되고 행복도 되고 불행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자기교만이 충족되어야 성공이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자기교만이 모든 병의 근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자만은 하나님이 주신 원초적 소중한 감정의 기생충입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아주 병의 기본요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이 아무리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다 가질 수 있다고 자만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영혼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무엇이 되었다, 무엇을 가졌다 해도 영혼이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살 것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만심이 나의 영혼을 죽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 살아가려는 불신앙 속에 날마다날마다 우리의 영혼은 병들어가고, 이미 하나님을 멀리 떠나버린 우리의 영혼은 소생할 기미를 차츰 잃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버둥거리다가 소망 없는 삶을 마치게 된다면 얼마나 불행하고 불쌍한 존재일 것입니까?<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그 분을 믿고 바라보기만하면 일어설 수 있는데 그것을 못해서 죽어가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성경에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가 있습니다만 양처럼 한 눈을 잘 팔고, 잘 넘어지는 동물도 없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살찐 양이나, 새끼를 밴 암양은 가장 넘어지기가 쉽다고 합니다.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져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는 경우, 제힘으로 다시 일어서기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나자빠진 양은 발로 허공을 치면서,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몸부림쳐 보지만, 그럴수록 사정은 더욱 악화된다고 합니다. 양이 누워서 버둥거리고 있는 동안 위에 가스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 가스가 확산되면 혈액순환을 방해하고 사지를 마비시키게 됩니다. 무더운 여름 날씨의 경우 넘어진 양은 이렇게 서너 시간 지나면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넘어진 채로 매, 독수리, 들개, 늑대에게 잡아먹히기가 가장 쉽다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눈에도 뜨지 않는 곳에서 홀로 넘어져 발버둥치는 양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양들의 수를 세어 봅니다. 그리고 없어진 양을 발견하게 되면, 지체 없이 찾아 나섭니다. 여러 시간을 찾아 헤매다가 멀리서 넘어져 발버둥치고 있는 양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갑니다. 1분 1초가 양의 목숨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넘어진 양을 일으켜 세우고, 다리를 문질러 혈액순환을 회복시켜 주면 양은 다시 일어나 정확하게 걷습니다. 이럴 때 마침내 넘어진 양은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양떼 가운데로 다시 뛰어가 그때부터는 두 번째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죽었던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살려준 그 목자의 이름으로 사는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떠났다가 홀로 들에 넘어져 발버둥치는 양과 같은 경험을 곧 잘합니다. 때론 무지해서 넘어지기도 하고, 때론 교만해서 자빠지기도 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경각심을 줍니다만 그래도 넘어집니다. 좀 더 편하게 살아보려다가 넘어집니다. 좀 더 안일하고 쉽게 믿으려고 하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나를 위해 믿으려다가 자빠지기도 합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희생한다던가, 인내한다던가 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원하는 길과, 눈에 보는 대로 좇아 행합니다. 그러다가 몸이 무거워지는 줄도 모릅니다. 영적인 감각은 둔해지고 불신앙이 비만처럼 찾아와버립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비대한 양일수록 더 잘 넘어지는 것과 같이 걸핏하면 넘어집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사업이 잘되고, 형통할 때, 위험한 안정감과 자신감을 갖게 되고, 그리고 그러한 때가 가장 쓰러지기 쉬운 때인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소생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 불행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내가 바라보고 살고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위해 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라고 하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하나님은 우리들이 단지 이 세상에서 고통과 악을 견디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열심과 사모함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단순한 영적인 회복 이상의 신령하고 위대한 역사가 필요합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우리들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소생한 그 위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괄목할 만한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 원동력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께만 있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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