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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호 하시는 하나님 (시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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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중에 인간이 가장 우울해 지는 계절은 언제일까요? 가을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인생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내 인생도 언젠가는 끝나겠구나.’생각하면서 죽음을 떠올리게 되고 왠지 모를 우울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렇게 볼 때 감정이라는 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아픔이기도 한 양면성을 가졌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그 생각이 죽음이라는데 까지 이르게 되면 또 하나의 감정이 밀려옵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 가운데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를 보면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는 상실의 두려움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시간, 재능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리고 가능성도 꿈도 모두 빼앗아 가버립니다.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사람 하나를 잃는 순간이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상실의 순간입니다. 그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둘째로는 고통의 두려움입니다. 죽음에 대한 고통은 단순한 질병에 대한 고통과는 다릅니다. 수술을 받은 환자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상처가 아물면 완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고통이기 때문에 아픔을 훨씬 덜 느끼는 고통이지만 죽음에 대한 고통은 완화가 없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는 고통입니다. 즐거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고,‘왜 이런 고통 속에 삶을 지속해야 하는가?’라는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카톨릭 사제인[레오날드 두비(Leonard Bubi)]에게 어느 기자가“신부님도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이 분이 흥미 있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나는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I don't fear death, I fear dying.)”공감 가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들도 구원 받은 성도들이라고는 합니다만 죽음 앞에 누구도 자유하지 못하며 초연하지 못합니다.“나의 죽는 모습은 어떨까? 정말 잘 살다가 잘 죽어야 할 텐데...어떻게 죽든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히 하나님께로 가야 할 텐데...”하는 것이 우리들의 고민이지 않습니까? 죽음이라는 것이 고통이요, 두려움이거든요. 이 말은 죽음 자체가 두렵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에 겪는 고통이 두렵단 말입니다.

세 번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고독입니다. 홀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길에 가장 고독을 느껴야 할 시간이 죽음의 순간입니다. 아무도 이 길을 함께 갈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도 자식을 아무리 아끼는 부모님도 이 길을 나를 대신하여 걸을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숨이 멎는 순간 우리 각자의 영혼은 천사의 인도로 각각의 길을 걸어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죽음의 골짜기만은 아무도 동행자가 없다는 사실, 이 뼈저린 외로움이 죽음을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이 상실의 두려움과 고통의 두려움과 고독의 두려움에 몸부림치며 죽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죽음에서 예외일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죽음을 향해 달음질 해 간다는 말처럼 이미 정해진 순리요, 거부할 수 없는 이치입니다. 날마다의 삶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짜기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면 그 상황을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매일 매일의 삶을 두려움 속에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 앉아 있을 수는 더 더욱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두려움 앞에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다윗이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의 인생을 말하기를“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행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앓을 이유가 있답니다. 어떻게 이 골짜기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 해답이 오늘 본문에 증언되어 있습니다.“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오늘 다윗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해 받음을 두려워 아니한다는 고백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결코 하나님을 믿는 우리 인생의 골짜기에는 해가 없다는 뜻도 아니고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해도 있을 수 있고, 두려움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절대적인 믿음 안에서 너끈히 이길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배경을 봅니다. 목자들이 양들에게 풀을 뜯어 먹일 때 한 곳에서 오래도록 머무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뜯어 먹어버린 그곳에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풀이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곳을 떠나 이제 다른 목초지로 옮겨가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동하는 경로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때로는 높은 꼭대기로 올라가서라도 양들을 먹이지 않으면 안 되고 험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도 있는데 수많은 양떼를 이끌고 특히 그 약한 짐승인 양들을 데리고 그 험한 산을 넘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끔씩은 지름길을 택하여 질러가기도합니다. 양쪽에 높이 솟은 벼랑에서는 언제 흙더미가 쏟아질지도 모르고 또 그 어두운 계곡에는 맹수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는 자기의 양떼를 풍요로운 목초지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부득이 그 골짜기를 지나가야만 합니다. 이 골짜기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 있고 새가 날아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운치가 있어서 누구든지 쉬어가고 싶은 그런 그림 같은 골짜기가 아닙니다. 위험하고 무섭고 어두우며 빨리 벗어나고만 싶은 그런 곳입니다. 풀 한포기 없고 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음침한 협곡의 그 좁은 길, 지저귀는 새 소리 대신 음산하게 울어대는 까마귀의 울음만 가득한 골짜기를 지나야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공중에는 독수리가 죽은 짐승의 시체를 찾아 선회하고 땅에는 아무도 지나는 사람이 없어 정적이 감도는 그런 계곡을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에 목자가 없다면 양들은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한시라도 마음 놓을 수 없고 한 걸음도 내 디딜 수 없는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런 곳을 한두 번 지나는 것이 아닙니다. 늘 통과해야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목초지를 만나게 됩니다. 만약 이것이 두려워 가기를 꺼려한다면 영양가 있는 목초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심각한 것은 양이라는 동물은 기껏해야 10m정도밖에 볼 수 없는 근시안을 가진 동물입니다. 그런가하면 후각이 발달하여 냄새를 맡아서 자기의 길을 아느냐 하면 그것도 못합니다. 보통 모든 동물들은 생존본능에 의해서 후각이 잘 발달 되어 있는 동물이 있는가하면 또 다른 감각들이 발달 되어 있지만 양은 후각도, 시각도 발달 되지 못한 동물입니다. 이런 양떼를 목자가 이끌고 가지 않고 제 혼자 걷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힘센 짐승에게 잡아먹히기도 하며, 낙오되기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나온 인생의 날들을 한 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고난과 위기의 시대를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까? 또한 지금도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생이란 늘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계곡을 지나면서 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시90:10)오늘 다윗이“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날지라도”라고 말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도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이 곧 형통한 길로 걸어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보증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란 장차 나타날 영광스러운 유업들을 소망하며 그 소망 때문에 고난도 가치 있게 여겨서 견디고, 시련도 의미 있게 이기며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찾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짜기를 지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부족했기 때문만도 아니고, 우리의 죄악 때문만도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의 범죄와 상관없이 이러한 골짜기에 접어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또한 극적으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초장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은혜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의 부족함 없는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더욱더 분명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이유입니다. 인격적으로 납득하고 따르기로 작정하여 당신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데 두시고 거기를 지나게 하심으로 우리를 망하게 하시고자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목자는 물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어디에 풀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 인도합니다. 이 골짜기를 지나면 분명히 목자가 알고 있는 물과 풀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각, 후각 모두가 좁은 양은 두려워서 주춤거립니다. 목자를 믿고 따라만 가면 될 것임에도 어려워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앞을 내다보는 눈이 없습니다. 근시안입니다. 시야가 트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감각도 예민하지 못해서 둔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눈에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내게 필요한 물은 이 곳을 지나야만 주십니다. 내 감각에 아직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이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만 살진 꼴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인생이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지팡이와 막대기로 둘러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둘 다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유사합니다만 용도는 확연히 다릅니다.<지팡이>는 길고 끝에는 둥글게 휘어져서 양의 목을 감기에 편리해서 곁길로 가는 양들을 다시금 대열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기 위하여 사용된 도구라면<막대기>는 끝이 뾰족한 흉기였습니다. 이것은 양떼들을 해치기 위해 다가오는 맹수들을 무찌르는 도구였습니다. 그것으로 양들을 지키는 목자처럼 하나님께서 한 손에는 나를 보호하는 무기인 막대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나를 인도하는 지팡이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 분의 음성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목적지보다 더 좋은 곳을 알고 계십니다. 내 인생에 실패가 있는 것은 내 눈앞에 흐르는 물이 없고, 내 눈 앞에 꼴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딘 우리의 시각에서, 후각에서, 감각에서 목자이신 하나님을 사라지게 해버렸다는 것이 내 실패요, 위험입니다. 아무리 푸른 초장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을 내 눈 앞에서 잃어 버렸다면 인생은 절망입니다. 오늘 다윗의 고백을 노래하시기 바랍니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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