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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용(4) - 내 뜻을 극복한 진정한 승리 (막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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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무더운 불볕더위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날씨도 우리 마음대로 안되는 것처럼 우리 삶의 여러 가지 일들은 우리 마음에 맞게 움직여주는 것도 있지만 우리 마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대로 움직여 가는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행복이라는 것은 내 마음의 원하는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만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을 줄 수 있는 다른 요소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에서 오는 영적인 안온감, 이와 같은 삶의 여러 요소들로 인해서 우리는 큰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평안과 그로인한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내가 수용할 수 있음에서 시작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룸으로 이루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내가 받아들여 수용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드리는 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임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마음의 간절함으로 소원하기를 나는 이 잔을 피하기를 원하오니 하나님께서 이 잔을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지만 결국 그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을 이루기를 원하고 그 뜻을 이루기를 원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진정한 내 뜻의 극복을 통한 승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결국 믿음의 인물이란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한 사람들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한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합당한 인격과 품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는 최소한의 믿음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 본토 친척의 집을 떠나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곳, 가나안을 지정해주시고 가라고 하셨을 때 이 아브라함은 모든 불확실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출발했다는 것은 분명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의 아닌지라 그는 가는 곳곳에서 여러 가지 실수를 하기도 하고 조급함 속에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아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욱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려 다섯 번이나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무려 다섯 번이나 나타나셔서 “내가 너를 창대케 하리라” 는 약속을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칠십 오세에 아이가 없었고 그리고 그 마음에 이르기를 스스로 자녀를 낳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낳게 하시고 그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약속을 무려 다섯 번이나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확인시켜주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한번 마음 먹고 꿋꿋하게 그의 길을 간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길에 대하여서 확신시켜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잘 가고 있는데 나타나셔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다가 흔들리고 또 가다가 흔드리니,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의 길을 확인시켜주신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이와같이 많은 흔들림과 여러 가지 회의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지 못하지만 가난, 고초, 환란을 겪어가면서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게 됩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은 ‘내 나이 백세요, 아내 나이 구십세, 거기다 경수까지 끊겼는데 사라가 어찌 잉태하여 자녀를 낳을까’ 하고, 사라도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비웃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웃는 그들조차도 인내하시며 마침내 그들에게 하나님의 꿈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와같은 모든 과정을 겪어가며 자신의 한계를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던 이들은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의 단계까지 오게됨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했습니다. 창세기 22장 7절 이하를 보게되면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을 그 눈 앞에 가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삭이 소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가 번제제물로 바쳐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삭을 모리아산의 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이십오만에 이루어진 꿈, 그 이후의 십수년간 지내왔던 많은 세월들 속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과 기대로 살아왔던 아브라함의 꿈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때 이미 믿음의 인물로 우뚝 서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원하건 원치않건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여 이루어드리는 것임을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갑니다. 모리아산에 번제물로 이삭을 드리라는 말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수용한 것입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다.“ 그런데 번제단을 쌓고 나무에 불을 붙이기 전에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볼 때 이삭이 깨닫습니다. ’아,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는 번제물은 바로 나구나.‘ 이삭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내가 네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나를 믿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

고 얘기하시면서 그 순간 아브라함은 믿음의 인물로 우뚝 서게되는 장면이 있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 아브라함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수용했던 것입니다. 내 뜻을 극복하고 감당할 수 없는 내 마음의 욕구와 여러 생각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한편 이와같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이삭의 수고와 애씀도 있음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아서 번제단의 제물로 드리려고 했을 때 이삭은 소년이었는데 노인된 아브라함을 뿌리치고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달아나지 않았던 것은 이삭도 하나님이 준비한 제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수용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대는 이삭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삭이 돕지 않고 도망쳤으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것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믿음의 족장들,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은 분량도 매우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수용한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야곱이라는 사람을 보면, 그는 생태적으로 후자로 태어났습니다.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쌍둥이 동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야곱을 통해 축복의 계보를 이어갈 것을 선언하셨지만 야곱은 이와같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인간적인 욕심과 궤계와 열정이 넘쳤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세워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위적으로 형을 속이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 은혜의 장자권을 탈취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삭과 자신의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탈취하고 기도까지 받았지만 결국 그것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얻은 것은 고통과 고초뿐이었습니다.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가서 고생을 하고 수없는 세월을 보내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돌아옵니다. 즉 야곱이 자기의 개인적인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은 가야할 길을 빙 둘러서 가게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지 못했을 때 결국 야곱은 이와같은 어려움만 겪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시간이 가며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게 됩니다. 그도 남을 속였듯 남에게 속고 그도 고통을 겪고 아픔을 겪으며 여러 가지 세월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 큰 어려움을 겪고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갑니다. 야곱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야곱은 이제 그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위해서 14년동안이나 고생을 했습니다. 라반의 집에 보니 라헬이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아내로 얻기 위해서 7년동안 무임금으로 노역을 했습니다. 7년동안 노역을 해서 그녀를 얻는 줄 알았더니 라반이 꾀를 써서 언니 레아를 아내로 준 것입니다. 라헬을 얻으려면 7년을 더 일하라고 해서 총 14년을 일했습니다. 야곱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14년 뒤 그 아름다움이 유지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14년동안 고생을 해서 얻은 아내이니 무척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라헬을 통해서 두 명의 아들이 있으니 요셉과 베냐민이었습니다. 열두명의 아들 중에 요셉과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다보니 야곱도 잘못하고 요셉도 잘못했습니다.채색옷을 요셉에게만 입혔습니다. 그리고 요셉도 아이가 어려서인지 경망스러웠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이 나에게 인사를 하고 이런 얘기를 하니 형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안그래도 편애를 받고 있으니 시기가 나는데 거기다 꿈이야기까지 하니 가만히 둘 수가 없었습니다. 죽이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팔려 종으로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와서는 요셉이 동물에게 잡혀서 죽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야곱으로서는 가슴 아팠습니다. 너무도 사랑하는 라헬의 소생 요셉이 죽게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요셉은 애굽으로 가서 종살이하다가 감옥으로 갔다가 총리가 됩니다. 그곳에서 7년의 풍년기간동안 7년의 흉년기간을 대비해서 애굽에는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주변일대의 모든 나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게 되었을 때 애굽에만 곡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까지 곡식을 구하러 그 형제들이 갔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못알아보았고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동생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가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곱은 “왜 동생이 있다고 얘기했느냐? 내가 사랑하는 아들 요셉도 잃었는데 내가 만약 베냐민까지 잃어버리면 나는 살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내어줄 수 없다. 너희는 갈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이들은 굻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야곱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창세기 43장 13절~14절을 보면 “내 아우를 데리고 떠나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베냐민을 돌려주실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뜻이 내가 베냐민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면 내가 베냐민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내가 데리고 있는다고 해서 베냐민이 있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버린다고 베냐민이 버려지는 것도 아니다. 베냐민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겠다.“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우리는 우상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풀무불에 던져져도 괜찮습니다. 분명히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괜찮습니다. 거기서 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변치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야곱도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요셉의 초청을 받아서 애굽에 갔을 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 나이 일백삼십세 내 조상의 나그네 인생길에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하나 참으로 험난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그와 같은 험난한 삶 속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자란다 믿음이 좋아진다는 것은 이제까지 수용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뜻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왜 어려움이 와? 왜 나는 이런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 해? 왜 나 혼자만 이런 일을 겪어야해?’라고 수용할 수 없던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어진 형태와 여건 속에서 내가 해야할 길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을 보면 그도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종살이를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내 인생이 이게 뭐야? 아버지 심부름 왔다가 그냥 들어가면 되는데 잘할려고 멀리까지 형들을 찾아가서 결국 잘할려다가 이렇게 된 거야. 난 잘할려고 한 것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죽을 지경을 당하고 나는 종으로 팔려와서 이렇게 살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인도하셨으니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겠지라고 생각하고 그 가운데 최선을 다해서 그 집의 가정총무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거기서도 보디발의 아내와 더불어서 정말 어려운 모함을 받게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갑니다. 거기서도 또 그는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왜 나는 이런 일만 겪어야 해? 내 인생은 정말 엉망이야 엉망’ 하지 않고 그는 거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할 때 그에게는 간수장이 모든 것을 맡기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 결국 그는 감옥에 있음을 통하여서 바로에게 불려가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서 총리가 되었고 마침내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형제들을 만났을 때 무어라 이야기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45장 5절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다.

45장 8절을 보면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것이라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아서 그 온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다 내가 이리로 온 것은 당신이 팔아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니 두려워말고 근심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 내가 당신들에게 해코지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냈지 당신들이 그와같이 종으로 나를 팔아넘긴 것은 아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게 되면 모두를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게 되면 모두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우리는 겸손하게 되고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것은 진정한 용기입니다. 진정한 겸손입니다. 진정한 이해입니다. 진정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니 우리에게 용기도 생기고 사랑도 생기고 겸손도 생기고 이해함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했습니다. 모세는 40세 혈기방장한 때에 애굽의 왕자로 길러졌지만 그런 성장의 과정에서 히브리민족의 출생비밀을 알고 그는 자신의 히브리민족을 죽인 애굽사람을 쳐서 죽임으로 말미암아 바로의 궁에서 도망칩니다. 살인자로 몰려 죽게될 지경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동안 묵혀있습니다. 40년동안 있다보니 모든 면에서 무기력해집니다. 그는 양치는 것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를 초청하실 때 모세는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모세의 겸손함이 아니라 모세의 진실함입니다. 40년 전의 능력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피아노 치던 사람이 피아노를 40년동안 한번도 안치다가 칠 수 있겠습니까? 40년 전의 능력이지 지금과는 전혀 관계 없는 능력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하나님의 불림을 받았을 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안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겸손함이 아니라 진실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음에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하나님의 뜻을 주셨을 때 모세는 그 하나님의 뜻을 수용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모세는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해서 바로의 궁에서 도망쳐나왔습니다. 그 도망쳐 나온 바로의 궁을 향하여 들어가 바로 앞에 담대히 서서 말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고 담대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수용했기에 이제는 목숨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목숨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니 담대하게 외치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는 40년동안 갖은 고초끝에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유리방황하다가 그 백성들에게 배척도 받고 수없는 어려움 가운데 갖은 고생도 하고 가나안이 보이는 전경을 바라봅니다. 가나안의 전경을 바라보게 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모세야 가나안을 보거라. 그러나 너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네가 전에 므리바의 반석에서 냈던 혈기로 인하여 너는 내게 불순종했던 고로 들어가지 못한다.” 모세에게 얼마나 청천벽력같은 소리입니까. 그러나 모세는 그 하나님의 뜻을 수용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것은 가장 합당한 것이다. 내가 판단해서 이것이 좋고 저것이 좋고, 기호와 선호에 의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그는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꺼이 하나님의 백성을 손들어 축복하고 그의 후계자 모세를 세웠습니다. 만약 모세가 그곳에서 고집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세는 이제까지 이루었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마음, 하나님을 수용함이 일거에 깨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라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세가 혼자 가나안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수백년 수천년 있었으면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이와같이 시대마다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의 조각 가운데 우리는 내가 감당해야 할 한 부분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나의 사명과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했던 것입니다. 기드온도 하나님의 뜻을 수용했습니다. 미디안의 대군을 막기 위해서 3만 2천명의 군사들이 모였지만 1만1천7백명을 보내고 횃불, 항아리, 나팔이라는 유치한 것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수용했던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너무나 많은 쫓김과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수없는 암살 위험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왕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진 사람을 내가 어떻게 나의 기호, 선호로 내가 위험하다고 죽일 수 있느냐?”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내가 죽일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의 옷깃만 베어나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옷깃만 베어나왔나이다.”라고 이야기할 때 사울이 그 마음 속에 찔림을 받습니다. 회개가 됩니다. 그러나 사울은 또다시 마음을 바꾸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와같은 것을 볼 때 이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공’과 ‘과’가 있습니다. 모든 인물이라는 것은 공, 과가 있습니다. 그러니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습니다. 한 가지부터 열까지 다 잘한 인물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공과 과가 합하여져서 하나님 앞에 어떤 역사가 이루어졌느냐가 그 인물에 대한 평가인 것입니다. 다윗도 잘한 것도 있지만 잘못한 것도 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탐내서 우리야를 죽게하고 그 아내 밧세바를 간음함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게 됩니다. 다윗이 그 아들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나단이 그의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고 그에게 또 한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죽게될 것이다.” 이 때 다윗이 그 마음에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내가 사랑하는 이 아들이 죽게되다니’ 그는 하나님 앞에 통곡을 하며 금식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너무너무 슬피울며 기도하며 금식하며 기도하니 그 신복들이 차마 그를 볼 수가 없습니다. 왕이 그렇게 처참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신하들이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병이 낫지 않고 그 병이 깊어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너무 슬퍼하니 그 신복들이 차마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기색을 보고 다윗은 알게 됩니다. 그랬더니 어떤 역사가 나타났습니까? 다윗이 깨끗하게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관을 갖추고 나가서 정사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 때 신하들이 너무나 의아했습니다. 그 아들을 살게 해달라고 울고 불고 하던 그와같은 다윗왕이 어찌하여 아들이 죽었을 때 더 슬퍼하며 곤두박질 쳐야할텐데 왜 저렇게 할까? 라고 생각하며 의아해하며 물어보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내 아들을 살려주시리라 기대했는데 하나님의 뜻이 내 아들을 거두어가는 것이라면 이미 결정하고 하나님의 뜻이 거기있음을 내가 분명히 알았는데 내가 거기서 무엇을 더 구하고 어떻게 하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냐?” 다윗은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대한 수용이야말로 결국 다윗을 다윗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요나단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단도 왕이 될 기회가 있는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다윗을 도왔던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 유다 어느 왕도 요나단만큼 훌륭한 인물로 치적되어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합니다. 귀신들린 여종에게 귀신을 좇습니다. 기적을 행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이 그 종을 통해 점을 치며 돈을 받았는데 이제 못벌게 되어 화가 나서 괴롭히고 그를 모해해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얼마나 난감합니까? 한 것은 복음전한 것, 한 일은 좋은 일, 귀신 좇아주고 좋은 일 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히니 얼마나 이상합니까? '도대체 이게 뭐냐? 하나님, 이게 뭡니까?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복음전하다가 이렇게 된 게 뭐 잘못한 게 있고, 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가면서 기적과 능력을 행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뭐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에 갇혔을 때 밤중에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했습니다. 찬미하고 기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이렇게 감옥에 넣으실 때는 하나님의 어떠한 분명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합니다.“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옥토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리고 그가 감옥에서 나오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간수장과 그 집이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에스더를 봅시다. 유대인들이 죽게됩니다. 그래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가서 이야기합니다. 너는 왕비로 세워졌으니 왕 앞에 가서 이 민족을 위해서 구하라했더니 에스더는 왕이 부르기 전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법도에 따라서 왕이 부르면 가는 것이고 부르지 않으면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내가 가는 것은 법도를 어기고 곧 죽음의 자리로 가는 것이라 합니다. 그 때 모르드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이 때를 위하여 너를 세우신 것이 아니냐? 이 때를 위하여 너를 세우신 것인데 네가 만약 이것을 거부하면 이 민족의 죽음과 더불어 너도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고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그 때 에스더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용합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모든 유대인들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3일동안 금식을 해주십시오 밤 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해주고 나도 내 시녀들과 더불어 금식하고 왕 앞에 나아가리라 그리고 왕이 내가 법도를 어겨 나를 죽게하면 나는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를 살려주시고 내 민족을 살려주시려면 같이 살고, 만약 죽게되는 것이라면 나는 죽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까지 어려움이 있으나 받아들이게되는 순간부터 마음에 평안이 있는 것을 봅니다.

전도서를 보면 삶의 상황에 대한 수용에 대해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천하의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심을 때도 있고 거둘 때도 있고 쌓을 때도 있고 쌓은 것을 무너뜨릴 때도 있다고 합니다. 전도서 9장 11절을 보면 내가 해 아래서 돌이켜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선착하는 것이 아니고 유력자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고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고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도 아니더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시기와 우연이 임해야된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충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정말 십자가의 잔을 면코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한심한 사람들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너무너무 초조했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너무 초조했는데 제자들은 그 때도 누가 높은 자리에 앉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했겠습니까? 그런 한심한 제자들에게 나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정도의 심정이면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갔겠습니까? 와보니깐 자고 또 자고 깨워서 기도좀해달라고 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정말 너희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얘기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정말 밤이 맞도록 기도하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합니다. ”아버지는 모든 권능이 있사오니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면케 하옵소서“ 그러나 결국은 기도 끝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진정한 승리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내 뜻을 끝까지 주장할 때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내가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순간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게되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사람, 바로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아홉 번의 재앙을 당해도 꿋꿋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대단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대단해도 하나님께 거역하는 인간적인 대단함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열 번째 모든 장자들이 다 죽고 나서야 그 때 손들고 네 백성을 데리고 나가라고 합니다. 빨리가라. 이스라엘 백성이 갔습니다. 그들이 홍해를 마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때는 이 때라고 생각합니다. 또 마병을 보내서 그들을 전멸시키려고 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홍해를 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가게 하고 애굽의 마병은 그 홍해에 다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지 않고 끝내 거부하는 사람은 이렇게 끝장을 봐야 끝이납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그 뜻을 수용하라고 우리들에게 허락해주실 기회를 놓치게 되면 결국 마지막에 가게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뜻을 수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창세기 19장 14절을 보면 롯의 식구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소돔성의 죄악을 보고 소돔성을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조카 롯이 소돔에 있는 것을 생각해서 의인 50명만 있어도 소돔성을 구원해주세요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갔는데도 의인 열명이 없어서 소돔성은 멸망당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 브라함이 그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구나‘ 하나님께서는 그 조카를 구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천사를 보내서 이야기합니다. 롯과 그 아내, 두 딸이 나옵니다. 롯의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너희들도 가자”했더니 창세기 19장 14절을 보니 그들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그들은 소돔성과 더불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한국에서 최초로 순교한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선교사에 대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리저리 여러 가지 문헌들을 찾아보고 제 마음에 이러저러한 많은 생각들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개신교선교 100주년이 지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민족이 복을 받았습니다. 큰 축복을 받은 이유를 생각해보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왜 축복해주셨을까하는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축복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비교의 대상들과 비교해보면 우리가 못한 면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에 비해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지경에 있는가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됩니다. 토마스선교사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신교 선교사로서 순교한 선교사입니다. 대동강변에서 피를 뿌리고 죽었습니다. 1840년생입니다. 웨일즈의 하노버교회에서 24살 때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런던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중국선교사 상해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교 초기부터 너무나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중국 현지에 적응을 못하고 그의 아내 캐롤라인이 죽게 되었습니다. 혼자가 되었습니다. 런던 선교부와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선교부에서 나와서 유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스코틀랜드 윌리엄 선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지프라는 곳에서 사역을 하게 됩니다. 거기서 한국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조선사람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대화하면서 그들에게 관심이 있고 그들과 대화하며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한국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지고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적인 요청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봐야겠다는 뜨거운 열망 중에 1865년 9월 13일에 한국 해안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두달 반을 지내면서 서울까지 오기를 원합니다.그런데 태풍으로 말미암아 오지 못하고 두달 반의 시간을 그 주변에서 지내다가 다시 상해로 갑니다. 그런데 상해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데 이 토마스 선교사의 마음에는 한국, 조선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토마스선교사가 상해로 선교를 올 때는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를 몰랐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국사람을 만나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곳에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되고 이렇게 하며 조선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두달 반 마치고 중국 상해로 갔다가 한국에 대한 마음이 너무 뜨거웠습니다. 그 때 프랑스함대가 프랑스신부를 한국에서 죽인 사건을 빌미삼아 진주하려고 했습니다. 거기서 통역관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 서양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토마스선교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선교사가 프랑스함대의 통역관으로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인도차이나 지역에 사건이 나서 프랑스함대가 급히 그 쪽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한국에 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 실망하게 됩니다. ‘내가 한국에 대한 이러한 꿈을 가지고 있는데..’ 또 실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네럴 셔먼(General Sherman)호라는 미국의 상선이 있는데 그 상선이 대동강변으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토마스 선교사는 그 배에 타기로 했습니다. 역시 직분은 통역관이었습니다. 자신은 통역관으로 그 배에 타고 한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대동강지역의 용강지역에 도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강변에 오지만 하선을 못합니다. 그래서 그 곳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발포사건이 일어나고 그곳에서 억류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조선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분격을 이루어서 불화살을 쏩니다. 그러니 배가 불타서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게 되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때 분격한 우리 국민들이 그 사람들을 결박하고 그 자리에서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죽여버렸습니다. 그 가운데 당연히 토마스 선교사도 죽게됩니다. 문헌에 의하면 토마스 선교사는 사력을 다해서 성경을 던집니다. 한문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을 던지며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지금 죽어도 좋사오니 단 한 권이라도 조선인에게 성경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토마스 선교사가 결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때, 그를 죽인 사람은 ‘박춘권’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박춘권이라는 사람에게 토마스 선교사가 죽으며 마지막으로 한문성경을 전달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책에 보면 또 다른 전도문건을 주었다고도 합니다만 정확하게 박춘권에게 한문성경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박춘권이라는 사람이 한문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서 평양교회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미국이 조선에게 설득을 하고 여러 가지 요청과 압력으로 마침내 1881년에 한미수호조약에 맺어지고 그것을 통해서 미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오는데 그것을 따라서 들어온 사람이 바로 1884년 제물포항을 통해서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들어온 것입니다.

장로교에 언더우드 선교사,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옵니다. 그러니 한미조약을 맺고 2년 후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피를 뿌리며 죽은 후, 18년 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손에 들려진 것은 한글성경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중국에서 이미 한글성경을 번역해서 이 민족에게 전파하려고 모든 일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18년간 진행되고 있어서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 하나 변변히 한 것도 없지만, 이 곳에 와서 순교의 제물로 피 뿌려 죽고 그 뒤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오고 그 뒤로 수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지금도 양화진에 보면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 100주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1만2천명입니다. 그 1만2천명의 선교사를 한국교회가 전부 후원해서 그 모든 선교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외교관 숫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입니다. 그 수를 한국교회가 지지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힘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을 지지할 수가 없습니다. 선교사를 제일 많이 파송한 나라는 당연히 미국입니다. 그런데 인구비율로 따질 때는 한국이 최고로 많습니다. 우리 남한인구 4천5백에서 5천만이고 미국인구 2억 3천 정도된다고 볼 때 인구비율로 보면 한국이 가장 많은 것입니다. 도대체 이 비밀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토마스 선교사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뜻이 강렬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한국에 도대체 왜 가야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들어보지도 못했고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에 강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소망이 일어났을 때 그는 그 하나님의 소망을 꺾을 수 없었고 결국 그 소망으로 인해서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향하여 달려갔던 것입니다. 수용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욕구와 바램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내 뜻을 제어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복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대한 기쁨과 영적인 성취와 감동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기쁨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게 되면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상대에 대한 수용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요즘 인간존중, 인간존엄에 대해서 마음에 깊이 묵상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존엄합니다. 어느 나라에 살든지 어느 여건에 살든지 어떠한 형편에 살든지 인간은 존엄합니다. 왜냐하면 그 한 인간을 이 세상에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대받아야 할 인간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존엄성을 인정받고 유지받고 누구든지 존엄성에 대하여 보장받아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야 말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너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 대한 존중함,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하대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존엄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게 됩니다.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그 사람의 뜻도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판단하고 비판하면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수용적인 자세를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판단하고 비판하기 전에 우리는 수용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수용할 의지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겸손이 이루어지게 되고 이해가 이루어지게 되고 존중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인정하는 것은 진정한 용기입니다.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누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과 상황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아니야, 내가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과는 이것뿐이야. 이것은 잘못된 거야. 뭔가 잘못됐어.’라고 불평하고 불만을 품고 산다고 우리의 인생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여건 가운데 나는 많은 결과를 원했지만 그러나 결과가 이렇다면 하나님의 어떠한 뜻이 있을거야.’라고 수용하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실 뜻과 계획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이루려고 할 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과 상황을 수용하는 것과 내 삶을 극복하는 것은 반대가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뜻을 수용할 수 있기에 내게 주신 삶을 극복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어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의지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막에 떨어졌다고 생각합시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막, 황무지에서 꽃을 피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가운데 ‘내가 사막에 떨어진 뜻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과, ‘왜 내가 사막에 떨어져야 해?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만 해?’라고 징징거리며 울고 불평하고 불만하는 사람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사막에 떨어져도 ‘이 가운데 나는 분명히 황무지에서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야.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하여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으신 거야.’라고 그것을 믿고 극복하기를 원한다면 거기에는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상황을 수용할만한 마음의 각오와 여유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큰 믿음의 거인들이 되는 것입니다.저는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바로 이와같은 영적인 믿음의 거인들이 되길 바랍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몇가지 일이 있어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요인이 있어서 우리는 비판하고 판단하며 평가하고 삶에 대해 이러저러한 불평과 불만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의 여건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겠지, 내게 합당한 것이겠지. 이것을 통해 이룰 계획이 있겠지.‘ 그리고 이차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극복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잘못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다 정상적이고 다 옳은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통해서 이룰 그 다음 단계의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우리는 극복의 의지를 가지고 나아가면 될 뿐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믿음 안에서 거룩하고 장대한 주의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니 사람을 수용합니다. 사람을 수용하니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니 우리 삶의 상황을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마음에 우리의 삶을 슬픔과 눈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기회로 여겨 내게 주어진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장대한 믿음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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