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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자보수 0% 도전 (마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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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얼굴을 가꾸는데 시간을 많이 씁니다. 10 대는 주로 치장을 합니다. 그러다가 20 대가 되면 화장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30 대가 되면 화장이 두꺼워집니다. 점점 배우들이 무대에서 진하게 화장하는 분장에 가까워집니다. 결국 40 대가 하는 화장을 변장이라고 합니다. 50 대 화장은 위장, 60 대 화장은 포장, 70 대 화장은 환장, 80 이 넘어서 하는 화장을 끝장이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입니다. 어느 화장품 회사의 광고에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지 않습니까? 화장으로 예쁘게 보이는 것은 좋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른 방법으로 겉치장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무죄가 아닙니다. 유죄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때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받을 때입니다. 잔디 위에서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먹었습니다. 예수님의 옷가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았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기적과 은혜를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쪽에서는 이를 시기하여 트집을 잡고 있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것은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더 세부적인 규칙들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율법에 철저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좀 더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규칙들을 모은 것이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장로는 유대 공동체의 가장 웃어른입니다. 어른들의 지혜로운 어록집이라는 뜻입니다. 장로들의 어록이 후손들에게 물려지면서 유전이란 단어가 붙게 되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이 장로들의 어록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겉으로는 별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세부 규칙을 너무 자세히 정해놓아 오히려 율법의 정신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으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 규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랍비가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생명을 유지할 만큼 아주 적은 물과 음식을 배급받았습니다. 그 때 랍비는 죽음을 무릅쓰고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서 그 물로 먼저 손을 씻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잘못 이해하여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규정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 외에도 탈무드라는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탈무드는 율법을 다루면서 얻은 교훈적이 이야기입니다. 주로 구전으로 전해진 율법의 지혜를 문서로 만들었습니다. 이 탈무드는 지금도 유대인들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민족의 큰 자랑거리입니다.

탈무드나 장로들의 유전은 율법의 권위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에 버금가는 소중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에게 장로들의 유전을 가지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율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 위에 새로운 구원의 소식을 담은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보다 못한 장로들의 유전을 가지고, 율법보다 위대한 복음에 흠집을 내려고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잘못된 무기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모순을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이 즉각 답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장로들의 유전은 계명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그 유전이 계명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단번에 카운터펀치를 날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한 계명을 예로 드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는 십계명에 있는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한 구절까지 강조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1:17 에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들의 유전에는 한 구절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아떤 사람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양할 재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물을 부모보다 더 큰 하나님에게 헌금을 했다면 그 부모에게는 재물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를 가르쳐 ‘고르반’이라고 했습니다. ‘고르반’하면 부모님께 드릴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말았다는 선언입니다. 고르반을 외치면서 헌금을 핑계로 부모를 섬기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 사람을 비판할 사람이 없습니다. 굉장히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빙자한 교활한 행동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이 부모를 공경하란 계명을 눌러 없애 버렸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의 말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한다고 만든 것입니다. 의도는 순수했지만 그 유전 속에 인간의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좋은 의도는 사라졌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수준까지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덮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리는 성경을 바탕으로 세운 교회의 법입니다. 그런데 이 교리 때문에 교단이 분열됩니다. 생각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갈라섭니다. 상대의 생각과 다른 것을 틀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운 교회가 결국은 하나님을 욕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서 야단을 치셨습니다. 7 절에 “외식하는 자들아.”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셨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으로는 멀리 있는 자라는 겁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 하고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말로는 가르치나 행동이 따르지 못한 가르침입니다. 그럴듯해 보이나 그 가르침에 권위가 없습니다.

설교가 그렇습니다. 유창한 설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눌해도 행함과 진실함이 담겨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참으로 부족한 설교가입니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지킬 것을 지키는 목사가 되려고 합니다.

외식하는 자는 두 가지 잘못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마음은 멀리 있는 자입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순수합니다. 그러나 오래되면 함정이 빠질 수 있습니다.

전도 간증하는 분 가운데도 가짜가 있습니다. 보통 전도 간증을 하는 분들은 수 백 명에서 수천 명까지 전도한 분들이 많습니다. 군산 지역에서 전도를 잘하기로 소문난 분이 있었습니다. 전도 간증자라고 명함까지 새겨서 다닙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 분을 초대하려고 담임 목사님께 전화를 했답니다. 담임목사님이 허락해 주셔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은 대번에 사기꾼이라고 하더랍니다. 교회도 다니지 않고 할 짓 못할 짓 다하고 다닌답니다. 교회마다 다니면서 전도한다고 뻥을 치고 다닌답니다. 전문적으로 다니면 강사비 수입이 꽤 괜찮은가 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허탈했습니다. 9.10 전도잔칫날 준비로 전도간증자를 찾고 있는데 난감합니다. 그러다가 예닮동산에서 우연히 한 성도님을 만났습니다. 이 분은 예수 믿은 지 2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도에 열정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가르친 대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4 명을 전도했답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도할 사람이 30 여명 수첩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위해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전도의 열정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에 전도 간증 계획이 있었는데 이 분을 초대하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제 전화가 왔습니다. 떨려서 도저히 멋진교회에서 간증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딱 제가 원하는 간증자입니다. 전도의 열정은 뜨겁고 결코 이를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는 전도자의 사례가 필요합니다. 이분이 용기를 내서 와 간증할 수 있도록 기도바랍니다.

마음이 멀어지는 까닭은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돈의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입니다.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벌면 쉽습니다. 그런데 돈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돈을 놓아야 합니다. 돈을 포기하면 사실 그 때부터 복을 받습니다. 당장은 손해이지만 결국은 더 크게 채워집니다.

또 죄를 지으면 마음이 멀어집니다. 죄를 지으면 우선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가 어렵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죄 문제가 있습니다.

빨리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속히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죄는 수렁과 같습니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반드시 그 죄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외식하는 자의 둘째는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기 말로 하면 안 들을 것 같으니 하나님 말씀이라고 덧씌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채 하면서 자기 생각과 말을 전합니다. 이 때 꼭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야 말에 권위가 서기 때문입니다.

이단 사이비에서 가장 많이 쓰는 방법입니다. 성경을 제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성경 구절을 마음대로 갖다 붙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입지를 굳힙니다.

이런 외식하는 자가 드리는 예배는 헛된 예배입니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기도에는 자기 욕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예배가 아닌 다른 동기로 교회를 다닙니다. 이런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외식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외식은 누구나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여러분 예배의 감격이 사라졌습니까? 틀림없이 외식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외식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외식은 인생의 부실공사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부실한 것은 꼭 나타납니다. 건물에 입주하면 하자보수 기간이 있습니다. 성실한 건축사가 지은 집은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실하게 지으면 온통 하자 투성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주님은 불로 우리의 인생의 집을 시험하십니다.

고린도전도 3:12-15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외식은 사람을 일순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다 드러납니다. 부끄러운 순간을 맞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외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첫째는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모든 진리의 원형입니다. 제도나 교리나 규칙들은 모두 말씀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사람의 말을 끊고 성경이 뭐라 말씀하시는가 보아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도록 성경을 열어야 합니다.

둘째는 교만한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외식에 빠지지 않는 길은 자기 부정입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언제든 뽐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합니다. 자기 부정이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입니다. 나는 오직 섬기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자기 부인을 지키려면 겸손히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언제나 교만이 머리를 들고 일어납니다.

셋째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임에서 삶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둥지에서 삶을 솔직하게 나누십시오. 신앙의 동료들이 붙들어 줄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솔직하게 고백해야 도움을 받습니다. 내 속을 아는 믿음의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내 삶을 견인해 줄 것입니다. 나를 죄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도록 진정 도울이들입니다. 이들을 멀리하려는 마음이 들 때는 내가 외식할 때입니다. 이들과 친밀해져야 합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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