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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돌(롬 7: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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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님들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성도님들이 저를 환영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은혜안에서 성도님들의 기도의 은혜를 입고 호주 원주민 선교에 잘 다녀왔습니다. 성도님들을 정말 보고 싶었고 별일없이 잘 계셔주시어 감사를 드립니다. 호주에 다녀온 저를 기쁘게 해 준 일들은 유치,유년,초등부의 켐프를 잘 마쳤다는 것입니다. 중등부 또한 수련회를 잘 진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이동우 전도사님의 출산의 소식입니다. 무엇보다 수해를 당한 강원도 지역에 가서 이틀동안 성도님들이 자원봉사에 참여하셨다는 소식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저도 좋은 소식을 전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호주 북쪽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에버러진이라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이 들어간 이야기 말입니다.

금번이 있어진 서북지역 원주민들 성회에 500여명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송하고 즐거워 한 이야기 말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잔치가 있어지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 원주민 부족안에는 법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토착신 외에 다른 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쇠막대기에 불을 달구어 두 눈을 찔러 앞을 보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한사람의 걸음이 이 마을을 향하게 하였고 수년만에 한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세례를 받는 현장에서 예수는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하는 복음의 질문만 있어졌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원주민들이 묻는 것입니다. 쇠막대기에 벌겋게 불을 달구어 보이며 묻는 것입니다. 이래도 예수를 믿겠냐는 것입니다. 이래도 세례를 받겠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정말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두 눈을 찔렸습니다. 그는 치료의 과정을 거친 후 평생에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마음껏 믿을 수 있었고 그 이후에 복음의 물결은 원주민들의 법을 없애 버렸고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와 함께 예배하고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늘동안 또 선교사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겠습니까 사십에 하나 감한 매 다섯 번에 세 번을 태장을 맞고 죽었다고 수없이 던져진 이야기는 성경속에서 만 있었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왜 선교사들은 이렇게 환영하지도 않는 저들을 향하여 가야 했습니까 왜 바울 사도는 자신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겠다 하며 기다리고 있는 저들을 향하여 가야 했냐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여러분은 이런 고민을 해 보셨습니까 지금 이 고민은 무엇을 더 누릴 것인가 무엇을 더 잘 마실 것인가 무엇을 잘 입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이 고민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육적 사람들에게 있어지는 고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여 세상이 원하는대로 육이 원하는대로 살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어느날 복음의 빛이 있어집니다.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 복음으로 영접되어 집니다. 문제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는데 복음을 영접했는데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에 여전히 악이 함께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내 안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나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내 마음은 선을 원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안에 있는 나는 나로 하여금 악을 행하는 자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 23절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22-23a)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입니다. 내안에 있는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싶습니다. 선한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라고 하지만 내 지체속에서 철저하게 길들여진 또 하나의 법이 나를 원치 않는 죄의 법 아래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선을 원합니다. 아름다운 삶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마음의 법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죄의 법 아래로 이끌려 다닙니다. 원치 않는 죄를 지으며 끌려 다닙니다. 이겨야 되는 줄을 알지만 죄의 유혹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이것이 내 안에 있어지는 충돌입니다.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전쟁입니다. 마치 지금의 이스라엘과 레바논가운데 있어지는 전쟁이 내 마음에 있어지는 충돌과 같다는 것입니다. 적당한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이길 것인가? 죄의 묻혀 살 것인가 선을 행할 것인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내 마음의 원하는대로 살 것인가 내 안에 끊임없이 있어지는 영적 싸움입니다.

이 영적 싸움은 축구나 베드민턴이 아닙니다. 이 영적 싸움은 레스링과 같은 것입니다. 축구나 배드민턴은 서로 떨어져서 이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레슬링은 서로 붙어서 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전쟁은 레스링과 같은 육탄전입니다. 레스링 선수를 만나면 알 수 있는 것이 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죄와 붙잡고 싸우는 것입니다. 마귀와 붙어 싸우는 것입니다. 서로 붙잡고 뒹구는 것입니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이 처절한 전쟁이 이 기가 막힌 전쟁이 우리안에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전쟁의 승팽에 있어 내가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겨야 되는 줄은 아는데 자꾸만 세상에 길들여져 있는 세상에 속한 또 하나의 나가 자꾸만 나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 전쟁앞에 나는 손을 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내 안에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나가 나를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누구의 문제입니까 무엇의 문제입니까 아내를 탓해보고 남편을 탓해보고 전부를 탓해보고 하지만 사실 살면서 나를 정말 힘들게 하는 사람은 교회나 직장에 가정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살면서 내가 정말 미워하고 싫어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자신이 있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의 사람 대 사도인 바울의 절규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대강 만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놀라운 기적의 역사로 일어났습니다. 이 복음의 역사속에 매를 맞고 태장으로도 맞고 강도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 그리고 굶주리고 헐벗고 마음에 사형선고을 받은 것 같은 수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정말 힘들게 했던 것은 놀랍게 이런 외적인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더 큰 고통은 내 안에서 죄와 싸우는 고통 나 자신과 싸우는 경험들이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바울의 절규는 절대로 외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내 안에서 있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어지는 충돌로 인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있어지는 절규입니다.

  충돌의 경험(24)

개인적으로 복음을 영접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세번의 충돌의 경험을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는 내 안에서 복음으로 인한 충돌이 있게 됩니다. 나를 향하여 도전해 오는 복음앞에 어찌할꼬 탄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의 충돌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경험되어져야 할 충돌입니다. 이 충돌앞에서 두 종류의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스데반을 통하여 복음의 충돌을 경험했던 당시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저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어찌할꼬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를 갈며 복음의 충돌을 일으키게 한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들었습니다. 행7:57절에 보면 저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했습니다.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 친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두 눈으로 더 큰 복음을 봐야 했습니다. 돌에 맞으면서도 하늘을 보는 스데반입니다. 돌에 맞으면서도 주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십시오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환영하는 스데반을 본 것입니다. 돌에 맞으면서도 무릎을 꿇고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용서하는 스데반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복음을 들고 복음을 보면서 밀려오는 복음의 충돌을 소화해 내지 못하고 복음에 반하는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또 하나 행 2장에 베드로를 통하여 들려지는 복음의 충돌앞에 저들은 마음에 찔려 제자들을 향하여 묻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때 베드로의 답변이 행2:3절에 있어집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리 이 베드로의 설교앞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이 날에 삼천이나 더했다고 성경은 소개합니다. 이 처음 있어지는 복음의 충돌 앞에 어찌할꼬 하는 마음의 충돌 앞에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예수를 영접함으로 처음 있어지는 충돌이 해결됩니다. 이때 우리는 신분변화가 있어집니다. 세상에 속했던 사람에서 영에 속한 사람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땅에 속했던 사람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를 영접함으로 주어지는 축복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됩니다. 처음 경험하게 되는 복음의 충돌에 이어 다음으로 신앙적 삶으로 인해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 충돌은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에게 말씀이 들려지면서 끊임없이 있어지는 충돌입니다. 이것이 지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있어지는 고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서 오히려 안 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안에서 하나님의 원하심과 여전히 세상으로 길들여져 있는 육신적 요소의 충돌이 있는 것입니다. 밀려오는 환경앞에 적당히 타협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술 담배 제사 등 많은 충돌이 있어집니다. 이 단계에 주목하지 못하고 주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단계에 주목하지 못하고 천주교 불교에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천주교 불교가 들어오면서 많은 순교자를 내었던 영성을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세상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천주교를 바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리의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충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단계에서 밀려오는 환경과 관계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신앙적 씨름을 하게 됩니다.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번째 신앙적 삶으로 인한 충돌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내가 커야 합니다. 모든 것을 소화해 낼만큼 사자굴도 풀무도 소화해내는 것입니다. 영성은 소화력입니다. 신앙의 매력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소화불량에 걸려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남편이 어떤 사람은 가난이 질병이 소화불량에 걸려 있습니까 관계앞에서도 내가 커야 합니다. 사울앞에서 다윗처럼 말입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돌에 맞으며 용서하며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원수가 원수가 아니게 됩니다. 이 두번째 충돌앞에 승리하는 비결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삶에 갈등이 있습니까 삶에 지루함이 있습니까 휴가다녀오면 모든 것이 풀립니까 어디가서 푹쉬면 풀리겠습니까 그동안 안해보셨습니까 성령으로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내안에서 하나님의 원하심이 자리잡고 하나님의 뜻이 자리잡은 길은 성령충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용서하는 사람으로 내안에서 말씀이 말씀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세번째로 있어지는 충돌은 삶에 목적에 대한 충돌입니다. 신앙적 삶의 충돌이 요구하는 바가 신앙인으로서의 삶이라면 삶의 목적에서 있어지는 충돌은 사명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왜 살아야 하느냐 삶의 무게중심이 하나님의 원하심이 중요한 사람으로 옮겨 자리를 잡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적 삶의 충돌이 삶의 방법을 바꾸는 것이라면 다음으로 있어지는 충돌은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충돌이 내안에 오면 직장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냥 이렇게 살아도 누가 뭐라 안했는데 괜히 이렇게 살아서는 안될 것 같은 것입니다. 어느날부터인가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보가 하나님의 원하심이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의 층돌앞에 서면 객관적으로 모두에게 있어지는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나만을 향해 있어지는 하나님의 원하심으로 인해 갈등하게 됩니다. 성령은 역사합니다. 더 큰 것을 보고 더 큰 것으로 느끼게 되고 더 큰 삶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의 충돌앞에 많은 선교사들이 움직였고 이 사명의 충돌앞에 많은 성도들이 선교 후원자들이 되고 이 사명의 충돌이 있어지는 곳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24a)

이 절규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고민하는 바 갈등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의 힘들어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혹시 복음을 영접했으면서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사단은 에덴에서 하와에게 그리하였듯 여러분을 미혹할 것입니다. 다 그러고 산다고 보이는 것 선악과 먹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사단의 세력을 이기고 싶습니까 내안에 있는 인간의 두 본성앞에서 있어지는 바울의 고백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것은 바로 나를 내 힘으로 어떻게 할 길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도 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에 대하여 바울은 또 어떻게 고백합니까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깊은 뜻은 무엇입니까

당시 로마에는 사형제도가 다양하게 있었는데 그중에 제일 잔인한 사형법 가운데 하나는 산 사람을 사형수를 죽은 송장과 함께 묶어 주검이 썩어들어 가면서 생기는 부패의 병균들이 산 사람의 몸에 옮아 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형수가 죽어 가는데 두달 정도가 걸린다 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사망의 몸이라 한 것입니다. 전혀 희망이 없는 몸인 것입니다. 완전히 사형선고 받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입니다. 무엇이 나를 건져줄 것인가 합니다. 이것이 사망에 매여 있는 몸입니다. 이것이 사단에게 죄에게 매여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인간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바울은 탄식합니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무엇이 나를 건져내랴 입니다. 돈이 출세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끊임없는 씨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 애굽이 너를 구해줄 수가 없다. 성벽이 너를 지켜줄 수 없다 애굽의 병거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탄식하던 바울이 한 줄기 빛줄기을 보고 감격합니다. 25절입니다.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렇게 탄식이 감격으로 바뀝니다. 이 감격은 무엇입니까 곤고함에 매여 있는 자신 사망의 몸에 송장에게 매여 있는 자신 더 이상 삶의 해답이 없다 싶었는데 자신안에 해답이 없다 싶었는데 예수를 바라보니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를 바라보니 내가 사망의 몸에 매여 머물러 있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 내 모습은 주님과 함께 매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인식 구제불능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보는 순간 이 사망의 몸에서 자유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 기대하십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하십시요. 나 같은 것이 무슨 목사야 나 같은 것이 무슨 장로 권사 성도 내게 선한 것이 없다 절망하십시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크게 절망합니다. 여러분! 될 수 있는 한 크게 절망하십시오. 그리고 큰 예수를 만나십시오. 더 이상 사망에 매여 있는 나가 아니라 생명의 예수 길 진리 생명의 예수에게 매여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안에만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안에만 생명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어두운 7장을 넘어 8장으로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 아멘 -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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