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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평의 확장을 촉구하는 부활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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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서의 장면이 어둠에서 빛으로 확 바뀝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 지금으로 말하면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십니다. 그 날 저녁에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무덤에 장사됩니다. 하루가 더 지나고 안식 후 첫날, 지금으로 말하면 주일 동이 터옵니다. 해가 솟아오르는 이른 아침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시점 예수님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른 아침 무덤을 찾는 여인들에게서 예수님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배웁니다. 한편 그들의 한계도 발견합니다. 청년의 모습을 나타난 천사는 여인들에게 마음의 지평을 활짝 넓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 요청 앞에 설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부활을 둘러싼 사건들에 관련된 기록은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에 대하여 연구를 했습니다.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 쉬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점이 오히려 부활기사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 줍니다. 저자들이 서로 입을 맞추려 한 흔적이나 후대에 저작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작한 흔적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저자의 경험이나 성품 그리고 강조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서술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사건을 살펴볼 때 중요한 것은 사건이 일어난 순서나 세부사항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보다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신앙적 교훈을 찾는 것입니다.

1.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진솔한 사랑을 배웁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새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의 행방을 세밀하게 추적하고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살로메는 주일 아침 무덤가로 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이라는 당대 최고의 극형으로 처형당한 극악한 범죄자에게 지지와 애정을 표하는 것은 결코 안전한 일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위험과 손해를 무릎 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여건에 도전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은 돌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여인의 힘으론 도저히 열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여 그들은 무덤으로 향해 가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서로 묻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그들은 어디서도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없는 막막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고 무덤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득실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가능의 장벽 앞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장벽이라도 뚫고 나가기 위해 자신을 던집니다.

이 여인들의 행동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마음자세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한 후 자괴감에 사로잡혀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잘 잡히지도 않는 물고기를 잡느라 고생고생하고 있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찾아가 도와주십니다. 해변가에서 손수 조반을 준비해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17) 제자도의 진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다른 면에서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에베소교회는 예수님께서도 알고 계신 탁월한 점이 많았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모로 수고하며 인내하였습니다. 악한 자들을 눈감아두지 않았습니다. 거짓 사도를 밝혀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받는 일을 참아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 낙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가 굳었습니다. 그러나 나무랄 것이 있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버린 것입니다(계 2:2-4).

이는 결코 작은 결함이 아닙니다. 주님은 정신 바짝 나게 단호하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계 2:5). 아무리 훌륭한 행위들도 주님에 대한 첫사랑의 상실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교회를 주님의 징계와 쇠퇴로부터 막아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외관상 탁월해 보이는 다양한 신앙생활이라도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 되 버리고 맙니다.

얼마 전 예수교장로회에 속한 어느 교단의 장로님들의 전국 모임에 강의를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그 교단은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느라 고생한 믿음의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좇아 세워진 교단입니다. 그런데 장로님들이 현재 그 형편을 한 마디로 솔직하게 정리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진솔하게 솔직하게 답변했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집안에 머물러 있던 큰아들 같다'고 말입니다. 큰아들은 성실하게 집안 일을 돌아보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고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성실과 인내의 동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그 교단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우리 교단 믿음의 선배들은 신사참배를 안 했지!'하는 자부심은 굳게 갔고 있었지만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장로님들은 제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맞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교단의 장래가 밝아 보였습니다.

율법적인 삶에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삶으로의 전환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소위 호전반응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적 의무감에서 해방되다보니 그만 신앙생활이 나태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할 일은 아닙니다. 율법에 얽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나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율법적인 삶으로 돌아갈 생각을 해선 안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부관계처럼 종종 권태기가 올 수 있습니다. 이를 잘 아는 어느 분이 우리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재미있는 글을 남겼습니다. '89년부터 97년까지 9년간 연애하던 중에 가장 "뜨겁게" 만났던 해입니다. 말 그대로 "열애"를 했죠. 아내는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왜 이래" 하면서 18년 전 과거를 자꾸 들추고 있고 저는 "과거는 잊어주세요" 하면서 "과거사 청산"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권면합니다. '아직 연애를 시작하지 않은 남자들아! 나중에 책임지지 못할 얘기는 절대 흔적을 남기지 말아라. 한순간 꼬시려다가 일평생 낚여서 살아야 한다'. 재미있죠? 그러나 너무 절망적으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진정한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첫 사랑의 열정과는 성격이 좀 다르더라도 새로운 차원의 더 깊은 사랑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 대한 첫 사랑도 더 깊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주십니다. 이 점을 믿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간구하면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회복할 뿐 아니라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2. 부활은 우리의 지평을 넓힐 것을 요청합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사건을 목격합니다. 돌문이 옮겨져 있는 것입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입니다. 놀란 여인들에게 청년은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첫째, 마음의 지평을 넓혀 부활의 사건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만,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입니다(6).' 사랑어린 질책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심히 놀라 떱니다. 무덤에서 나와 도망칩니다. 무서워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합니다. 도저히 부활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평이란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계를 말합니다. 높이 올라가면 지평이 뒤로 물러가 넓어지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죠. 그와 같이 우리 마음에도 지평이 있습니다. 마음의 지평이 넓어질수록 더 많은 것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부활을 받아들이기엔 여인들의 마음의 지평이 너무 좁았습니다. 거룩한 인품의 소유자 예수님, 아름다운 사역을 펼치신 예수님,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사랑할 순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 청년은 여인들에게 마음의 지평을 넓힐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 마음의 지평을 열라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근거로 예수님의 빈 무덤에 주목하게 합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입니다'. 빈 무덤을 예수님 부활의 강력한 증거로 제시합니다.

부활의 사건 그리고 예수님의 빈 무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성의 한계에 갇혀 있는 우리의 마음의 지평을 넓힐 것을 촉구합니다. 신약학자 김세윤 교수가 잘 말해준 것처럼 부활의 사건은 역사와 믿음의 경계선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부활은 시공간 그리고 역사의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여 반드시 역사 가운데 그 증거와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빈 무덤입니다. 무덤은 확실히 비어 있었습니다. 안 그랬다면 예수님의 적대세력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끌어내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는 것을 아주 쉽게 증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했습니다. 무덤이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빈 무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절했다 걸어나오시곤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하셨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덤에서 그 시체를 훔친 다음 부활했다고 사기를 쳤단 말입니까? 그런 사기극을 위해 목숨을 걸고 부활을 증거했단 말입니까? 모두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빈 무덤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셔서 무덤을 걸어나오셨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활을 역사와 이성의 한계 내에서 다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 그리고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결국 믿어야하는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교회 가면 무조건 믿어라'고 한다고 불평합니다. 반은 일리가 있는 불평입니다. 기독교는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믿을 만한 증거들을 무수히 제공합니다. 기독교를 잘 믿으려면 그 증거들을 자세히 살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기독교를 무조건 믿지 마십시오. 그러면 많은 것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결국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얼마나 당연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젊은 남녀 사이를 봅시다. 아무리 연애를 오래 해도 상대에 대하여 다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서로를 신뢰하여 한 몸이 되어야 비로소 알아갈 수 있는 부분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물며 신앙의 세계야 얼마나 더 믿음이 필요하겠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 그리고 역사를 품으면서도 초월하는 광대한 세계입니다. 이 세계를 어찌 믿음이 아니고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믿음이란 참 합리적인 생각의 결과입니다. 선과 면으로만 구성된 2차원의 세계에서 살던 존재가 3차원적 공간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의 첫 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을 믿을 것을 요청하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가 바로 마음의 지평을 넓히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마음의 지평을 넓힐 것을 요청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요 11장). 그들은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를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은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늦게 도착하시자 마르다는 예수님이 좀더 빨리 오셨더라면 오라비가 살았을 것이라고 섭섭함을 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굉장한 믿음의 표현처럼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고 고백합니다. 종말시의 부활은 믿어도 지금 다시 살아날 것은 믿지 않는 믿음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도전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는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습니다'. 믿는다는 말인지 안 믿는다는 말인지 알쏭달쏭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마르다의 믿음의 한계가 다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다가가 '돌을 옮겨 놓아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마르다가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예수님은 넌지시 마르다를 다시 책망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도 마르다처럼 우리의 지평을 끝끝내 고집하곤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지평을 활짝 넓힐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지평을 넓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부활의 영광을 믿고 경험하는 축복을 모두 누리시길 바랍니다.

둘째, 청년은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여전히 제자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전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십시오. 그는 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7)'. 왜 하필이면 갈릴리일까요? 갈릴리는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나 사랑을 맛본 곳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거닐 던 곳입니다. 사랑의 아름다움 추억들이 서려있는 곳이죠. 부활하신 예수님은 거기서 다시 만나자고 제자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신 셈입니다.

여기엔 예수님의 아름다운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포기했습니다.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처음 갈릴리에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지금도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제자들은 쉽게 첫사랑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한 첫사랑을 고이 간직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의 지평을 넓혀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어 경험하려면 우리의 마음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사랑의 한계를 그어놓고 살기 마련입니다. 상대방이 그 한계선을 넘어가면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지평으로 예수님의 사랑까지 한계 지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가룟 유다 아닙니까? 그는 예수님을 팔아 남긴 다음 그런 자신을 예수님이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리고 절망과 좌절 그리고 자기연민과 후회의 함정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결국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두 번 아프게 한 셈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한 후 마음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드립니다. 하여 그는 새로운 길을 걸어갑니다.

사랑하는 언덕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주님은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십니다. 마음의 지평을 넓혀 그 사랑을 받아들여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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