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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 속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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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이야기'로 불거진 사행성 도박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가운데 한 공무원이 도박 빚으로 말다툼을 벌이던 끝에 아내를 살해한 뒤 길가에 버린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특히 가슴 아픈 것은 이들 부부는 이른 새벽에 신문배달을 함께 하며 미래를 꿈꿨지만 도박의 검은 그림자는 이들 가정을 산산조각 내 버렸습니다.

지금 도박 열풍이 나라를 휩쓸고 있습니다. 주택가와 학교 인근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면서 온 국민을 '도박의 덫'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지난 2년 사이 전국에 성인오락실이 1만5000곳이 생겼는데 이는 전국의 목욕탕과 이발소, 미용실을 합친 숫자를 능가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도박게임의 시장 규모는 자그마치 30조원을 넘는 돈이 도박판에 뿌려지는 꼴입니다.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얼마 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인구 십만 명당 30여명 가까이 자살하는 그래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가장 높은 자살율로, 그것도 20-30대의 경우 사망 원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자살 공화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늘어나는 술집과 우리나라 여성의 1/5이 술집이나 매춘과 관련된 직종에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두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하는 이혼선진국이 되 버린 이 현실 앞에서 정말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방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이 막상 학교를 졸업해도 그들을 받아 줄 직장이 없어 얼마나 많은 자들이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습니까?

누가 뭐래도 이 나리의 경제를 이끄는 삼성에 이건희 회장이 공석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10년 후에 우리가 뭘 먹고살아야 할지 생각하노라면 며칠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납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여러분이나 저나 참 답답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포기할 수 없잖아요. 포기해야 할 상당부분은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지나갔다 할지라도 아직 남아있는 미래, 펼쳐질 꿈마저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의 진짜 목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절망의 환경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환경으로 바꾸어가야 될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예수님은 오늘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너희라는 말은 굉장한 강조형입니다.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아무리 세상이 썩고 어두워도 나는 너희만을 믿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만 믿어.' 하는 의미가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 '너희가'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열두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해당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오늘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는 우리 모두가 너희에 해당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참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대를 갖고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라고 말씀하시는 대상인 열두 명의 제자들이란 세상적으로 볼 때 얼마나 초라한 사람들입니까? 배운 게 있습니까? 가진 것이 있습니까? 기댈 데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놓고 마치 이 세상의 내일이 그들의 어깨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나은 점이 많습니다. 배우기도 많이 배우고, 그 당시 제자들의 믿음 보다 우리의 믿음이 훨씬 더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캄캄하고 썩어 냄새나는 세상이라고 하는 괴물 앞에 우리 자신을 놓고 보면 얼마나 초라해 보입니까? 얼마나 작아 보입니까? 무슨 빛을 발할 수 있으며, 무슨 소금 노릇을 할 것 같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조용히 내려다보시면서 '나는 너희만 믿어. 왜냐하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너희마저 없다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어. 절망이야.' 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니 한편으로는 부담도 되고, 한편으로는 주님의 우리를 너무 잘 봐 주심에 대해서 감격도 하고 긍지도 갖게 되지 않습니까?

얼마 전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한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야! 임마 네가 무슨 교인이냐? 그랬더니 한 쪽에서 뭐라고 대답하는지 아십니까? '야! 교인이 뭐 별건 줄 아느냐? ' 요즘 계속해서 교회에 대한 시각이 말이 아닌데 또 심방하다 교인들한테 교회의 부정적인 소리를 듣고 마음도 안 편하던 차에 목사인 제가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지 벌떡 일어났습니다. "교인이 뭐 별거 아니야!... (큰 소리로)" 그럴래다 말았죠! 남 식사하는데 그래서 되겠어요. 그런데 사실은 내 마음엔 그대로 말해 버린 것입니다. 요즘 저의 고민 중에 하나는 우리 교인들도 혹시 나가 살면서 저렇게 대답하며 사는게 아닌가? 여러분 , 무엇 무엇이 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무엇 무엇답게 산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 그렇게 어려운 것 아닙니다. 결혼하니까 때가 되면 애를 낳죠. 다 아버지가 되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답게 사는 아버지가 세상에 별로 없어 문제가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뭐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우리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현장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쳐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세상은 심히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것을 보아, 세상은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어디가 살길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코앞에 닥친 위기 앞에서 경고도 받지 못하고, 죽음의 길이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 인줄 모르고 달려가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소금처럼 빛처럼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희망도 기쁨도 생명도 없는 곳, 영원한 멸망만이 가득한 세상임을 말씀해 주시고 동시에 바로 그러한 세상이 우리가 소금처럼 빛처럼 살아야 할 현장, 사명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백성들입니다. 이 답답하게 닫혀있는

세상에 생명과 영감을 공급해 주는 백성, 다시 말해서 하늘이 열리는 체험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소금을 잘 아시지요? 소금은 짠맛이 특징입니다. 그 짠 맛 때문에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그 당시 지중해 연안만 해도 온도가 꽤 높은 지역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냉장고도 없던 시절, 식품을 오래 보관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금만 넣어 놓으면 적어도 한두 달은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늘의 태양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소금이다. 하는 말을 할 정도로 소금을 무척 아끼고 귀히 여겼다고 합니다. 썩지 않게 하는 이 방부제의 특성은 마치 예수님을 잘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끼치는 감화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 세계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어만 줘도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짠맛이 들어가서 고기나 음식물에 신선도를 유지하여 썩지 않도록 하듯이 우리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우리를 통해서 내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때문에 다른 사람이 좋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어딘가 다른 데가 있어. 나도 좀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네. 하는 감동을 받습니다. 어떤 면에는 소극적이긴 하지만 조용히 다른 사람에게 짠맛을 내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가정 안에 이런 사람이 한두 명만 있어도 그 가정에는 절대 사고나지 않습니다. 직장 안에서 이렇게 짠맛을 가진 사람 얼마만 있으면 그 직장은 영적으로 어두워지지 않습니다. 더 나빠지지 않습니다.

빛은 무엇입니까?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 가운데 있는 것을 환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빛은 그 특성상 굉장히 직선적이고 적극적입니다. 어두움 앞에서 머뭇거리는 빛을 우리는 본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세상의 빛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고, 예수님 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열려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대신 그 빛 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의 빛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양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예수님의 달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8절-9절에 참 소중한 말씀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너희가 누구입니까? 예수 믿는 우리 모두입니다.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를 빛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빛인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보고, 우리의 의로운 행동을 보고 세상이 우리를 빛으로 본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 모두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물론 자신이 볼 때 내가 무슨 소금이냐 빛이냐, 냄새만 안 나도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크게 보시는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사는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하나를 위해 십자가의 희생을 쏟으신 주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우리는 이 세상을 보아야할 것입니다. 요3: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에 있는 수많은 그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먼저 믿은 우리들이 이 땅을 회복 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이 세상 앞에 내가 가진 맛, 내가 가진 빛을 토해내야 합니다. 얼마 전, 이상 기온으로 인해 청정 해역으로 불리던 남쪽 바다에 적조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뭐 순식간에 바다가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바다를 살리기 위해 황토를 살포하는 배가 쉴새 없이 뿌려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여러분! 무엇보다 이 세상 앞에 내가 가진 맛, 내가 가진 빛을 토해내는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부패를 막는 소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그 자체가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 가장 짠맛을 낼 수 있습니까? 전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언제 강한 빛을 불신자들의 세계에 비칠 수 있습니까? 예수 믿으라고 말할 때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전도는 소금을 많이 만들어 내는 생산 작업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믿게 했다면 그 사람이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면 그 사람이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이 땅에는 소금은 많아지고 빛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대단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전도한 그 한사람이 주님 앞에 바로 세워질 때 이 땅은 그 한사람의 가치만큼 멋지게 바뀔 것입니다.

보세요. 얼마 전 우리가 몽골에도 다녀왔지만, 한 사람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초원에서 짐승을 먹이며 한가로이 지내던 소수의 부족을 역사상 가장 큰 대국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던 것은 한 사람, 징기스칸의 영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영향력이 사라지자 몽고는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 유목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뚝 선 그 어떤 인물도 그 '한 사람'을 발견하고 품어서 시대 앞에 내놓는 헌신된 사람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을 때 "너희는 세상에 빛이야,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야"를 들었던 그 제자들은 더 이상 세상에 휘둘려 살지를 않았습니다. 비록 갈릴리 어부로 세상 앞에 멸시, 천대를 받는 그들이었지만, 성령을 체험한 그들이 움직이는 곳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 줄 수 있는 영적인 권세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오늘날의 평범한 교회가 수백 년이 걸려도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선교의 업적들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수많은 회의와 토론이나 많은 물질로도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이 세상의 변화를 그들은 변화된 교회 속에 내재하는 영적인 권세를 통하여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거절하고 복음 진리를 농담처럼 여기는 이 교만한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버릴 수 없는 세상,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주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교회는 도대체 무엇이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의 구원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로서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한번 이 교만한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 세상을 즐거워하고 거리로부터 멀어진 세상을 인하여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플로렌스에서 있었던 '허영의 화형식'이라고 불리워지던 종교개혁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그는 말씀과 함께 하는 영적인 권세를 설교 속에서 혁혁히 드러내 보여 주었던 종교개혁 이전의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말씀 선포를 듣고 플로렌스의 시민들은 회심하였으며 도시 전체는 그 설교자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의 설교는 한 주간동안 그 도시의 가장 커다란 뉴스거리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건달들은 사라지고 감옥은 텅텅 비었으며, 부랑아들의 유행가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백성들은 그 동안 몰두해 오던 허영과 사치를 버렸고 음탕과 광란의 상징이던 사육제의 행사는 그쳤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가발과 가면, 세속적인 책들과 음란한 그림들을 태웠습니다. 사람들은 찬양을 부르며 골목골목 다니며 마차를 끌고 집집에서 이런 쓸데없는 것들을 거두어들였습니다. 플로렌스 시민의 관심은 세속적인 것에서 멀어졌습니다. 헛된 것들은 거두어졌고 세속적인 책들과 음란한 그림, 유치한 가면과 유행하던 가발 같은 것들을 불태우기 위하여 모았습니다. 거두어들인 물건을 팔각형의 파라밋 모양으로 쌓았습니다. 둘레가 72미터이고 높이가 18미터였다고 하니 그 산적함은 가히 산더미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각성한 이 백성들은 찬양을 부르며 종을 치며 여기에 불을 붙였습니다. 때는 1497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플로렌스의 '허영의 화형식'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부흥은 교회를 권세 있게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부흥이 아니고는 세상을 향해 교회가 영적인 권세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부흥을 경험한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위대한 능력으로 세상을 근본적으로 이렇게 고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을 맞이한 시대에 그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합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게되어 버리움을 당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힘을 당할 뿐입니다. 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조금만 잘 하면 금방 소문이 납니다. 조금만 무언가 잘못 하면 금방 냄새가 나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노출성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좋아, 어디 가도 우리 자신을 숨길 수가 없다면 빛으로서 살자. 소금으로서 살자.' 아멘!

그러면 굉장한 파급효과를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으로서 소금으로서 아름다운 환상을 가집시다. 이 민족을 다시 일으켜 도덕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환상을 가집시다. 우리 국민 전부를 복음화시키겠다고 하는 환상을 가집시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앞에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성교회의 성도가 이 시대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환상을 가지고 우리 모두 다시 세상을 향해서 달려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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