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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부르시는 성도의 별명 (사 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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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부르시는 성도의 별명 (사62:1-5)

이 시간 [하나님이 부르시는 성도의 별명]이라는 제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모르시는 분 없으시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애칭이 있다는 것을 몇 가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4가지로 별명 지어 불러 주고 계심에서 그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성도의 별명은 면류관입니다.

사62:3에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면류관도 보통 면류관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면류관이라 했는데, 여호와의 손의 면류관이고, 하나님 손의 왕관입니다. 면류관이란 왕이 쓰는 관으로 우리를 최고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장 자랑스럽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면류관이라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집시다.

사도 바울이 사랑했던 교회 중에 빌립보 교회가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이 구구절절 사랑과 애정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4:1에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귀하면 면류관이라고 불렀겠습니까?

정말이지 하나님 앞에 우리 성도들만큼 귀한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물보다 귀하고 천사보다 귀하고 예수님이 가장 귀하신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하신 하나밖에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시키시고 구원하신 우리들 아닙니까? 자녀가 부모의 귀한 존재이듯 성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왕의 면류관처럼 자랑스런 존재들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저에게 자랑스런 면류관과도 같습니다.

2. 성도의 별명은 헵시바입니다.

4절에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헵시바란 ‘나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시면 기뻐서 견딜 수 없으시답니다. 이것이 바로 헵시바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손자손녀들 하루에 10번 보셔도 싫지 않지요? 아니 100번 보셔도 그러실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기쁨 즉 헵시바입니다. 어느 은퇴 목사님 보니까 “할아버지 ~” 하고 핸드폰으로 전화 오면 입이 함박만 해지더라고요. 대학 다니는 할아버지 사랑하는 손녀의 재롱이 너무나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헵시바입니다. 저도 간혹 중국에 있는 큰 애와 통화를 합니다. 핸드폰으로도 통화하고 인터넷을 통해 화상으로 서로 얼굴을 보며 통화하는데 자주 보아도 자녀이기 때문에 싫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헵시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세요. 습3:16-17에 보면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그러므로 이제는 실망하여 축 쳐져서 다니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쁨 헵시바이기 때문입니다.

3. 성도의 별명은 쁄라입니다.

4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쁄라란 뜻은 ‘나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헵시바가 사람을 향한 애정이라면 쁄라는 땅을 향한 애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이 쁄라가 된 것은 사랑하는 자녀들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해석법으로 보면 결국 그 땅도 우리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래서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고 인격적인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혹시 사람들이 사랑해 주지 않습니까? 남편의 사랑이 아내의 사랑이 부족합니까? 자녀의 사랑이 부족합니까? 사랑한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 가지고도 넘칩니다. 고후1:5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쁄라이기 때문입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그 사랑의 노래는 다 우리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4. 성도의 별명은 신부입니다.

5절에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신랑에게 신부처럼 귀한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신부로 삼아주셨습니다. 신부란 최고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을 위한 순결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신의 반려자로 보시고 부정한 우리를 순결한 신부로 보십니다.

라만차의 사나이라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라만챠의 사나이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창녀를 “오 나의 아름다운 귀부인이여”라고 찬양했습니다. 창녀는 놀라 “날 귀부인이라 말하지 마세요. 난 땀내 나는 더러운 알돈자(창녀)예요. 난 담배꽁초와 같은 여자예요. 뭇남자들이 내게서 쾌락만 빨아먹고 헌신짝 같이 버리죠.” 그러나 라만챠의 사나이는 끝까지 그녀를 신뢰하고 믿어주며 알돈자가 아닌 둘친네아(정결한 귀부인)임을 강조합니다. 뮤지컬의 종막에 사나이는 실연으로 인하여 병들어 누웠습니다. 바로 이 때 아주 아름다운 스페인 아가씨가 그의 병상으로 다가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여자는 그 옆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 이름은 둘친네아예요.” 전에 창녀였던 이 여자는 마침내 자기를 사랑하는 라만챠의 믿음대로 자기 자화상을 바꾸었고 그 자화상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올 때 고멜과 같은 자라고 고백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사랑스런 신부입니다. 그리고 신부답게 살아가세요. 우리 성도들의 모습을 성경으로 보여드릴까요? 계21:2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 영광스런 모습이 우리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꾸며도 다 꾸밀 수 없는 그 영광스러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만큼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엡5:25-27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에스더 왕비의 그 아름다운 모습은 영적으로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왕이 에스더가 구하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그렇게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십니까?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면류관같이, 헵시바 같이, 쁄라 같이, 신부같이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진실로 예배하며 섬기시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뜨거운 사랑을 성령으로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춤을 추며 살아도 모자랄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날마다 기쁨으로 사시고 더욱 사랑하고 충성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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