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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노래를 회복하자 (사 4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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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예외 없이 국가적인 꿈을 가지고 있는데 막연한 먼 날의 꿈이 아니라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 팀이 내일 벌어질 2006 독일월드컵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므로 16강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꿈은 이미 이루어졌거나 현실에 다가왔을 때 이미 꿈이 아닙니다. 꿈은 과거에 있거나 현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미래입니다.우리가 어떤 꿈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 됩니다.꿈은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가정이나 국가나 교회에도 있어야 하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네덜란드 가수 더블디(D)는"우리들의 꿈(Our Dream)"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나는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고 싶어요? 하늘을 향해 팔을 뻗어 하늘을 만지고 싶어요. 눈을 감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이제까지 찾던 것을 찾았어요. 그리고 나의 꿈속에서 꿈을 가지고 살아요? 이 황홀함 속에서 나의 손을 잡아요."

꿈은 이루어진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본 이상 중 일부입니다. 이상은 구약성경 여러 곳에 환상, 또는 꿈, 계시 등의 표현으로 나타나 있는데 요즈음은 흔히 비전이란 말로 많이 사용합니다. 이상은 독특한 한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그것은 초자연적 계시라는 점입니다. 초자연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 의해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보고 싶어서 이상을 본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은 단순한 인간의 꿈이나 계획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한 계시라고 하는 것은 이상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상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계획, 심정, 뜻을 전달하십니다.

시대적 상황

이사야는 당시 국제정세를 관통하던 대 정치가요 시대의 정황을 누구보다도 잘 읽고 있던 선견자였으며 당시의 세계와 역사를 내다보는 안목은 주전 8세기경 이사야만큼 높고 깊고 넓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웃시야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우습게 여기고 그들의  충고를 거부하고 교만하게 살았던 대표적인 왕인데 그는 결국 문둥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신권을 무시했고 자신들의 욕구에 대한 이기적 인권을 강조했던 시대였습니다. 그 결과로 이들의 신앙은 변질되었고 삶은 방종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너지던 시대였습니다. 

이상을 보이시는 하나님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한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사야가 본 이상은 19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이것이 이상을 주신 목적이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 방종과 영적 타락에 허덕거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환상을 가지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따라 방종과 타락의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백성들이 무너져 갈 때, 그 절망과 어두움의 땅 한 가운데서 당신의 택하신 선지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하늘의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된 그들의 안타까운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활동을 계속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타락하였고 하나님을 향해 배반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붙드시고 그를 통해 그 민족 공동체의 장래를 말씀해 주시며 그 백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환상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사야가 살던 시대와 문화는 달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이상으로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방종의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 이사야의 시대

성도들의 영적 삶은 어떻습니까? 형식은 있으나 하나님께로 온전히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고 살아가는 허한 신앙생활이 만연하지 않습니까? 교회에는 나와도 영적 사모함은 없고, 하나님을 향해 예배는 드리되 냉랭함이 감돌지 않습니까? 예배도 참석하고 헌금도 드리고 봉사도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분히 습관적이고 맹목적이지 않습니까? 

거기에다 교회마저도 방황합니다. 교회는 분명 목적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시간이 되면 모이고, 절기가 되면 예물을 드리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종교적 활동을 진행하는 것만으로 교회의 기능을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이상에 사로잡혀 그 이상을 따라 움직이는 이상 공동체, 비전을 따라가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오늘 교회와 성도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이상을 보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함께 방황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잠들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결코 신랑이 오시는 시간에 자고 있던 미련한 다섯 처녀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잠든 교회가 세상을 깨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잠든 성도가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잠든 지도자가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여호와의 이상, 새로운 환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시대를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고 세상에서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으며 세상에 휩싸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서 느껴지는 영적 무감각과 고통스러운 영적 수면상태, 그 진원지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의 무능력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교회들이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을 보이게 될까요? 이상의 부재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빈약함과 영적 빈곤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어둡고 험악한 세상에서 진실 된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진 직분으로는 안 되고 회의로도 안 되며 교회 생활의 경험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보는 특별한 영적인 체험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생명을 잃어 가는 교회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이상입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가 한 말을 가슴에 담아 보십시오. "불은 자극을 받거나 밝혀지면 그렇지 않을 때 보다 열을 더 많이 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가슴에 더 큰 불꽃을 일으킨다."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이상이 보여질 때 우리의 가슴은 뜨거워 질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불붙는 삶이 될 것입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18-19절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 어두움과 목적을 망각한 방종의 자리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새로운 일을 하시기를 원하시고 그들 가운데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새로운 일이란 무엇입니까? 광야에 길을 내는 것이고 사막에 강을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사야 시대로부터 200년 후에 이루어질 바벨론에서의 해방을 예언한 역사적인 예언이지만 이것은 신약시대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로운 복음운동과 축복의 삶을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축복은 사막에 강을 내심과 같고 광야에 길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은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을 나타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이 이상을 보게 되기를 소원하며 새로운 환상을 보게 되기를 소원하고 이 축복의 환상을 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삶의 자유로움은 마음의 선택

삶의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삶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의 태도이며 마음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자유로움을 원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 재물이 많아질수록, 내 지위가 높아질수록, 내 삶의 경륜이 커질수록, 더 큰 자유 더 높은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삶의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환경이나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단순한 마음의 선택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어떤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은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 현실에 대한 속상한 일들, 사람에 대한 섭섭함들, 병마에 대한 섭섭함들 다 접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아주 힘들게 사는 사람, 인생을 아주 복잡하게 사는 사람, 인생에 여러 사람을 흔들어 놓고 있는 사람을 보면 모든 인생은 이래야 된다, 모든 사람이 저래야 된다는 어리석은 자기 판단이나 어리석은 자기편견의 결과일 뿐입니다. 

마음의 노래를 회복하자

마음의 생각만 바꾸면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지옥과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오늘 내 형편없는 현실을 다시 볼 수 있는 내 마음의 능력만 회복하면 변화는 즉시 옵니다. 세상의 변화는 천천히 오지만 내 마음의 변화는 즉각 올 수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용기까지 상실한 사람이고 제일 가난한 사람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성령의 능력을 붙들고 마음을 변화시키시기 바랍니다. 살며 사랑하며 인생에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사람은 누가나 세상을 자신의 틀에 맞추어서 조종하려는 어리석음과 욕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자신의 잣대대로 움직여지기를 원하는 어리석은 반응이 있습니다. 사람이 상황을 통제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 상황에 대처하는 자신의 태도, 자신의 마음가짐, 자신의 방법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하는 마음에 대한 발견입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그 기가 막힌 일을 내가 통제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대응하는 내 마음의 태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어떤 사람은 승리했다고 두 손을 들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패배했다고 절망의 한숨을 쉬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 없어지고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가 있지만, 사람들이 더 이상 꿈을 꾸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내일을 향한 비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없는 노래를 악보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머리에 담겨 있지 않는 시상이나 이야기를 시나 소설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마음의 노래를 잃어버렸습니다. 머리속에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다 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 노래

훌륭한 가수는 악보를 보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서전을 노래합니다. 자기의 실패, 성공, 뉘우침과 기쁨 그리고 참회와 결심을 모두 묶어서 부를 때 찬송가나 성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네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앙의 간절함이 찬송 속에서 피어날 때 비로소 성가가 되며 그것이 '새 노래'가 됩니다.

찬송을 흔히 세 가지의 힘으로 말합니다. 위로 올라가는 힘, 나의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힘, 밖으로 뻗어 가는 힘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를 주님 가까이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는 찬송은 위로 올라가는 힘이고, 또한 나에게 위로와 평화와 회개와 기쁨과 결심과 용기를 일으켜 주는 찬송은 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힘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힘으로서의 찬송을 '신앙의 길잡이'라고 한다면 내 속으로 들어와 기쁨과 용기를 주는 찬송은 소망을 향한 길잡이입니다. 믿음과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찬송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사랑의 길잡이' 역할인데 이것이 밖으로 뻗어 가는 힘입니다. 찬송은 슬픈 마음을 위로하고, 우울할 때 마음을 위로해 주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며, 지저분한 생각들을 정돈해 줍니다. 예배시간에 찬송을 힘차게 부르는 사람은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된 사람이며 예배의 감격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은혜가 넘치기를 바란다면 열심히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평범과 비범의 차이

꿈은 내일을 살아가는 양식과 같은 것이며, 꿈은 호흡을 원활하게 해주는 산소와 같은 것이며, 꿈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육교와 같은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한시도 꿈을 가지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평범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꿈이 평범한 인간을 위대한 사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범과 비범의 차이는 꿈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새로운 꿈을 품고 인생을 살아가면 인생의 새 장이 열릴 것이고 꿈이 없이 살아가면 그 사람은 똑같은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는 테이프 레코더와 같습니다. 우리의 두뇌는 5가지 감각. 즉 후각. 시각. 청각. 촉각 그리고 미각을 통하여 경험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녹음합니다. 사람들의 말도 모두 녹음합니다. 사람들의 두뇌는 정말로 놀라운 녹음기입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진실 된 것이든 거짓 된 것이든 모두 녹음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거의 가정환경, 문화적 배경, 종교적 배경에서 녹음된 잘못된 인식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스스로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받았던 상처나 아픔이 녹음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도 모르는 중에 계속 내 생활에서 재생이 됩니다. 거절당한 상처가 재생되어 겉잡을 수 없는 분노에 쌓이게 됩니다. 버림당한 상처가 녹음된 사람은 항상 또다시 버림당할 두려움이 그를 지배합니다. 아주 불신앙적인 마인드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불신앙 문화와 불신앙적인 매너가 뛰쳐나옵니다. 인생은 무서운 녹음기입니다. 나의 과거를 녹음하여 어둡고 아프고 괴롭던 과거의 상처를 반복하여 재생하므로 나를 무너지게 합니다.

이제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이 낡아빠진 녹음 테잎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바꾸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의 테잎으로 바꾸십시오.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바꾸는 것보다 더 선명한 그 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과 풍요를 경험했던 그런 신앙적 기억과 풍습과 행동과 습관으로 바꾸십시오. 한마디로 우리의 생각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축구공 하나가 이 땅에 대한민국을 연호하게 하고 전 국민을 하나로 묶고 수백만의 응원단이 우리나라를 한 마음 되게 하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 이 땅과 세계의 열방이 축구를 통하여 방방곡곡에서 복음의 열기를 뒤덮는 날을 소망해 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안에서 마음속에 간절히 열망하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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