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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우는 신앙 (창 1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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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결혼 후에 아내와 함께 커피를 즐기는 습관이 생겼다. 한번은 StarBucks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컵에 적혀 있는 좋은 글 하나를 읽게 되었다. StarBucks회장은 좋은 christian이었다. “You are what you cannot let go.”(당신이 놓지 못하는 것이 바로 당신을 말해주는 것이다.)라는 글이었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서 놓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의 가치관이며 나의 자아관이라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겠다고 말하면서도 주님말고 놓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이것은 문제이다. 누가복음14장26절을 보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 말씀은 정말로 섬기고 있는 부모와 가족들을 등한시하여 미워하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가족을 귀하게 돌보며 형제와 자매를 사랑해야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하여도 주님의 경쟁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제자도이며 제자들이 살아갈 길이다.

빌립보서3장5절-8절을 보자.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 인 중의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 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물론 버릴 만한 것과 배설물들은 무조건 버려야하지만 사도 바울의 고백은 중요한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예수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심령을 예수 그리스도로 완전히 채우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과 같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예수가 가장 고귀하고 첫째가 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모두 버린다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이 이것을 강조해주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아브라함과 롯이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재산을 함께 이끌수 없었다. 그들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기도 하고 여러가지 부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흩어지기를 요구하며 롯이 차지하는 곳의 반대쪽을 차지하겠다고 양보하고 있다. 그래서 롯은 비옥한 땅을 차지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건조한 땅으로 옮기게 된다. 이것이 오늘의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단순한 내용이 아니다. 롯과 아브라함의 대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롯이 택한 소돔은 죄악이 심히 관영한 곳이었고 그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곳을 택한 이유는 그의 마음 속이 아직 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그 무엇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선택은 우리의 영안과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왜 롯은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의 마음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져 있었고 인생적으로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죄악이 관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돔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과감하게 모든 것을 ‘let go’ 하였다. 그것은 스스로 그의 마음을 비웠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는 자유롭게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도 한 때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애굽을 선택한 적이 있었고 그곳에서 실수도 하였지만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우리의 성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후로는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창세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주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어떤 moment를 택하여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며 과감하게 ‘let go’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채우고 나니 축복의 땅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을 영원한 목적이며 기업으로 섬기며 살았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어린 시절 자랐던 동네를 가 보았다. 신기하게도 그 당시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전에 살았던 집을 들어가 보았다. 참으로 감개 무량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당시에 그렇게 넓어 보였던 마당과 그렇게 높아 보였던 담이 무척 작고 낮아 보였다. 그 당시에 다니던 학교도 가 보았는데 그때에는 엄청나게 넓어 보이던 운동장이 그렇게 작고 좁아 보일 수가 없었다. 갇혀 있을 때에는 커보이고 높아보이던 것들이 자유해지니 작고 낮아보이는 것이다. 정말로 높고 크고 넓게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아브라함이 소심했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과 축복을 볼 수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Let go’하는 신앙을 갖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비우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비록 중립적인 것이라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모두 비우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자신들을 채우고 있는가. ‘Let go’하지 못하고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let go’하겠다고 다짐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두가지를 교훈 삼아야 한다.

(1)하나님 자신으로 우리가 채워질 때에 비우는 신앙이 가능하다.
3,4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다시 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니 비로소 전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정말로 비우는 신앙과 훌륭한 영성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창세기15장1절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신다. ‘I am your great reward.’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를 축복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복이라도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깨달으니 자신을 완전히 비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의 금메달이라면 은메달과 동메달이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다른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다. 찬송가492장을 보자.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또한 주님은 수고하고 짐진 자들에게 모든 짐을 자신에게 내려 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이민생활이 힘들 때가 많다. 주님 앞으로 나와서 주님께 내려 놓으라는 말씀을 기억하자. 보물과 축복 앞으로 나아오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요구하시며 이것이 쉽고 가볍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멍에 자체는 무겁고 부담이 되지만 주님과 함께 하면 쉽고 가볍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서 지우신 멍에이다. 주님의 멍에가 가벼운 이유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가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면 그곳에 주님의 은혜가 있다.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욕심이 있다. 상식과 계산이 늘 앞서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upgrade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아브라함의 높은 신앙수준을 볼 수 있다. 이번에 고향을 돌아보며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살던 동네가 가까이 오면 올수록 잔잔한 평온함이 느껴졌다. 30 여년 전을 돌아보니 신비한 평온함과 안정감이 온 몸을 감싸는 듯 하였다. 우리 주님가 천국을 기대하면 억누르지 못하는 기쁨과 평온이 밀려오는데 그것은 바로 궁극적인 본향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가슴을 마주 대하고 그 분의 얼굴을 바라다 보게 될 것을 기대하니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밀려오는 것이다

(2)형제 사랑으로 우리가 움직일 때에 비우는 신앙이 가능하다.
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롯을 향하여 ‘우리는 한 골육이라’고 말한다. 한 형제이니 다투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14장에서 롯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니 그를 위해서 나아가 싸우기도 하였다. 아브라함이 형제의 사랑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비전을 보며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골육의식’이다. 이것은 요셉에게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후에도 형제들을 보고 ‘우리는 골육이니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자’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은 명백히 ‘하나님을 사랑한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랑으로 채워질 때에 비로소 ‘let go’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독생자까지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으로 우리도 본질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 비본질적인 것을 우리의 마음과 심령으로부터 밀어내고 오직 본질적인 것으로 가득 채우자. 동부에 살고 있을 때에 여유있는 집으로 이사한 적이 있었다. 모든 가족이 들떠 있었다. 아주 신실하고 성실한 집사님께 융자를 부탁드리고 좋은 이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집사님은 나름대로 목사를 위해서 좋은 이자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이자는 기록적으로 낮은 상태였기 때문에 내게는 아주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다리다보니 조금씩 이자가 오르고 그 집사님은 조그만 더 기다리고더 했다. 이자는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였다. 결국 처음에 기대했던 수준보다도 상당히 높은 이자가 불가피하게 되고 내가 지불하여야할 금액은 처음보다 많이 높아지게 되었다. 순간 섭섭하기도 하고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나하며 시험에 들 뻔하였다. 이런 비본질적인 일 때문에 성도에게 섭섭한 감정이 들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사사로운 감정때문에 성도를 사랑하고 목양해야하는 본질적인 일을 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하고 축복해야하는 성도를 사랑하고 축복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본질적인 것을 잃게 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는 것이다. 비우는 것이 본질적인 신앙이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모습처럼 본질적인 사랑으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해야 한다. 여러분은 무엇을로 여러분의 삶을 define하고 있는가? 비본질적인 것으로 채우려하지 말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으로 채워서 형제사랑을 이루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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