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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 삭개오!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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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오늘 삭개오라는 한 사람의 모습을 통해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라

미국 타임즈 창간자 헨리 루스의 부인 클레어 부츠 루스는 “한 사람의 인생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단 한 줄의 문장으로 기억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컨대 조지 워싱턴은 ‘미국 독립의 아버지’로, 링컨은 ‘노예 해방의 기수’로, 마틴 루터 킹은 ‘흑인 인권 운동의 선구자’로 기억됩니다. 루스 부인의 이 글을 자기의 자서전에 인용하며 가장 괴로워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미국을 건설하기 위해 모든 노력과 헌신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중도에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성공적인 성과들은 묻힌 채 ‘임기도중 사임한 미국 최초의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을 곤혹스러워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단 한 문장의 인상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진실해’ ‘그 사람은 속이 넓어’ 아니면 ‘그 사람은 우유부단하다’ ‘그 사람은 사기꾼이다’ 그런 인상 비평이 우리의 인생에 대한 평가가 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의 주인공 삭개오도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단 한 문장이지만 한 인간에 대한 소개 치고는 비참합니다. ‘의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선행을 많이 한 사람’ 등의 평가가 아니라, 세리장이요 부자라는 평가입니다. 세리장은 세리 중 우두머리, 곧 세무서장이란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세리는 민족반역자 취급을 당했습니다. 이방인인 로마에 충성하고 또 같은 동족의 물질을 수탈해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은 동급으로 취급되었습니다. 7절에서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지요.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 부자라는 말도 긍정적인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은 세금의 일부를 빼돌려 쌓은 불의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돈만 아는 수전노’ 정도의 평가입니다. ‘부자’ 되기에 안달이 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아마 듣고 싶은 호칭일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도 부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지만 자기 인생을 ‘부자였다’라는 한 문장으로 평가받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무언가 보람된 일을 했던 사람으로 기록되길 원하지 물질의 노예가 된 듯한 이런 평가를 받기는 싫을 것입니다.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는 이 평가는 지금까지의 삭개오 인생에 비추어서는 자기 묘비명에 쓰일만한 문장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 나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묘비명을 바꾸길 원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찾은 삭개오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묘비명이 바뀌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9절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9) 물질에 매여 살던 인생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을 받은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에 대한 평가를 바꾸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하늘의 사람들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땅의 가치관을 좇아서 땅의 것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합니다.

삭개오의 한 예지만 우리 인생에서도 결정적인 변환의 시기가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수정해야 할 때가 한 번은 있습니다. 아마 중년기의 나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삭개오 전반전 인생은 비록 욕은 들어먹었을는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성공했다 할 것입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았으니까요. 그러나 인생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왜 사느냐?” “왜 돈버느냐?”에 대한 진지한 물음입니다. 인생 후반전으로 갈수록 이 의미란 것이 중요해집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이런 인생의 싸이클을 태양의 궤도에 맞추어 설명했습니다. 인생은 마치 태양이 동쪽에 떠서, 한낮에 정점에 이르고, 이후 서쪽으로 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태양이 그리는 이 180도 반원의 정점을 기점으로 인생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됩니다. 등산할 때와 하산할 때 목표와 사용되는 근육이 다르듯이 인생 전반부의 삶의 양식과 후반부의 삶의 양식이 다릅니다.

인생 전반부는 성공과 성취가 목표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배우고 일을 하는 이유는 성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거기에서도 정상의 자리에 앉기 위해 안간 힘을 씁니다. 태양이 정점에 이르듯 인간도 정상의 자리에 가까이 갈수록 성취감이 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정상에 가까이 갈수록 허탈감과 불안감도 밀려옵니다. 이게 다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아마 부자요 세리장인 삭개오도 나름대로 성공은 했지만 이 게 다인가 하는 고민에 빠져 밤을 고박 지새웠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인생의 후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때는 삶의 의미와 이타성, 공동체성이 중요해집니다. 전반전을 사는 사람에게는 성공과 성취가 없으면 공허합니다. 그렇지만 후반전을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가 있을지라도 공허합니다. 후반전에서의 만족은 자기 시간과 재물을 들여 다른 사람을 도울 때 발생합니다. 전반전에는 일이 중심이었다면 후반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이 후반전의 인생에서 실패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추해지고 노인의 지혜와 여유를 잃는데, 여전히 전반전의 삶의 양식인 이기적 삶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반전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진리를 깨닫는 때입니다. 삭개오가 지금 방황하면서 찾고자 했던 삶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인생 방향을 바꾸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삭개오와 예수님의 만남

삭개오와 예수님의 만남의 장면은 약간은 코믹한 만남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삭개오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많아서요, 둘째는 키가 작아서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다지만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키가 작으니까 더 쉬울 수도 있지요. 그러나 못 들어갔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막았을는지도 모릅니다. “비열한 매국노, 감히 어딜 들어오려고 해” 하며 사람들이 밀쳤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삭개오 본인이 주저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 포기한 것이죠.

키가 작다는 것은 신체적인 특징을 말한 것이지만 이는 삭개오의 심리를 반영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옛날부터 키 작은 사람은 무시를 많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강한 것을 보이기 위해 독한 사람이 됩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은 이런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키가 매우 작았다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155cm 였다고 합니다. 한 번은 적군과 싸우게 되었는데 적군이 그 작은 키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조롱했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비록 땅에서부터 재는 키는 너보다 작지만 하늘로부터 재는 키는 내가 더 크다”하며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삭개오가 민족이 싫어하는 세리의 길을 갔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일 수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길이 막히자 다른 루트를 통해서 자기실현의 기회를 잡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결과 재물은 모았지만 민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이지요. 그의 작은 키는 신체적 특징 외에 이런 그의 정신 상태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과의 만남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삭개오의 눈에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서 있는 뽕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뽕나무는 우리나라 뽕나무를 연상하면 안 됩니다. 무화과나무의 일종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도 성지순례 가면 삭개오의 뽕나무라 하여 어른 두세 명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는 큰 아름드리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코믹합니까? 키가 작고도 뚱뚱한 어른이, 그것도 돈도 많고 나름대로 세리들의 지도자인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으니 말이지요. 성경에서 이런 희한한 모습은 좀처럼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 만큼 삭개오 심정이 다급했다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 삭개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니고는 이런 행동을 못하지요. 사실 어른들 중에서도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고 또 나약해 보이면 당하니까 자기 내면을 속이고 사는 사람들이지요. 겉으로는 무섭게 보여도 그 안에는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동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삭개오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보자 자신을 감추었던 벽이 허물어지고 순수한 마음이 솟아 낫습니다. 그래서 체면불구하고 뽕나무에 오른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기 위해서 체면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이라는 아무것도 아닌데 체면 때문에 진리를 붙잡지 못합니다. 마음이 단순한 사람이 진리를 찾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면서 너무 기뻐서 옷이 벗어질 정도로 춤을 추었습니다. 이 정도의 단순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즘 매일 새벽기도에서 시편을 묵상하고 있는데 다윗의 어린아이다운 단순함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원수가 있으면 “하나님 저 원수를 가만놔 두지 마십시오.”하고 기도합니다. 자기가 힘들면 “하나님 저 죽겠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하고 매달립니다. 왕의 체면이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 얼마나 점잖게 기도하려 합니까? 진짜 속마음은 숨기고 고상한 언어로 기도하려 하고, 하나님의 의가 어쩌고 하며 기도하는데 기도는 솔직하고 단순한 게 좋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 한마디면 족합니다.

열왕기서에 보면 아람이라는 나아만 장군이 있습니다. 대국의 큰 장수입니다. 이 사람이문둥병에 걸렸을 때 엘리사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엘리사가 요단강물에 들어가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까 나아만이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때 나아만 장군이 했던 말이 재미있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왕하5;11-12)

안수를 하는 방식이든지, 아니면 더 크고 위대한 강에 가서 씻으라 하지 하필 조그만 요단 강이냐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종들의 설득에 그 체면을 접고 요단강 물에 일곱 번 씻자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한 것이 있다면 체면불구하고 매어달리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이 말씀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습은 마치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거지와 같습니다. 거지처럼 매어 달릴 때 주님께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 삭개오가 접근할 때부터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지만 관심은 삭개오에게 있었습니다. 삭개오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뽕나무에 올라 간 삭개오를 보고 예수님은 외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러 올라가는 길입니다. 바쁘고 중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의 집에 머무르시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세계를 짊어질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

예수님의 이 한 마디 말에 삭개오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진정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을 받아줄 분을 만난 것입니다. 6절의 삭개오의 태도를 보십시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그냥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급히’ 내려옵니다. 주님도 삭개오의 마음을 아셨는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즐거움이 넘칩니다.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이끌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고 있는 삭개오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 자기집 한 번 오픈하지 못하고 인색했던 사람이 처음으로 손님을 맞을 때의 그 들뜬 마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삭개오의 긴 인생에 비하면 짧은 만남이지만 이 만남은 결정적이었습니다. 만남은 단순히 시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남은 질입니다. 짧지만 강한 인상을 주는 만남이 있습니다. 삭개오와 예수님의 만남이 그러했습니다.

삭개오의 회개

이런 만남이 있자 삭개오는 그 인생의 목표와 방향마저 바뀝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삭개오가 먼저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드디어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앞에 있었던 18장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간에 부자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8:24,25) 그만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삭개오는 부자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누가는 특히 물질에 대한 태도를 중시합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들이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6:19-31)가 대표적입니다. 부자는 호화로이 연락하다가 뜨거운 지옥 불에 들어가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속에 들어갑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고 흥청망청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6-21)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다고 하지만 세상 기준으로 볼 때는 현명한 부자입니다. 소출이 많으니까 곡간을 더 크게 짓고 그 안에 곡식을 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노후까지 완벽한 대비를 해둔 현명한 사람입니다. 이런 부자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리석다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죄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증거 하는 물질에 대한 자세는 분명합니다. 누가는 부자가 죄가 아니라 그 부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사치하거나 쌓아두고 있는 것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않은 것이 죄입니다. 성경의 관점도 그렇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받은 부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죄가 됩니다. 부의 대한 태도는 이렇게 정의하면 좋습니다. ‘첫째 정당하게 돈을 버십시오.’ ‘둘째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셋째 그 부를 제대로 사용하십시오.’ 제가 성경에서 종합한 결론입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눈앞에 가난한 자를 보며 사는 것이 복입니다. 부자에게는 거지 나사로가 자기 집 앞에서 구걸하고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자기 부를 사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분단되어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가난한 북한 형제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국민 대부분이 분단의 사실을 잊으려하고 외면하려 합니다. 이데올로기로 덧씌워 자기 부를 가난한 북한 형제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막으며 왜곡되게 만듭니다. 그냥 순수하게 도와야 합니다. 저 거지 나사로를 도와주면 저 놈이 힘을 얻어 나를 해코지 할 수도 있다고 해서 방치하면 안 됩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 굶주리고 있는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든 방치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부자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물질을 내어 놓습니다. 이제는 소망을 성공에 두지 않고 의미에 두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소망을 물질에 두지 않고 예수님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삭개오와 같은 사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에 매여 있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요. 호주머니에 돈이라는 부적을 넣고 다니며 이것이 지켜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요.

예수님을 만나자 한 인간이 바뀌었습니다. 그가 부자에서 이제는 자선사업가로 변했습니다. 수탈자에서 정직한 공무원으로 바뀌었습니다. 근심의 인생에서 즐거움의 인생으로, 소외된 인생에서 이제는 당당히 사람들과 함께 사는 하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늘도 그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 만남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 마음의 문을 여는 자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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