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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제자가 되라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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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 한국교회!

최근에 발표된 2005년 인구센서스는 기독교계에는 충격이었습니다. 2005년 11월 현재 기독교 인구는 총 861만 명으로 이는 총인구 대비 18.3% 입니다. 천만 기독교인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훨씬 못 미쳤습니다. 더욱이 95년도에 비해 기독교 인구는 15만 명 정도 줄어든 결과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같은 기간 동안 천주교는 1995년 295만 명에서 2005년에는 514만 명으로 무려 219만 명이나 늘었다는 점입니다.

이번 통계는 한국기독교의 위기를 잘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늘 성장만 할 것 같은 교회가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20%의 벽을 돌파하기도 전에 쇠퇴기로 접어들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질적인 면에서의 위기는 누차 지적되어 왔지만 그래도 양적인 성장은 하고 있다는 것으로 자위해 왔는데 이제는 그 양적 성장마저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사실 20% 에 가까운 숫자도 적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갈수록 교회의 영향력이 상실되어 간다는 데 있습니다. 또 다음 인구 센서스 조사에서는 이보다 더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더 이상 매력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도덕적 감화력에서 모범을 보이지 못합니다. 물질만 밝히고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사람들이 천주교에 매력을 느끼고 개종을 한 결과입니다.

내적으로는 문화화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 한국의 주류 문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의 상당수의 지도층들이 기독교인 들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마치 우리의 품격을 높이는 하나의 계급처럼 되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은 고급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복음의 능력이나 전투성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기도 소리는 날로 작아지며 기도 시간은 날로 짧아지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바뀌는 감격적인 간증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복음이 능력을 상실한 때를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한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핍박받던 시대에는 복음의 능력이 날카롭게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주류 문화가 되면서 복음적 필요보다는 문화적 필요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것이 중세 기독교의 타락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해, 오늘날의 교회는 은과 금은 소유했지만 나사렛 예수의 능력은 상실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금 말씀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가 회개하고 고쳐야 합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기독교의 문제는 수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맛을 잃어버렸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많은 소금이 있어도 맛을 잃으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밟히고 짐 덩어리로 전락합니다. 한국교회는 다시 비록 소수일지라도 아주 짠 왕소금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왕소금들이 많을 때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

예수님의 관심도 이런 짠 맛을 잃지 않은 소금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최후로 전하신 말씀입니다. 19, 20절을 지상위임령, Great Commission이라고 말씀합니다. 한 개의 주동사와 3개의 분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동사는 ‘제자를 삼으라’입니다. 제자 삼기 위해서 모든 족속에게로 ‘가야’ 할 것이며,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역이 완료됩니다. 이 단계까지 가면 제자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서 세례 주고까지는 잘 하는데, 가르치는 단계에서는 좀 약하고, 지키게 하는 단계에서는 아주 약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도덕성 상실과 영향력 상실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공생애 사역 동안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이 바로 제자 삼는 사역이었습니다. 주님은 무리를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제자만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최후의 이 지상위임령을 듣고 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16절 보십시오. 유다를 뺀 열한 제자이지 않습니까? 마지막 유언 같은 명령이면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자기의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 앞에서 이야기하면 얼마나 멋있는 최후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무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분위기나 먹을 것에 취해 ‘왁’ 하고 몰렸다가도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이들은 쉽게 돌아서기도 잘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자들이 이들 무리들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마치고 천국에 가니까 한 천사가 물었습니다. “예수님 지상에서 무엇을 하고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심고 왔다네.” “그들이 실패하면 어떻게 합니까?” 천사가 묻자 예수님이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이분이 짧은 공생애에서 할 수 있었던 가장 지혜롭고 최선의 일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이 바로 마태입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썼는데 마태복음은 제자들의 복음서라고 할 정도로 예수님이 오직 제자훈련에만 관심을 쏟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오늘은 성경을 많이 찾아보겠습니다. 성경을 읽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한 저자의 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읽을 때는 마태복음 안에 있는 말씀만 가지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태가 발견했던 예수님을 우리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보면서 마가복음 보면 초점이 흐트러집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있는데 그 복음서마다 자신들이 그린 예수님이 모습이 다릅니다. 성경을 오래 읽으신 분들은 이 세미한 결을 구분할 줄 아셔야 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크게 다섯 묶음으로 구분해 놓고 있습니다. 다섯 개의 말씀모음집을 마태복음서 순서에 따라 배치해 놓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개의 모음집은 철저히 제자들을 향한 말씀들입니다. 하나씩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5,6,7장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의 시작인 5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그림을 그려보세요. 예수님이 산위에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무리가 배경처럼 있고, 제자들이 앞에서 열심히 듣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무리’가 되지 마십시오. 제자가 되십시오. 주님의 관심은 오직 제자들입니다.

10장을 보십시오. 이것은 ‘선교론’ 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선교여행 보내면서 어떻게 전도할 지를 가르쳐주신 말씀들입니다. 5절 한 번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11장 1절도 보십시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여기서의 관심도 제자입니다. 13장 보십시오. 13장은 7개의 천국비유 말씀을 모아놓았습니다. 1절에 보면 무리를 향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1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예수님은 비유의 비밀을 제자들에게만 가르쳐 주십니다. 18장은 ‘교회론’이라는 제목이 붙은 말씀모음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시작하지요?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마지막으로 24장, 25장은 종말론과 관련된 말씀 모음집입니다. 마지막 때의 일과 최후 심판의 모습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자들도 역시 제자입니다. 24장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마태복음은 무리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기록된 말씀이고 이 말씀은 제자가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오늘 마지막 지상명령을 내리시는 장면에도 그 앞에 제자들만 듣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잘 해석 못하는 부분이 16절의 산입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다시 만날 것을 지시하신 갈릴리 쪽에 있는 어느 산입니다. 저는 이 산이 바로 산상수훈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그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서 가장 핵심입니다. 마치 새로운 천국 백성된 제자들을 향하여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반포하듯 예수님께서 천국 율법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20절에서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실 때의 분부한 모든 것의 핵심은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이 정도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제자 삼는 사역에 집중하셨는지, 또 그 제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제자는 단지 준 목회자처럼 구역 관리 잘하고 전도 잘해서 재생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의 제자상은 지난 번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존재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이 바로 제자입니다. 마태복음을 근거로 제자상을 요약하면 이런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과 그 의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며, 원수를 사랑하며, 전혀 위선이 없으며,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5-7장). 전도하는 데 열심인 사람입니다(10장). 열심히 말씀공부해서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입니다(13장). 교회 안에서 형제를 용서하고 작은 자를 대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18장). 자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또 부지런히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사람입니다(24-25장). 이런 사람이 사회의 빛과 소금과 같은 사람입니다.

신자에서 제자로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의 방법대로 무리가 아니라 제자에 집중하는 것이며, 이런 제자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신자에서 제자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리 속에 있으려고 하지 제자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신자와 제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우리를 처음부터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제자이든지 아니면 제자가 아니든지’의 문제만 있을 뿐이지 ‘신자’라는 엉거주춤한 자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가는 길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곧 제자의 삶을 사는 자가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그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엉거주춤 신자의 길을 가려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지은 인생과 같습니다.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천국잔치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왕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왕이 화가 나서 그들을 진멸하고 사거리로 나아가 지나가는 사람들 아무나 불러오게 합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불려온 사람들이 잔치 자리에 앉았습니다. 왕이 지나가다 보니 이들 중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이 있습니다. 왕은 그 사람을 쫓아내라 명령하며 그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3-14) 그 예복이 무어냐 하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시작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우리가 제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과 미련한 다섯 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결혼식의 신랑을 맞으러 열 처녀가 등을 가지고 나갔는데 신랑이 더디옵니다. 기다리다 지쳐 모두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자다가 갑자기 신랑이 온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얼른 등불을 켰는데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미리 예비해 두었기에 신랑을 맞을 수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없어 그만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언제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오실지 모르니 깨어서 그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이 무엇입니까? 그것 또한 제자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어지는 비유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 다음의 말씀은 최후심판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심판을 하시면서 영생에 들어갈 양의 무리와 영벌에 들어갈 염소의 무리를 가릅니다. 그 기준은 작은 소자 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했느냐 입니다.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병에 걸린 사람, 옥에 갇힌 사람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기름은 제자의 삶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이렇듯 제자의 삶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 신앙생활은 너무 안일합니다. 적당히 예수 믿으며 이 땅에서 편안히 살다가 천국에 가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처럼 지금 어리석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개척교회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 이상 적당히 살 수 없으니까요. 인생에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이 기회가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제자로 체질을 개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훈련이 없으면 제자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3년이나 훈련시켰는데 그 중 하나는 배신하고,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던 순간에는 다 뿔뿔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3년을 합숙하며 훈련받았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도 했지만 그래도 제자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다 예수님의 위대한 증인으로 그 삶을 마쳤습니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확실하시다면 훈련을 시키실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우리가 제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하고 신앙에 나태해졌는데도 하나님이 가만 놔두신다면 그것은 이미 포기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첫 훈련은 주일성수 훈련이었습니다. 한 번은 주일을 빼먹고 친구들하고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돌아오자마자 몸이 아팠습니다. 몇 번 그런 유사한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는 아예 주일은 교회 가는 날로 못을 박았습니다. 시간을 바치는 훈련도 시키셨습니다. 대학시절에 교회에서 제가 맡았던 일은 토요일 오후에 을지로에 가서 주보를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 청년시절에 주말은 얼마나 황금대의 시간입니까? 미팅도 해야 하고 영화도 보아야 하고. 저는 근 1년 동안 이 일 때문에 다른 약속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이든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십일조 훈련도 시키셨습니다. 제가 가정을 갖고 그 첫 달 우리가 내야 될 십일조가 44만원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쉬 그렇듯이 4만원은 뒷자리니까 끊자 하고 십일조를 40만원만 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당장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목욕탕 하수구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뚫리지 않아 사람을 불렀습니다. 이 분이 한참 끙끙대더니 하수구를 용케 뚫었습니다. 그리고 영수증을 청구하는데 4만원이었습니다. 머리가 쭈삣 서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비싸다 싶었는데 그 돈이 십일조 액수와 정확히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 않고 주었습니다. 그 후로는 정확한 십일조를 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물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물질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계산이 정확한 사람, 더 나아가서는 어떤 물질에도 흔들림 없이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더 큰 물질을 다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십일조를 내는 데 만족하는 인생이 아니라 이런 물질 훈련을 통해서 다른 더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삭을 낳기 전까지 25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으로 복의 근원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모세를 애굽 궁정에서 또 미디안 목자로 80년 동안 훈련시키신 것은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제자의 삶에 관심을 가지시고 이를 목표로 하십시오. 제자가 되기 위해 제자훈련 받는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 것을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18)를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확신입니다. 우리는 훈련받되 작은 중소기업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오너로 모신 하늘 나라의 대기업에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 훈련은 소망이 있는 훈련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간구할 때 충분히 공급해 주십니다. 공수표나 부도난 어음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확신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임마누엘의 확신입니다. 주님은 이제는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우리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 은혜를 힘입어 담대히 제자의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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