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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태신자] 예수님의 이야기 (눅 24: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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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설교말씀은 성령 받은 3천명이지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란 우리 말은 참 여러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일방적으로 어떤 일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풀어서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 서로 대화를 하면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럿이 같이 어울려 이야기할 수 도 있습니다. 이야기가 무엇이냐, 라고 한다면 딱 부러지게 이것이라고 하기 어려운 그런 면을 갖고 있는 것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아주 다양하고 풍성한 세계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 안에 호소력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스며들어오는 힘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천에 있는 차이나타운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맥아더 동상을 보았습니다. 지난번 맥아더 동상철거논란 이후 꽃들로 주변을 더 잘 장식해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6.25때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렸을 때 6.25를 겪었던 일도 생각났습니다.  저의 아버님께서 그 당시 피난시절이야기를 하시던 일이 기억났습니다.  정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시 그런 전쟁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진정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가장 존중히 여기는 민족으로 바뀌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이 통일되고 하나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여, 민족을 구원하소서, 라는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저 북한 땅의 동족을 마음 속에 품고 태신자로 만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주여, 북녘 땅의 동족을 구원하소서.  6.25 때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민족을 복음화하는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는 일에 필요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지금 우리
주변 우리 가까이에 있는 분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태신자 작정을 위한 카드를 드렸습니다만 우리 가까이에 있는 분들이 지금 우리가 마음에 품고 기도할 태신자들 입니다. 태신자는 전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분을 마음 속에 품고 기도하면 잉태된 신자, 즉 태신자입니다. 그런 분들을 주님께 인도하고 예수님 체험 성령체험 교회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 태신자 전도 운동 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다가 낙심하고 또는 어떤 형편으로 인해 마음이 풀어져서 예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교회를 나오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에 흠이 생긴 분들이지요.  그런 분을 다시 마음에 품고 새로 변화되고 예수님께로 나오기를 간구하면 그 분들이 역시 태신자들입니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교회에 등록된 성도들을 향하여 비록 예수를 믿는 분들인데도 불구하고 태신자로 품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자이든 신자이든 정말 예수님체험 성령체험 교회의 충실한성도가 되게 하는 일을 위해서는 그분들을 마음 속에 품고 기도하고 다시 해산할 여인처럼 수고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이 우리 모두가 다 해야 할 태신자 전도운동 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위에 예수님께로 나오고 예수님체험하고 성령충만 받고 교회를 잘 다니고 교회의 정말 좋은 일꾼이 되어야 할 분들이 꼭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도 모르게 멀리 멀리 간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가고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땅히 예루살렘의 교회에 있어야 하고 마땅히 그곳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가면서 슬픈 얼굴로 낙심된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무언가 돌이켜야 할 분들. 어디에선가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야 할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런 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렇게 결정적인 유턴을 해야 하고 결정적인 변화를 얻고 그리고 예루살렘의 사람 오순절 마가다락방의 사람들이 되는 변화가 있어야 할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변화를 일으킨 방법의 하나인 이야기,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야기, 라고 했지요.  이야기는 그 이야기라는 내용 만이 아니라 전하는 방법에 있어서 무언가 열려있는 그런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한쪽이 그냥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이야기라고 한다면 열려있어야 합니다.  이야기는 서로 대화가 될 수 있는 그런 것이며 대화를 통해서 서로가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열린 광장을 갖는 방법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이야기책입니다.  이야기를 통해서 또는 이야기 속에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씀하는 책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실망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야기 속에 들어가시고 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를 이끄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가장 열려있는 접촉공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들려진 부활의 이야기는 충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로서 부활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와 부활은 당시 사람들과 특히 제자들의 이야기의 초점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중심으로 많은 이야기가 가능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이야기 꺼리를 일으키시고 그 이야기를 하게 하시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풀어나가시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성경은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때에 예수님이 그들과 동행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날, 이란 예수님이 예루살렘 골고다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이 된 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지요. 그리고 그 부활하신 소식이 막달라마리아와 여인들, 그리고 사도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통해서 이야기되기 시작한 날입니다.  부활의 이야기가 퍼지는 날입니다. 그날에 제자들 중 두 사람이 낙심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엠마오라고 하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이야기를 나누고 예루살렘의 교회를 일으켜야 할 그들이 멀리 멀리 떠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을 긍정적으로 나누면서 기뻐해야 할 사람들이 지금 낙심된 신앙으로 교회 공동체를 멀리하고 떠나가는 길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주위에 갖고 있지 않습니까. 혹 우리가 마음 속에서 지금 엠마오로 멀리 멀리 가는 중에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 25리 길을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이야기가 불신앙과 낙
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는데 문제가 있었지요. 누가 이 이야기를 바르게 인도해 주어야하는데 그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 들어갈 사람이 필요했고 긍정적으로 돌이킬 사람이 필요했었던 때입니다.  그들은 어쨌거나 예루살렘에서 되어진 일, 오늘 본문에 말씀한 이 모든 된 일, 그 십자가와 부활의 일을 서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야기는 대화로 구성됩니다.  대화가 진행되게 하시고 서로 이야기하면서 ‘문의’를 할 때 그 답을 찾아 주는 분이 필요할 때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24: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이야기 속에 문의하면서 그래 이게 무어지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라며 문의하는 그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꺼리를 일으키신 분으로서 이제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의 가운데에 끼어드시면서 질문하십니다.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슬픈 빛을 띠고’, 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구원의 큰 일을 이야기하면서 저와 여러분은 혹시 슬픈 빛 우울한 얼굴 낙심된 표정으로 살아가지 않는지요.  인생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들으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혹은 그 모든 일이 자기들에게 그저 실망이요 또한 자기들의 희망을 걸다가 실망으로 바뀌게 되면서 더 슬퍼지게 하는 그런 이야기 정도로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청년 때 군대에서 제대하고 어느 교수님 댁에 머물 때였습니다.  열심히 새벽기도를 나갔지요.  그렇게 나가던 그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던 것 같습니다.  찬송을 하면서 말씀을 듣는데 목사님이 속이 상하시는 듯이 이렇게 외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들 얼굴에 슬픈 표정을 짓습니까. 왜 슬퍼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시고 죄사함 주셨는데 왜 그렇게 슬픈 얼굴입니까?  그러시는데 꼭 나보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그 때 그랬거든요. 왠지 모르게 슬펐어요. 제 자신을 보면서 우울한 얼굴이 늘 있었거든요.  그 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슬픈 표정으로 주님을 보는 우리들 아닌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슬픈 빛을 띠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준비해야 합니까?  위대한 반전 스토리입니다.  역전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역전의 이야기를 우리는 사용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출애굽이야기이기에 우리는 이 이야기에 전문가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반전이야기.  우리가 출애굽 이야기를 사용하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430년 살았던 그들이 놀라운 기적으로 출애굽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구원된 이야기. 수백만이 40년 동안 하늘의 양식을 먹던 이야기들. 우리는 그런 이야기로 인생의 반전 역전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큰 이야기를 화제꺼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그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라는 표정과 실망의 인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확신있는 이야기꾼이 되어야 합니다. 확신있는 이야
기꾼. 그러려면 그 이야기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지요.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아는 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인줄 모르고 질문한 제자같이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왜 가난, 질병, 실패, 좌절이 옵니까,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저 실망을 안겨주신 분으로 남으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마치 예수님이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 주신 분 같이 그런 표정, 슬픈 표정, 근심된 얼굴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얼굴을 한 번 보시지요. 슬픈가요?  웃음을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의 한 사람의 말을 들어 보실까요.

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마치 주님이 아니신 것 같이 환경을 통해서도 물으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낙심한 표정을 짓고 슬픈 표정으로 살아갑니까, 라고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되물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형편을 모릅니까. 경제가 어렵고 사람 사는 일이 힘든 것 모릅니까. 얼마나 내가 바쁜 줄 아십니까.  교회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압니까, 라고요.  그러나 주님은 다시 물으실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어떤 일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어렵습니까,라고요.  그러면 우리는 대답할 수 있지요.  예수님을 저도 믿어왔는데 믿어봐도 결국 실망스러운 형편이에요,라고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예수님과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24:19 무슨 일입니까.  제자들이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지요.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지요.
24: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입니다.

놀라운 이야기인데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셈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도 부활도 결국 우리에게 하나의 놀라운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지는 못하고 끝난 것 같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있지는 못하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놀라운 일, 기이한 일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반쪽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으로 이렇게 올 수 있습니다.

24: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부활?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부활을 믿는가? 라고요. 이런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지요.  예수님은 우리들 대화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시고 그 안에 있는 부정적 신앙을 살피십니다.  그리고 결국 그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이끄시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의 긍정적 인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것. 이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올 때 오히려 밤의 달이 빛을 내고 별이 빛을 낼 수 있듯이 그 안에서 오히려 밝은 표정의 전도를 할 수 있습니다. 빛의 예수님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긍정적인 증거를 하시는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의 슬픈 이야기를 새롭게 이끄시고 그 모든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임을 알리시면서 예수님이 지금 그들에게 함께 계심을 체험하는 길로 이끄시기 시작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은 출애굽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출애굽의 새로운 전개, 새출애
굽 이야기를 이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애굽이야기이지요.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모세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셨지요.  ‘모세가…’라고하시면서요. 예수님이 출애굽이야기를 꺼내시고 그 놀라운 이야기를 통해서 출애굽의 성취가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룬 것임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그들이 잘 아는 이야기로부터 예수님을 다시 배우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이 새출애굽의 완성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이야기 전도법이지요.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을 들으면서도 슬픈 사람들에게 출애굽의 위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출애굽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잘 전하는 전문적인 예수님의 출애굽이야기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반전의 이야기입니다. 역전의 드라마입니다.  일제 36년도 힘들었고 절망적이었는데 430년의 노예생활은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 죽는 때에도 노예인 환경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은 출애굽을 주셨지요. 홍해를 건너게
하셨지요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지요. 약속의 땅에 이끄셨지요.  반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역전의 드라마는 지금도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출애굽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이야기하고 용기를 주는 빛의 전도를 합시다. 태신자를 품읍시다.  그리고 이 이야기전도를 위해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출애굽 이야기의 능숙한 이야기전도자들이 되시고 이야기들 속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이끄는 힘을 갖고 영혼들을 살아계신 주님께로 인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오치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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