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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힘 (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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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솝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와 바람”이야기입니다.
해와 바람이 서로 자기힘이 세다고 자기 자랑을 하면서 다투었습니다.
해는 자기는 이 세상의 어떤 것이든 태울 수있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이 세상의 어떤 것이든 날려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서로 자기 힘이 세다고 자랑을 했지만 아무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둘이  결국 누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두꺼운 외투를 누가 먼저 벗길 수 있는가 하는 내기를 걸었습니다. 먼저 바람이 도전합니다. 강하고 센 바람으로 사정없이 불면 불수록 그 사나이는 외투를 감싸안도 벗지 않아서 실패하고 맙니다. 다음에는 해가 도전합니다. 해가 빛을 쨍쨍째면서 나그네를 향해 비추입니다. 그러자 사나이는 결국 외투를 벗고 맙니다.
이 세상에서 태양처럼 강하게 사람을 움직인 힘을 갖고 있는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세상을 움직인 힘은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의 힘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경험한 사람들은 아마도 주님의 제자들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의 힘을 가장 강력하게 경험한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을3번이나 부인했음에도 주님은 그를 사랑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시간에도 옛날로 돌아가 갈리리 바다로 다른 제자들과 작당하여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실패 속에서도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먼저 관심을 갖았던 일은 실패한 제자들을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주님은 베드로의 실패에 실망하지지 않았습니다. 실패 때문에 그 제자들에 대해서 낙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실패한 사역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침울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상한 것은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시어서 “사랑”의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레에게 3번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십니다. 그 사랑의 질문은 반복됩니다.16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확인합니다. 17절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십니다. 한번도 아니도 반복하여 3번이나 예수님이 질문하셨습니다.

여기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우선 이 질문을 몇가지로 다른 번역이 가능한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첫째 번역은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것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번역의 번역입니다.

그런데 새번역은 이와 전혀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했습니다.
또 다른 번역은 새  영어 성경에는 "네가 다른 모든 것들(all else) 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번째 번역이 더 적절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여기서  '다른 모든것'이란 고깃배, 그물, 고기, 등 일체를 의미함은 물론  사람들도 포함하여 어떤 물건이나 어떤 사람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들이나 사람보다 더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를 주님이 질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왜 3번 반복하여 사랑의 질문을 하셨을까?
이미 주님은 왜 베드로가 3번이나 실패하였는가? 그 문제를 염두에 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여기까지에서 가장 한계를 느낀 것이 무엇일까요? 그는 누구보다도 주님에 대한 열정도 있었습니다. 지식도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남 뒤지지 않는 사람이엇습니다. 그러나 결국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고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베드로가 다시 일어서고 다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랑을 묻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3번이나 반복해서 주님께 대답합니다.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는 질문에  15절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합니다. 16절에서도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17절에서는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사랑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3번이나 그 사랑을 확인한 베드로에게 놀라운 그 앞길의 삶을 예언적으로 선언하십니다.

여러분 믿음 생활에서 실패하는 많은 이유 중에 제일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문제입니다. 이시간 먼저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주님 앞에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따라해보십시오.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3번 한번 믿음으로 기도하는 심정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고백하여 보십시오.
여러분 이 고백되로 주님을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반복하여 고백한 것처럼 반복하여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 우리 주님은 받은 그 사랑 이상의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여러분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놀라운 삶을 이땅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의 힘은 주님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자 그 사랑의 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3번이나 명령했습니다 .15절 “내 어린양을 먹이라” 16절 “내양을 치라” 17절 “내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주님은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아주 엄청난 선언을 하면서 명령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믿음을 확인한 제자 베드로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당부하십니다. “내 양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먹이라, 치라, 돌보라 등의 다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만 모두 같은 뜻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베드로에게 우리 주님은 자신의 양을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이제 주님의 양들을 위해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랑의 사명은 어떤 삶입니까? 마치 목자가 양을 먹이고 치고 돌보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고 돌보는 목자의 삶은 주님께서 친히 먼저 본보여준 삶입니다. 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삵군목자와 진짜 목자의 분별법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요한복음10장 2절 “삵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고 합니다.
이제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베드로가 주님의 이 목자의 사랑을 실천할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이제 참된 목자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의 양을 먹이고 돌보면서 사랑하는 삶을 너도 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베드로에게 주님의 교회를 섬기라는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처럼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주님의 사람을 키우고 돌보는 사명”을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의 생명인 교회를 주님이 누구에게 위임하십니까?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맡기셨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사랑이 있으면 주님의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을 것같았던 베드로 결국 이 주님의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하신 일도 우리 눈에 보입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관심 그 사람의 모든 일도 우리가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생전에 가장 중점에 두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영혼”들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3년동안 오직 그 고생하며 유리하는 영혼들을 선한목자되어서 먹이고 돌보고 섬기는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일을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양떼들을 위해 고난받으시고 희생하시고 한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주님의 사랑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받고 주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주님의 생명을 받고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에게 부탁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베드로에게만 해당이 됩니까? 특정한 목회자들에게 해당이 됩니까?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 모두가 감당해야 할 주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주님의 양을 먹이고 돌보는 일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도 먼저 “주는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누가 진짜 주님의 사람인가를 심판하실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때 누가 주님의 양으로 인정을 받습니까? 주님은 많은 양과 염소 중에서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시는 기준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의 양입니다. 그 주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목자의 심정으로 이렇게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깁니다.“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라고 합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 힘입니다. 주님 사랑의 힘으로 항상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주는 자의 삶을 실천할 때 우리가 반드시 2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사랑은 감정적인 고백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누구나가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은혜와 깨달음을 받고 그렇게 입술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보다 더 이상의 유식하고 고상한 표현으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그 감정적인 사랑 그 사랑의 말의 고백이상으로 몸의 희생 사랑의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정에서도 경험하는것입니다. 우리가 부부간에 가족지간에 “사랑”이 말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이 없으면 그 사랑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여기 함께 예배드리는 어느 한 사람 예외없이 그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에 그냥 입술로만 “반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자꾸 무조건의 사랑을 행하시기를 도전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할때에도 그렇고 교회 속에서 무슨 일을 할때에도 그렇고 내가 줄때에 “나의 사랑” “나의 열심” 나의 의“ “나의 선행을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사랑은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저는 지난번 여름 교육행사 때에 많은 분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랑으로 수고하여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물질로 어떤 분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음식을 요리하는 식당봉사로 아이들을 나르는 차량봉사로 더러워진 교육관과 교회당을 청소 하시는 헌신으로 봉사하여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 주님의 사랑의 빚진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바로 그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 주님의 양들을 그렇게 사랑하면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속에서 어떤 사역을 하든지 “주님 사랑의 동기”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의 값없는 사랑에 힘입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섬김의 자리에서든지 그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서 섬김의 열매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을 사랑하면 고난도 이깁니다.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여기 베드로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곳으로 다녔거니와” 그러나“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젊은날은 자기 중심적인 자유로운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늙어서는 팔을 벌리고 다른 이들이 그에게 띠를 띠우는 삶을 살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늙어서 주님을 위하여 결국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삶을 살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그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앞에 무릎꿇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길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이 고난을 이깁니까? 고난보다 더 강한 사랑이 이깁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역사가들은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거꾸로 당해 순교했다고 말합니다. 그 고난 앞에서 목숨을 걸고 주님을 드러내고 영광돌리는 고난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힘이 무엇입니가? 바로 사랑입니다. 고전13;7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고난의 댓가를 지불하면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지만 주님의 사랑도 고난을 이기신 사랑이셨습니다.만약게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참지 못하고 그냥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포기하셨다면 우리에게 그 사랑은 전달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이 왜 깨어집니까? 고난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고난받지 않으려는 어미는 그 가정을 지키지 못합니다. 가정을 위해서 고난받지 않으려는 아비는 그 사랑을 지키지 못합니다.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포기한다면 그 사랑은 열매맺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즘 티이비이를 보면서 참으로 가슴아픈 것은 가정이 깨어지면서 버려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입니다. 사랑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서로 책임지는 것인데 본인이 힘들다고 아이들을 쉽게 할아버지에게 고아원에 갖다 맡깁니다. 여러분 이것은 아닙니다. 물론 본인은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정을 지키고 고난 속에서도 자녀를 지키는 책임과 희생을 다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어미와 아비의 고난의 댓가 자기를 포기하는 희생의 사랑이 있을때 그 사랑이 지켜지게 됩니다.

우리 교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생활할때에도 여전히 우리가 치루어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교회가 저절로 자라고 저절로 부흥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사역의 고난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 때문에 치루어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은 사역의 위치에 따라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주님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모든 평신도 사역자들은 그 위치에서 겪어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 고난을 이길 힘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그 주님을 내가 사랑하는 그 힘으로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그 고난을 이길 힘이 없다면 오늘 내가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이 그 주님의 사랑입니다. 먼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서 그 받은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계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 사랑의 주님의 선한 뜻도 이해하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고난을 통하여 원하시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길이를 나타나게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깊은 고난 힘든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을 보면 더 깊은 주님과의 관계를 갖는 기회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이기고 나갈 때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베드로 사도는 나중에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향해서 3가지 권면을 합니다.
먼저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벧전4: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고난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요즘 새벽 큐티 본문에서 살펴보듯이 많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고난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것이 ‘고난’은 “죄에 대한 댓사‘로 보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같이 불교권의 나라의 경우 고난을 ’전생의 업보‘라고 봅니다. 전생에 조상들이 죄를 지으면 그 죄가 대대로 물려받게 되는데 이렇게 자신이 고난받는 것은 업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난자체를 부정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고난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주이십니다. 고난을 통하여 성도들을 단련하십니다. 마치 불시험을 통과하는 철제도구처럼 주님께서 귀하게 쓰시기 위해서 고난을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그 자녀에게 ”선을 이루시는 고난“을 주시고 ”뜻을 이루시는 고난“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이상히 여김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은 더 적극적으로 고난에 참에함으로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벧전4:13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난받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벧전4:16 “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저는 며칠전 휴가지 티이브이 프로그램에서 사랑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프로그램에서 보았습니다. 그 남편은 가수였다가 다쳐서 걸을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되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이미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을 감수하고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그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온갖 수발과 고난을 감당하면서 삶을 삽니다. 또 그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고 폐인이 되었을 때에 사랑으로 외국에 있는 그 어머니를 달려가서 수발들면서 섬깁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의 삶은 없습니다. 매일 남편 어머니를 위한 삶이 전부입니다. 불평없이 힘들고 그 어려운 삶을 이길 힘은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내가 행하는 사랑의 모습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의 백성들이 나에게 주어진 어떤 고난 속에서도 갖아야 할 삶의 모습은 아버지게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19절,22절
사랑은 입술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것만이 아닙니다.사랑은 머리 속에 깨달음으로 지식으로 아는 것이 다가아닙니다. 우리는 공생애 3년의 기간 속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이미 주님을 지식적으로 알았고 또 주님을 메시야로 깨달아 아는 은혜도 누렸습니다.그러나 은혜로 주님을 알고 깨닫고 고백하는 차원의 믿음이 다가 아닙니다. 얼마나 우리는 화려한 단어로 주님을 입술로 나타낼 수 있습니까? 마치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 사랑의 편지에 밤을 새워서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정말 사랑하면 괴로우나 즐거우나 힘들거나 어렵거나 함께 갑니다.

제가 대학교 시절에 연애를 잘하는 친구가 한명 있었습니다.
여가 있는 곳에 남자가 있습니다. 남자가 있는 곳에 이 여자가 잇었습니다.저는 그 당시에 그 남자를 사랑하는 그 여자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여자친구는 아주 중국어도 잘하고 얼굴도 이쁘고 인기가 좋았던 여학생이었습니다.그런데 그 남자친구는 공부도 잘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가업으로 재산을 물려주어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리더쉽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친구는 오직 일편단심 민들레였습니다. 한 1년동안 서로 교제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저는 그 친구에게 아주 좋은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자친구의 편”이 되어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레포트를 못썼으면 밤을 새워 써줍니다. 밥을 못먹었으면 돈을 꾸어서라도 식사를 해결하여 주었습니다. 어디 물건을 사러 간다든지 밤길이라든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같이 따라가 주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분명히 같이 가 주지 못할 상황 해주지 못하라 상황인데도 함께 하여주는 그 친구를 그 여자는 결국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 커플은 결혼하였습니다. 지금 어떻게 사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그 모습이 변질되지 않았다면 저는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할때 주님도 나를 더욱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마가복음12장 28절이하에 보면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12장 3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여기보면 주님과의 사랑을 말하면서 “다한다”라는 표현이 3번 나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영어성경에는 “다하다”를 "all“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마음의 전부 생각의 전부 뜻의 전부를 요구하는 것인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전부를 내주시는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은 먼저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다 내놓으시고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그 사랑의 삶을 살 힘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내가 정말 받은 사랑을 믿고 알고 경험하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는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때때로 경험하는 것은 처녀적 자기 밖에 모르던 여자와 남자들이 서로 사랑하게 될 때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함께 하는지 모릅니다.
사랑의 힘은 자발적인 순종을 낳습니다. 마음에 즐거움으로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자원하여 따름의 순종의 관계가 됩니다.복음은 우리를 순종하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 속에 순종의 힘을 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면 순종의 주님을 보게 됩니다.이땅에서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 순종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친히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간 것은 바로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등학교때 본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듯이 로미와와 줄리엣이 서로 너무 사랑합니다. 그런데 양쪽 집안이 서로 원수지간이라 결혼할 수 업습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에 신부가 부모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인가 어쨌든 죽지는 않지만 잠깐 죽는것같은 쇼킹에 빠지는 약을 먹고 잠시 죽는 것같은 상태에 빠집니다. 그런데 로미오가 사랑하는 사람 줄리엣이 죽은 줄 알고 진짜 죽는 약을 먹고 죽기까지 따라갑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죄성이 잇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때로 주님보다는 나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더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자녀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할 자들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정말 사랑하면 주님을 죽기까지 따릅니다.누가 나를 이길 수 있습니가? 누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누가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성령님이 주시는 그 사랑의 힘은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나가는 말 ))))

나는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무한한 주님의 사랑을 이미 받은 자들입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도 받았고 여러분도 받았습니다. 먼저 그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은 사랑의 힘을 발휘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주신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주신 그 사랑의 힘으로 더욱 주님을 따르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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