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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는 선지자라 (창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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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우리 경향교회 중고대 SFC가 연합으로 강화도로 하기수양회를 갔을 때였습니다.
  첫날 저녁에, 당시 군에서 재대하고 복학 중이던 대학부 위원장 선배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근처에는 '군번 없는 군인'들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저녁인가 과연 어떤 두 명의 군인들이 우리가 머물던 텐트 부근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와서 우리의 책임자와 만나고 싶다고 제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어제 저녁에 들었던 말이 생각나서 "위원장님, 여기 어제 말씀하시던 그 '군번 없는 군인'들이 왔어요."하고 텐트 쪽을 향해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군인들은 위원장 선배님과 잠시 무슨 대화를 나눈 후에 밖으로 나오더니 그 중에 한 명이 "야, 너 나 좀 따라와."하고 손가락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영문을 모르고 따라갔더니 텐트에서 멀찌감치 저를 데려가서는 "너 아까 우리 보고 뭐라고 불렀어?"하고 정말 무섭게 윽박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군번 없는 군인'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도 전혀 모르고 그랬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그 군인들에게는 보통 기분 나쁜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그 군인 둘에게 봉변을 당하고 겁에 질려서 훌쩍거리면서 속수무책으로 울고 있는데, 그때 수양회 강사로 같이 오셨던 아버지께서 마침 그 장면을 보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장에 달려오시더니 그 군인들을 보고서 "너희들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어린 학생을 붙잡아놓고 이러는 거야?"하고, 그 군인들이 제게 했던 것보다 몇 배로 더 무섭게 윽박지르시면서 "나, 경목실장인데."라는 위협(?) 덧붙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부산 영도에서 목회하실 때 경목실장이시기는 했지만, 서울에 올라와서 경향교회를 개척하실 때에는 물론 그 직함도 이미 없어진지 오래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으름장에 꼼짝 못하고 설설 뒷걸음치며 물러가는 그 군인들의 모습은 정말 얼마나 후련하고 통쾌했던지 이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도, 물론 본의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실수를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런 것 따지려 하지도 않으시고 그저 일방적으로 아들 편만을 들어주셨고, 저로서는 제 평생에 제 아버지께서 그렇게 멋있게 고맙게 보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서 바로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분명히 잘못한 못난 자식부터 야단 좀 치실 법 한데, 오히려 억울해 보이는 아비멜렉만 혼내셨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택자와 불택자, 신자와 불신자를 왜 그렇게 차별하시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왜 불신자와 신자를 다르게 보시고 다르게 대하시지를 주신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불신자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산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본문 1절부터 7절에 "1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2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3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4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7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자기 호신하려다가 아내를 완전히 빼앗길 뻔했던 일을 일전에 12장에 이미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또 반복합니다.
  '용자(勇者)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이 있지만, 적어도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하여튼 예쁜 아내 둔 덕분에 아브라함이 겁쟁이 짓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못난 남편 대신에 사라를 구출해주셨습니다.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셔서 사라에게 손도 못 대도록 겁을 꽉 주셨던 것입니다.
  잠자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하나님의 경고와 위협을 듣게 된 아비멜렉은 자기의 행위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한 것이었다고 극구 변명했습니다.
  아비멜렉은 분명히 불신자요 우상숭배자였기 때문에, 그가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라고 말한 것은, '당신이 어떤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무슨 벌 받을 만큼 나쁜 짓 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자기 결백을 주장한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한 주로 고백한 말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사실 아브라함에게 속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세상 윤리적으로만 판단한다면 유죄한 쪽은 오직 아브라함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아비멜렉에게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라고, 그에게 도의적인 책임은 없다고 인정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아브라함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못난 짓은 분명히 아브라함이 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멀쩡한 아비멜렉을 찾아가서 야단치고 겁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얻은 사람이었고 아비멜렉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고 했듯이, 아브라함은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사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에 철저히 기초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아무리 못나도 하나님 눈앞에서 그는 어디까지나 '의인'이었을 뿐이고, 반면에 아비멜렉은 제 아무리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을 지키고 살았다 해도 그의 의나 선이라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불신자는 신자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자기네보다 양심이 모자란다고, 덜 착하다고, 자기네보다 선하게 못산다고 결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신자를 불신자들의 고발로부터 아예 치외법권 지대 안으로 옮겨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해적선 안에 살고 있는 해적들이 자기네들끼리는 아무리 의리가 좋고 양심을 지키고 서로 선행까지 베풀어주면서 산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두고 그들을 의롭고 무죄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줄 판사는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그 어떤 양심적인 불신자, 그 어떤 착한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불신자를 당신의 택하신 신자보다 더 좋은 사람, 더 착한 사람, 더 옳은 사람이라고 절대로 인정해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저쪽은 어디까지나 유기되어서 끝까지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고 이쪽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이미 의롭다 함을 입고 구원 받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불신자는 제 아무리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양심을 지키고 산다 하더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믿고 사는 신자에게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도달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코 교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구원의 확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은총을 체험한 진짜 기독신자라면 정말 꼭 가지고 있어야 할 이런 확신과 자부심을 늘 지키고 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불신자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가운데 신자를 핍박하는 가장 치명적인 죄악에 빠져 있습니다.

  8절부터 13절 말씀에 "8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13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잠자다가 하나님께로부터 한방 얻어맞은 아비멜렉은 당장 다음날 아침에 사태 수습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에게는 "내가 당신한테 뭐 잘못한 게 있다고 나를 이렇게 큰 위험에 빠뜨릴 뻔 했느냐?"하고 일단 추궁했습니다.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라고, 사회 윤리로 따질 때에는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이 잘못했다고 따졌던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자기가 거짓말해서 시작된 일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이 한 가지 변명했던 사실은 바로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자기가 겁을 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랄'은 하나님 모르는 불신 사회였고 '아비멜렉'은 하나님 두려워할 줄 모르는 블레셋 불신 민족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사라의 남편이라고 하면 그를 죽이고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아 갈 소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흔히 벌어지고 있던 시절인지라 아브라함도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아브라함의 잘못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분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인이면서도 아직도 사람을 두려워하는 연약함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 즉 갈대아 우르를 떠나 여기저기 객지에서 방랑하면서 자기 신변보호를 위하여 시작된 거짓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아브라함이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라고 한 말은 그랄 사회와 아비멜렉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었습니다.
  비록 스스로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을 자랑했지만, 아비멜렉의 인생과 그랄 사회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할 줄 모르는' 불신 인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악한 사회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죄악이요 결정적인 약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사라의 문제에 있어서는 윤리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다손 치더라도,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이상, 여기에 열거되지 않은 엄청나게 많은, 그리고 정말 악독한 온갖 죄악들이 가득 넘치고 있는 인생을 이미 살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한 것만 하더라도 당시 이방 왕들이 흔히 했던 대로, 자기 하렘에 제 입맛대로 많은 여인들을 처첩으로 거두어들이던 악습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 사회 때문에 그들의 합법적인 부부사이마저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아비멜렉과 블레셋 민족의 불신앙이 아브라함의 삶에 위협을 주고 핍박을 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항상 불신자 쪽에서 신자를 핍박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지, 신자가 인류를 못살게 굴고 교회가 사회를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중세의 로마 가톨릭은 분명히 1000년 동안이나 유럽 사회 위에 그런 종교적 압제자로 군림했던 것이 틀림없고, 그런 점에서도 천주교의 이단성은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하지만 원래는 참된 기독신자는 불신자에게 피해나 공포를 주지 아니합니다.

  이 인간사회에 불의와 탐욕과 싸움으로 인한 공포와 피해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항상 불신자 쪽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애당초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을 선악 간에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이 하늘의 절대주권자를 겁낼 줄 모르고 있으니, 그런 불신 인생과 불신 사회에서 어떻게 바른 윤리, 참된 공의가 이루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항상 불신자가 신자를 핍박했지, 신자가 불신자를 핍박했다는 일이 역사상 단 한 번이라도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아무리 성립이 되려야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제 아무리 온전하고 깨끗하게 산다고 자랑해도, 그들이야말로 이 인간 세계에서 악의 온상이며 성도에 대한 일방적인 가해자인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아무리 자기 양심을 최고 수준으로 지킨다 해도,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 신자를 위협하고 교회를 미워하는 최악의 죄를 이미 저지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분인 것을 꼭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자가 세상에서 아직 생존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신자의 기도 덕분입니다.

  14절 이하 18절까지에서 "14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16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17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18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한테서 겁을 먹고서도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사라 앞에서 온갖 폼을 다 재었습니다.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 '네 남편이 자기를 오라비라고 거짓말해서 시작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너그럽게 대접해준다.'라는 말입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 '부끄러운 쪽은 너희들이지만 내가 다 무마하고 선처를 베풀어서 일을 해결해 주었다.'라고, 아비멜렉은 생색 낼 대로 다 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아브라함 쪽에서 아비멜렉에게 해주었습니다.
  아까 7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고 경고하신 대로, 아무리 아비멜렉 제가 옳은 것 같고 제가 다 해결하고 제가 좋은 일 다 해주는 것 같았지만, 진짜 문제는 아브라함이 그를 위해 기도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비멜렉 집안에 온통 퍼져 있던 불임증을 고쳐주셨다는 뜻으로서, 특히 한 왕가에서 자식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없는 엄청난 재앙이었는데 아브라함의 기도가 그것을 해결해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아비멜렉과 그에게 속한 자가 다 죽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과 상식으로 볼 때에는 아비멜렉이 옳은 쪽이었습니다.
  자기 양심대로 한다고 했고 점잖게 행동했으며 자기 결백을 주장할 근거도 충분해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그런 점을 부분적으로는 인정해주시면서도, 절대로 그를 아브라함보다 위에 놓지는 않으셨습니다.
  '너는 아브라함이 기도해 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라고, 도무지 말이 안 될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정해 놓으신, 신자와 불신자의 의존관계였던 것입니다.

  시편 105편 14절과 15절에도 "14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15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철두철미 당신의 택자 편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불신자가 신자를 박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열왕" 즉 세상의 최고 권력자들이라 할지라도 신자를 건드리려 하기만 하면 그들을 일방적으로 먼저 "꾸짖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만이 하나님과 통하는, 하나님과 줄이 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죄악만 관영한 불신 세상에서 오직 당신만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며 섬기는 "나의 선지자"만이 하나님께 있어서는 너무나도 소중한,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은 내 선지자다,'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너희 아비멜렉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내게는 아브라함 같이 취급받을 수 없는 인생이다,' '신자들이 너희들 눈에는 뭐 어떻게 보인다 해도 너희 불신자들이야말로 이 신자들이 내게 기도해주어야 살 수 있는 존재들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으시는 것입니다.

  신자와 교회가 없으면 이 세상은 존재 목적 그 자체를 당장 상실하고 맙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섬기는 주역으로 사용되어져야 하고 교회가 복음전파를 위한 본부로 쓰여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신자와 교회를 존속케 하시기 위한 배경으로서 이 세상을 유지시켜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6.25사변 때 북한 공산군의 침략을 받아서 대한민국 정부가 부산까지 피난을 가게 되고 낙동강까지 전선이 밀리게 되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목사와 기독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결국 그 기도가 이 조국을 살려내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도 정말이지 기도하는 신자들과 참된 교회 때문에 자유민주국가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날뛰는 친공분자들과 고정간첩들 때문에 이미 공산화되었어도 벌써 되었지 않았겠습니까?
  세상이 신자의 생존과 교회의 존속을 위하여 무엇을 제공해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신자가 세상을 아직까지는 망하지 않게 지켜주는 존재인 것을 깨닫고, 더욱 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철저히 아브라함 편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지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택함 받고 이미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경외하는 신앙에 자기 인생의 기준을 두고 살던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기도드림으로써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루시는 일에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 사람에게는 '제 아무리 양심적인 불신자' 천 명 만 명이 달라붙어도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신자와 불신자 간에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백성'이 된 신자 쪽입니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이것이 약하고 저것이 잘못되어 있다."라는 한 마디만 들으면 금방 풀이 죽는 교인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불신자들이 제 멋대로 '목사가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하는 소리만 들으면, 마치 발람을 책망하던 당나귀 앞에 선 사람 모양 꼼짝 못하는, 정말 속도 없는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불신자의 비난에 기죽을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나중에 천당 갈 사람이고 저쪽은 지옥 갈 사람인데, 우리가 무엇이 못나서 기가 죽어야 합니까?
  불신자는 신자를 향하여 제 입맛대로 제 기분대로 욕이나 해대지만, 그들에게는 신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이나 자격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하나님과 통하는 선지자'요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제사장'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 신자 쪽이 모든 주도권을 꽉 쥐고 있는데 도대체 왜 우리가 불신자들이 '양심, 정의, 선행' 따위의 말 한 마디만 하면, 마치 우리 쪽이 천하의 못난이요 최악의 위선자나 되는 것처럼 고개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불신자들이 잘 아는 것은, 신자도 잘못을 저지르고 사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이 여전히 모르는 것은, 우리 신자들은 자신의 그와 같은 죄인 됨을 고백하고 예수 믿음으로써 이미 의롭다함을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불신자들이 정말 잘 할 줄 아는 것은, 지상교회 안에 있는 '티'들을 발견해내고 마구 부풀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교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부르시고 변화시켜 벌써부터 세상과 성별된 '의인의 회중' 가운데 들어가게 하시는 은혜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하고 뜨거운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며, 게다가 그처럼 신자와 교회를 비난하고만 사는 본인은 아직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지 못했으며 오직 지옥 영벌의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주 캄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불신자들의 허튼 비난 한 마디에 끽 소리 못하고 눌린다면 정말 '배알도 없는' 사람이며, 아니 무엇보다도 사실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부터 34절에서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명백히 선포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 어떤 논리도, 그 어떤 도덕이나 윤리도, 우리의 죄를 이미 용서하시고 천당 구원을 보장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느니라'는 이 놀라운 언약을 받고 믿고 간직한 신자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불신자의 비난 앞에서 주눅 들거나 당황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내 선지자니라' - 인간적으로 따질 때 무엇이 어찌되어도, 혹 불신자의 기준에 볼 때 무엇이 많이 모자라 보인다 하더라도, 오직 신자만이 살아 계신 전능자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왕 같은 백성'이요, 신자의 공동체인 교회만이 온 세상 열방과 민족들 위에 있는 '제사장 같은 나라'임을 확신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언제 보셔도 '너는 내 선지자다'라고 불러주실 수 있는 당당한 기독신자의 긍지를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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