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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지혜로움 (창 1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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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합니다.’라는 선전문구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던 적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번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두가 체험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혜롭게 결정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것이 지혜로운 결정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창11: 끝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바벨론에 있는 우르에서 가나안을 행해 가고자 했습니다. 가나안을 행해 가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란에 이르렀을 때 하란이 맘에 들었습니다. 더 이상 갈 힘도 없고 . . 거기서 자리 잡고 살았습니다. 거기서 데라는 죽었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행로는 언제나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움이란?

오늘 본문 창13:1에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 가니라.”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실패자의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고향, 친척, 집안사람들을 떠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조카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하란에서 모은 재산, 종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아버지의 실패를 아들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성공을 대를 물리고 실패도 대를 물리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습관 때문입니다. 부자의 자식이 부자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자의 자식이 가난해 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습관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머물라고 하신 그 자리에 머물지 아니하고 임의대로 삶의 자리를 옮겼던 아브라함은 애굽 땅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했지만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수치와 신앙적 상처를 안고 애굽 땅을 빠져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상처 때문에 방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께서 머물라고 명령하신 아이와 벧엘 사이에 있는 가나안 땅, 처음 도착했던 그 장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에 와서 다시금 제사를 드립니다.
이 제사는 애굽에서 지었던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와 고백의 제사였을 것입니다. 또 바로 왕의 무서운 손길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예배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신앙의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진정 의지할 분이 주님밖에 없습니다.’그것이 아브라함의 지혜로움이었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실패를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실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패 후의 일입니다. 실패 후에 어떻게 하느냐? 입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들은 변명하려합니다. 변명으로 자기의 실패를 모면하려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로라 슐레징어는 인생을 잘못 사는 사람들의 실패 후에 하는 전형적인 변명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그들이 늘어놓는 변명은 이렇습니다.

1.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나도 사람입니다.
2.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3. 그게 옳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4. 나야말로 진짜 불쌍한 사람이라구요.
5. 나도 한 때는 내 주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잘나가는 사람이었다구요.
6. 그런 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구요.
7.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아브라함은 실패 후에 실패의 원인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머물라고 하신 장소로 돌아갑니다. 그곳은 자기의 생각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믿음이 가지 않고 신뢰가 가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신뢰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빨리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계속 고집을 부립니다. 계속 자기주장을 폅니다. 아브라함처럼 빨리 파악하고 하나님이 말씀한 그 자리로 돌아가 머물기로 결단하는 결단이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지혜로움인 것입니다. 신앙의 실패를 또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것을 만회하려면 다음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첫 번째, 실수를 인정할 것.
두 번째, 실수로부터 배울 것.
세 번째ㅡ 실수를 반복하지 말 것.

아브라함도 우리와 같이 실수도 하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도 했습니다만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야 할 때 부끄럼없이 돌이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존심도 내세울 때가 있지 하나님앞에서 자존심이라??? 말도 안됩니다.

흔히 남자는 자존심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살려면 분명히 자존심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 하나님의 자녀의 자존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존심은 근본적인 교만입니다.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자기 고집을 버리는 것이고, 자존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아,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자아가 죽어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존심을 버렸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회개할 때 하나님의 지혜가 발동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눈이 열리고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배할 때 하나님의 복이 다시 계속되기 시작했습니다.

2. 참 지혜로움은 선택의 기로에서 나타납니다.

애굽에서 실패를 한 아브라함이지만 아브라함과 롯에게는 육축과 은과 금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재물을 허락하셨습니다. 재물이 많은 것이 복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이란? 재물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그처럼 재산이 많아지니까 그들 사이에 더 많은 욕심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조카 롯의 종들 사이에 더 물과 풀이 좋은 곳에서 양떼들을 먹이고자하는 하찮은 일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욕심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의 물질이 없을 때는 잘 동거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많아지면 불화하게 됩니다.
6절에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땅은 한정되고 가축이 많으니까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다투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욕심이 들어오면 유치해 집니다. 쪼잔해 집니다. 나이먹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삼촌 아브라함이 제안을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조카 롯아! 이제 우리는 헤어져야 할 것 같구나. 네가 먼저 땅을 선택해!’ 롯은 주저하지 않고 물이 좋고 물이 좋은 소돔과 고모라가 가까운 땅을 선택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했습니다. 그 땅에 가서 살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롯의 가정은 음란하고 물질만능의 사회인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 살면서 두 딸을 낳았는데 그 문화에 물들고 아내도 세상문화에 빠져 사치와 방탕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하게 되었고,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두 사위는 불덩이 속에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고, 아버지 롯과 두 딸은 가까스로 도망을 나왔지만 그 문화에 물들어 있었던 두 딸은 아버지 롯을 술 취하게 해 놓고 아버지 롯과 성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물질문명을 탐닉하던 롯의 가정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돈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편리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무엇보다 물질을 사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박을 합니다.(바다이야기) 로또 . . 부동산 투기 . . 어떤 청소년들도 원조교제라는 미끼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한번 돈 맛을 보면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이 마귀의 도구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사람은 누구나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받고 살게 됩니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선택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한번 선택을 잘못해서 가정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고 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선택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정글과 같은 길, 알 수도 없는 망망대해를 헤쳐가는 것입니다.

바둑 한 판을 둘 때 보통 2000번의 선택을 한답니다. 한 수 한 수가 놓여 감에 따라 그 판의 판도가 바뀌어지고 결국은 승패가 판가름 납니다. 인생의 길은 선택에 따라서 분명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은 무엇을 해서 먹을까 하는 것에서부터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집을 어디에 얻어야 하나, 아이를 피아노를 시킬까, 바이올린을 가르칠까, 이런 모든 것은 우리들이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내 아이는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선택할 것인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 . . .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할 것인지 . . .
롯은 신앙의 사람이었기에 처음부터 소돔 성안에 들어가지 않았고 소돔을 향해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장막을 치게 됩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창13:12) 왜냐하면 롯은 소돔성의 사악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들이 그 성읍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롯은 소돔 성안에 살게 됩니다.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창14:12) 처음에는 롯은 소돔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그는 성읍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때 롯의 선택은 정말 잘한 것 같았지만, 매우 현명한 판단 같았지만 지혜로운 선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욕심에 따른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깊은 산 속에 사는 멧돼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거리다가 뜻밖에 많은 도토리들이 땅바닥에 널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멧돼지는 정신 없이 다 주워먹었습니다. 그런데도 양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멧돼지는 낙엽을 파헤쳐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곳에서 여러 알의 도토리들이 또 나왔습니다. 미련한 멧돼지는 맛있는 도토리가 땅속에서 나오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먹고 나면 계속해서 땅을 깊이 파헤치기만 했습니다. 결국 도토리 나무가 견디지 못하고 멧돼지 위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멧돼지는 도토리 나무에 깔려 죽고 말았다.

야고보서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가룟유다는 똑똑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욕심을 따라갔을 때 결국은 주님까지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선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선택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순종하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선택합니까?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맡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주리라”(창13:14-16)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과 혼자, 1:1로 이야기 하시기를 좋아 하십니다.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창12:1에도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소명)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뜻을 헤아려 하나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추격합니다. 군대를 풀어 보기도 합니다. 유인작전을 쓰기도 합니다. 그렇게 추격하던 어느날 용변을 보기위해 다윗이 숨어있는 굴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을 본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부하들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 . ‘왜 하필, 사울이 용변을 보기위해 우리가 있는 굴속으로 들어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 섭리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듯하지만 이것도 자기중심적인 해석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어떤 고등학생이 교회에 다와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돈이 없습니다. 꼭 사봐야 할 책이 있는데 집안 형편으로는 도저히 구입할 수 없으니 저에게 책 사볼 정도의 돈을 주십시오.’ 그런데 기도를 끝내고 집으로 향하든 중에 지갑을 주셨습니다. 지갑을 열어보니 현찰이 가득했습니다. 이 학생을 좋아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기도에 응답 받았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의 해석입니다.
사람들의 이기심과 죄성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타당성이 있어 보여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다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3. 올바른 선택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14-15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나님이 언제 역사하십니까? 손해를 각오하고 신앙적인 선택을 할 때 역사하십니다.
롯은 자신의 이기적이 선택으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모든 것을 다 잃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의 마음으로 선택했을 때 복이 임했습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롯의 길, 아니면 아브라함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결정하는 대로 내 생애가 펼쳐질 것입니다.
조카 롯이 훌쩍 떠나버렸을 때 아브라함은 상심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영향력이 조카 롯에게 미치지 못함을 생각할 때 괴로워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위로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새로운 세계, 믿음의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대하20:7)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더욱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눈을 들어 보라고 격려하십니다. 하나님의 격려를 듣자 눈이 열립니다.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믿음이 좋아진다는 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은혜 받으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사소한 일에만 집착하던 사람에서 큰일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땅만 보고 살던 사람이 하늘을 보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가까운 것만 보고 살던 사람이 먼 곳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구소련은 ‘알래스카’를 얼음덩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알래스카를 보물창고로 보았습니다. 단 720만불에 미국 본토에 1/5이 넘는 알래스카를 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군사기지였고 거기는 무궁무진한 석유와 보물들이 가득히 숨겨져 있었습니다.

L.A.는 끊임없이 펼쳐진 사막에 불과했습니다. 서울에 10배가 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을 가진 사람들은 400km 500km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나무를 심고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거미줄처럼 고속도로를 도시 가운데 건설하고 전세계 수많은 인종들이 모여 함행복한 도시를 건설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펼쳐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광스런 계획을 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눈을 열고 보십시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땅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이 좋아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이, 마음이, 생각이 커지시기를 바랍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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