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6~13)

  • 잡초 잡초
  • 231
  • 0

첨부 1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 왕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삼상 15:2~3) 사울 왕은 아말렉을 쳐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아말렉과 싸워서 이긴 후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것에 대해서 욕심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진멸했습니다. 보기 좋은 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던 사무엘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아니 그를 왕으로 택하여 세우셨던 하나님으로 하여금 후회하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냥 후회하셨던 것만은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인물이 요청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 이후의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던 목동 다윗이 이스라엘의 가장 높은 권력을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목동 다윗의 발탁이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 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베들레헴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인물을 왕으로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울이 여전히 왕의 자리에 있는 상황 가운데 이루어진 사무엘의 베들레헴 방문은 어찌 보면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 성읍 장로들이 사무엘의 갑작스러운 방문 때문에 몹시 떨며 질문했던 것도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삼상 16:4 하반절) 사무엘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이어지는 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사무엘은 그렇게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이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가 무엇이고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만남과 사귐이 제사요 예배가 아닙니까?

  사무엘과 이새의 아들들은 제사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선택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의 자리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꾼을 택하여 세우시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덟 명의 아들들 가운데 일곱 명이 지나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도착했을 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그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준비와 기대 속에 세워졌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있어서 등장 인물들은 모두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지 않았습니까?

  옛날 중국의 진시황의 실제 아버지인 여불위는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서 외모나 재능만을 보아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즐거울 때 그 즐거움에 얼마나 빠져드는가? 둘째, 기쁠 때 얼마나 그것을 자제할 수 있는가? 셋째, 고통스러울 때 얼마나 참아낼 수 있는가? 넷째, 슬플 때 얼마나 스스로 삭일 수 있는가? 다섯째, 두려울 때 얼마나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가? 여섯째, 화가 났을 때 얼마나 개의치 않을 수 있는가? 이러한 판단 기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교회의 지체들을 바르게 평가하고 세우는 일은 건강한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사람을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기준을 적용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먼저 성경은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각은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무엘이 이새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의 아들들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그의 아들들 모두를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나오도록 했습니다. 아마 이렇게 은밀하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네 아들들 중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다음 왕이 있다. 내가 이제 기름 부을 준비를 하고 왔다. 그러니 네 아들들을 다 내게 보이라.” 이새는 사무엘에게 아들들을 차례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빠졌습니다. 이새가 볼 때에는 막내인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만한 인물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뺐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일곱 명의 아들들을 다 본 후 사무엘이 이상하다는 듯이 이새에게 물었을 때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아들이 하나가 더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신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양이나 돌보고 있으라고 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이새의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데려오자 비로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사람은 그 키를 보기도 합니다. 사람은 조건을 보고 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외적인 조건을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지그 지글러라는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고도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재능이 아니라 그의 삶의 태도이다.” 많은 재능이 그 사람의 값을 높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값은 그 사람의 삶의 자세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사람의 중심, 즉 태도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때때로 일어나는 감정을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절제하지만 그 기준은 바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의 태도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삶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 세워졌지만 그는 실패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째서 그가 실패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않고 교만하게 굴었기 때문에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성령을 부으셔서 사용하시기도 하시지만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그 능력 자체를 거두어 가시기도 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어찌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와 같은 삶의 자세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은 성령이 우리의 모든 것을 주장하실 때 비로소 우리가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성령은 우리 안에 소망을 간직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망으로 말미암아 큰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꿈이요 비전인 것입니다.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꿈조차 꿀 수 없었던 꿈을 어떻게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확신을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이들의 기도와 희생이 오늘의 인종 차별 없는 미국 사회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번 지방 선거 때 어떤 후보에게 표를 던졌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노무현 정권을 혼내줬다고 좋아하는데 그렇게 좋아할 것이 못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는 자유당 때나 적당한 구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표를 몰아줬지만 뭐가 달라졌습니까? 아니 앞으로 뭐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까? 뭔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면 정말 순진합니다. 혹시 달라질 것이 있다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갈등과 대립과 반목의 골만 더 깊어질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중심을 보려는 노력이라도 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차 우리가 어린 양 보좌 앞에서 마지막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모나 재능으로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는 사실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옛날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며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장차 그 보좌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함께 주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아 쓰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