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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롬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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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월드컵의 열기가 연일 온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저는 축구보다는 야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 월드컵 대회를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소리가 모든 국민들의 입술로부터 힘차게 터져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민족공조'라는 네 글자가 '대한민국'이라는 네 글자를 짓누르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올림픽에 입장하는 우리나라 선수들은 그들의 평생소원인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자랑스러운 태극마크 대신에 정체불명의 한반도 그림을 달아야만 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 무슨 남북 친선축구 경기를 할 때에 북한 응원단들은 버젓이 인공기를 들고 응원하도록 해 주면서도 우리나라 관중들은 태극기를 아예 경기장 입구에서 압수해 버리는, 정말 기가 막힐 일까지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선수로 하여금 태극마크를 달지 못하게 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하여금 바로 대한민국 안에서 태극기를 흔들지 못하게 하는 일은 그야말로 일제 때에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런 반국가적인 행위가 믿을 수 없게도 바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하여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엄연한 주권국가요 자유민주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마치 나라 잃은 백성들이나 당할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보아오던 중이라, 이 월드컵 기간 중에 오랜만에 마음껏 그리고 드높이 외쳐지는 '대한민국'이라는 네 글자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저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기독신자들의 국가관입니다.
  앞서 12장에서 기독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회생활과 성도교제에 대하여 가르쳤던 사도 바울은 이제 거기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 곧 교회와 국가의 관계, 한 국민으로서의 신자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라는 것은 교회의 존속과 신자의 자유로운 신앙생활과 문자 그대로 직결되는 현실적인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인의 국가관은 어떤 것입니까?

  1. 기독신자는 국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위에 있는 권세들"이란 문맥으로 볼 때 하늘에 속한 영적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회에 속한 권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의 '높은 사람'이란 바로 그 당시 유대는 물론이요 모든 지중해 연안의 민족들과 나라들을 다스리고 있던 로마제국의 정치가들과 그에 속한 관료들을 의미했습니다.
  "굴복하라"는 말은 상대방의 권위 아래 자기가 종속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뜻하는데 그냥 '복종하라'는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각 사람은"이란 말은 한 국가에 속한 모든 개인을 가리키며 물론 기독신자도 자동적으로 포함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국민은 자기가 속한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 위정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지는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는 말 역시 표현만 다를 뿐 똑같은 의미입니다.
  즉 '모든 세상 국가 권력의 출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내용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의 말씀은 그런 국가 권력을 "거스리는" 즉 반역 행위는 "심판" 받아 마땅한 것이라고까지 다시 한 번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국권에 복종하라'고 했을 때 그것은 결코 세상 권력 그 자체를 최고로 높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그 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 역시 "인간에게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3-17)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말씀들은 기독신자는 누구든지 국권을 존중하고 순복해야 함을 명백히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 아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국가라는 제도와 위정자라는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것들을 당신의 나라 천국에 속한 백성들이 이 지상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산하에서 유대인은 상당히 특별대우를 받던 민족이었습니다.
  유대교는 다른 여타 이방 종교들과 아주 다른, 까다로운 관습들이 많았는데 로마제국은 그런 것들을 다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 한 예로써 유대에 파견된 로마 총독은 무언가 새겨져 있는 로마 문장을 예루살렘 성안에 가져 들어가지 않도록 금지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 성전 안뜰은 이방인들이 절대로 못 들어오도록 되어 있었는데 만일 로마시민이라도 그 법을 어기면 산헤드린 공회가 요청할 때 사형까지 허락해 줄 정도였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 정부로부터 그런 유대교의 일파라고 인정되었던 까닭에 그와 같은 수준의 법적 보호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 12절 이하에 나타나는 대로, 에베소에서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고소해 왔을 때 갈리야 총독이 바울을 무죄 방면해 준 것도 바로 그런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이후로도 약 10년 동안 그 같은 로마의 우호적 보호는 계속되었고 사도 바울은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유롭게 기독교를 전파했으며, 최후에는 '가이사에게 직소'할 수 있는 로마시민으로서의 특별권리 또한 복음전파를 위해 잘 써먹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맥락에서 '무정부 상태보다는 독재가 낫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종교개혁 직후에 독일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농민들이 당한 압제와 고통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의 행동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었던 까닭에, 마틴 루터도 처음에는 그 농민봉기를 지지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성격이 점점 더 무법하고 난폭한 폭동으로 변하게 되자 그는 처음의 입장을 바꾸어서 "폭도의 무법행위보다는 폭군의 정치가 낫다."라고 말하면서 그 폭동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일을 적극 지지하게 됩니다.

  개인의 권리는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국가의 질서와 정부의 공권력까지 침해하게 되면, 결국에 가서는 그 개인의 삶을 안전하게 유지시켜 주는 터전인 국가 그 자체를 잃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노동조합에서 일당까지 받아먹으면서 데모대의 선두에 서서 경찰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폭도들이 오히려 민주투사 취급을 받는 나라, 국방부에서 추진하는 공사를 방해하는 데모를 오히려 국무총리라는 사람이 지지하는 정부가 다스리는 나라, 과연 이런 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권이 없으면 국가도 없고, 국가가 없으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유로운 신앙생활의 배경 그 자체까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런 까닭에 국가라는 제도를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그것을 통하여 이 인간사회에 안전보장과 질서를 유지시켜주고 계시는 것을 깨닫고, 이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보다도 나라의 국권을 존중할 줄 아는 차원 높은 국민의식의 선도자들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국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본문 3절부터 5절 말씀에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라는 말은, '사람이 올바르게 살 때에는 관원을 두려워할 일이 없지만 자기가 악한 일을 할 때에는 그 관원들이 발휘하는 공권력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법 잘 지키고 살면 거리낄 것이 전혀 없지만 범법행위를 저지르면 경찰관이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은 당시 통치자들이 권세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닌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것은 나라의 법을 어기면 죽이기까지 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신자는 누구에게나 사랑과 용서를 발휘해야 하지만 공의 또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덕목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공의라는 것은 억압당하는 자, 억울하게 피해 입는 약한 자들을 진정 사랑한다면 반드시 시행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국법에 따른 사형제도는 성경적으로 볼 때 정당합니다.
  그런 공의는 바로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법 시행이기 떄문입니다.

  반면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고도 했습니다.
  국익에 기여하고 국가의 명예를 높인 사람에게 포상하고 훈장을 주는 따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자기가 지지하지 않는 대통령이 주는 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대통령 개인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거리낄 것 없고 어디까지나 자랑스러운 수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나라에서도 위정자들이 다스리는 지배의 원칙은 동일합니다.
  바로 잘하면 상주고 악을 행하면 벌주는 이 '권선징악'의 방법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는 그런 위정자들이나 공무원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 '사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바로 교회에서는 '집사'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는 '일꾼'을 뜻합니다.
  물론 본문에서는 무슨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불신 관원들이라 할지라도 그처럼 하나님께서 권선징악이라는 공의를 시행하는데 사용하시는 일꾼으로 들어서 쓰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기독신자들은 국법에 저촉될 악한 일, 범죄행위를 저질러서는 아니 되고, 어디까지나 법을 준수하여 함께 질서 있고 공의로운 사회를 세우도록 협력해야만 합니다.

  이런 준법 행위는 반드시 벌이 겁나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투옥, 벌금 때문에 할 수 없이 지키는 수준을 넘어서서, 자기 양심적으로 옳은 일로 판단하고 기꺼이 준법하라는 뜻입니다.
  즉 무슨 감시나 검열이 없어도 기도신자는 성의 있게 법을 지킬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아테네의 대중 민주주의 정치를 반대하고 소수의 엘리트가 이끄는 귀족정치를 선호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연히 정적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 나중에 가서는 자기가 그처럼 비판했던 대중들의 판결에 의하여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간수들을 매수하여 외국으로 탈출 준비를 다 해 놓았지만, 그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거부하고 태연히 독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우리나라 국회에서 통과된 대통령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심사되고 있던 중에 있었던 한 사건을 잊을 수 없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기 하루 전날인가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여야 대표들이 무슨 토론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먼저 야당 대표에게 "헌재의 판결이 어떻게 나든지 간에 기꺼이 승복할 것인가?"라고 묻자 야당 대표는 "승복할 것이다."라고 곧 대답했습니다.
  꼭 같은 질문을 여당 대표에게 물었을 때 그가 '승복하겠다'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저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국회와 헌법재판소를 통하여 지극히 합법적으로 판결되는 결과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네 뜻과 이익에 맞지 않으면 승복할 수 없다는 사람이 이 나라의 여당 대표가 되어 있었으니, 만약 그때 헌재가 대통령 탄핵안을 승인했더라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작정이었습니까?
  상식 중에도 가장 기초적인 상식에 불과한 것까지도 갖추어져 있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 이 나라의 정치가들 중에 수두룩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국법을 따를 수 없는 경우란 단 한 가지밖에 없는데 바로 그 국법이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될 때입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바벨론제국이라는 이방 나라에 잡혀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권력이 그들로 하여금 성경에서 금하는 부정한 음식을 먹게 하려 했을 때, 느부갓네살이 큰 우상을 만들고 모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절하라고 했을 때,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바사제국의 다리오의 특별 법령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을 금지했을 때,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약간의 고민조차도 하지 않고 그 법에 불복했습니다.
  이처럼 국법이 기독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성경을 불순종하게 강요할 때에는 당연히 불복해야 하지만, 그런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자는 그 누구보다도 나라의 법을 잘 지키는 국민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성경 말씀을 법을 지킨다는 자들이 세속적인 수준의 권선징악의 법에 걸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될 소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살려고 한다는 신자들이 세상 공무원들을 속이려는 범법행위를 저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자세와 꼭 같이 '양심을 인하여' 국법을 준수할 줄 아는 모범 시민, 준법 국민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자는 국민의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6절과 7절에 이어서 기록하기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라는 말은 바로 국민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 의무로 대표적인 것은 세금인데 물론 당시 로마제국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말하는 "공세(tribute)"란 각 개인에게 부과되는 세금으로서 바로 재산세나 인두세 같은 것에 해당됩니다.
  "국세(custom)"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은 당시 물건이나 상품 거래 등에 부과되었던 세금으로서, 오늘날의 관세, 영업세, 소비세 등에 해당될 것입니다.
  즉 국가가 국민에게 어떤 종목으로 의무를 지우든지 간에 다 시행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가리켜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고 했습니다.
  국가가 공무원들을 통하여 국민을 위해 해 주는 일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치안 유지, 도로 공사, 공립학교 등등, 하나하나 세어보면 우리가 국민으로서 받는 혜택들이 아주 많은 것입니다.
  그처럼 국민으로서 누리게 되는 권리와 혜택만 생각하더라도 국민에게 주어지는 의무는 당연히 치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유대인은 로마제국 산하에서 거의 완벽한 법적 보호와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유대인이나 기타 산하 식민지에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 세금 납부뿐이었습니다.
  로마 정부에 세금만 잘 바치면, 민족의 자치권까지도 인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꽤 많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들은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가 하면 소위 '밀리시아(militia)'라는 자체 군사조직까지 양성해 가면서 정부를 대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부 따위 없어도 자유롭게 잘 살 수 있는데 웬 간섭이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네들을 압제한다고 여겨지는 그 정부, 그들 생각에는 없어져야할 바로 그 정부가 실상은 그들의 생활과 권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무정부주의자들이 '밀리시아'를 조직하면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권력기구를 이미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납세의 의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저 유명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말씀만 들어도 틀림없습니다.
  로마 정부는 분명 유대인을 무력으로 예속시킨 정부였지만, 그 정부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를 탄압하지 않는 한 그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 역시 당연해 행해야 한다고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요즘 이 나라 정치권 일각에서는 '목사를 비롯한 성직자들도 세금을 내야한다.'고 주장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금 바치라고 하셨으니 목사도 세금 내는 것이 당연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주장의 진짜 저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목사로 하여금 세금 내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영리단체인 교회를 기업과 같이 취급하는 것과 직결됩니다.
  그리고 일단 교회가 기업처럼 취급되면 그 교회 안의 부교역자와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되며, 그렇게 되고나면 민주노총 같은 데서 데모대원을 파견해서 교회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진짜 내어야 할 국민연금도 제대로 안 낸 사람은 뻔뻔스럽게도 보건복지부 장관 자리에 버젓이 앉아 있는 것이 이 나라 꼴이 아닙니까?

  국권을 존중하고 국법을 따르는 자라면, 그 국권과 국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무, 납세에서부터 시작하여 병역의 의무에 이르기까지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며, 이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이 총을 쏠 수 없다고 병역의무 수행을 거부하는 것은 명백히 반국가적인 동시에 비성경적인 태도입니다.
  신자가 장사하면서 세금을 속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껏 일하면서 돈을 벌고 우리의 자녀들이 기회균등한 교육을 받고 우리가 삶의 즐거움을 평안하게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이 나라가 앞으로도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생존권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 수 있는 부국강병의 나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한 사람 국민으로서의 의무부터 충실히 수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 크게 세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세상 국가는 영적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기독신자는 정권과 최소한의 관계만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이들은 그래서 기독신자는 국가 기관에 취직하면 안 되고, 투표 행사나 징병에 응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서,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둘째는, 교회가 세속 정치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기독교 이름으로 정당을 만들고 교단이나 목사회의 이름으로 어떤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초대 기독교가 박해 시기를 지나고 국교로 인정된 후 사제들이 정치적 권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바로 중세의 암흑시기로 빠져 들어가게 된 것처럼 교회 세속화와 타락의 첩경이 됩니다.
  셋째로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인데, 바로 '국교분리'입니다.
  이 말은 교회나 신자가 국가에 대하여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오직 국가가 교회의 신앙자유를 철저히 보호해 주는 한 교회는 정치적으로 국가에 관여해서는 아니 되며 개인 신자들은 그 국가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기독교를 박해하는 정권만이 교회의 대적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비판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외의 어떤 정치적인 운동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각 신자들은 어떤 정당을 지지하거나 데모에 참석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단체나 교회의 이름으로 어떤 후보를 지지하거나 무슨 정치적 압력단체를 만들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국가란 유대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로마제국이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었으며 이 로마서를 받고 있는 성도들도 대부분이 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로마제국의 국권과 국법을 존중하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가르친 것은 그래야만 신자가 살 수 있고 교회가 존속되고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신자들이 로마제국을 향해서도 그러해야 했다면, 오늘 조국 대한민국을 대한 우리들의 자세는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동요 가사에도 나오듯이 정말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나라'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이지 결코 북조선인민공화국을 포함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이지 한민족이라는 민족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주권'과 '영토'와 '국민'이 있는 자주독립국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세 번째 조건은 '민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민'이라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수호하면 우리 민족이 살고 북한 동포를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지만, 민족공조만을 외칠 때에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보호와 혜택을 잃게 될 날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조국 대한민국을 귀중히 여기고 또한 반드시 지켜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도 "...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과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생존권을 위하여 이처럼 '좋은 나라'로 만들어주신 조국 대한민국을 인하여 항상 감사하고 그 법과 의무를 지키며 또한 계속하여 이 조국의 번영과 이 대한민국을 통하여 북한 동포를 해방시키게 되는 그 날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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