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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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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를 켰습니다.
기독교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목사님이 누구인지 이름조차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아주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 목사님이시라는 것은, 느낌으로 알았습니다.
은퇴하실 때가 가까우신 분인 것 같고, 또 인생으로 말하자면, 말년에 접어드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내용도 없었고, 성경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파헤치는 설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설교였는데, 그 분의 설교가 제 마음에 얼마나 감동을 가져다  주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것이 바로 명설교구나?’하며,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가슴에는, 잔잔한 감동이 밀려오고,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게 되더군요.

그 할아버지 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의미 있고 행복한 것은, 사랑을 베푸는 일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에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여러분! 사랑하십시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사랑만이 인생의 행복이요, 참 의미요, 사랑만이 인생의 복된 열매입니다. 인생에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하면서, ‘사랑합시다.’ 라는 말씀을, 연거푸 반복하셨습니다.
인생말년에 접어든 할아버지 목사님의, ‘사랑하며 살자’는 그 말씀이, 얼마나 큰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내 인생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때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무엇이 가장 귀하고 소중할까요?
주님 앞에서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 가족에게 남길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크리스토퍼 몰리]는, ‘만일 우리 인생이, 단지 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 모두는,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며,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가장 귀한 것이며, 영원한 것이며,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가슴 저리도록 후회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혹은 병으로, 자식을 일찍 보낸 부모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식에게,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아픔입니다.
좀 더 사랑하지 못한 아픔, 따뜻한 밥을 한 번 더 해 주지 못한 아픔이,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큰 후회로 남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부모님이 세상을 뜨셨을 때, 자식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살아계실 때, 부모님을 좀 더 사랑하지 못한 아픔입니다.
좀 더 효도하지 못하고, 좀 더 잘 모시지 못한 아픔이, 불효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지만, 가장 큰 후회를 남기게 만드는 것은, ‘좀 더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단언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최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한다 해도, 예언하는 능이 있다 해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또, 구제의 선행을 해도,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지만, 사랑은 영원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4:1절에서는,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본분과 삶의 의미를, ‘사랑’에 두고 있습니다.
성도의 본분 또한 사랑이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으니라.”(고전 13:3)
이는, 구제의 정신도 사랑이요, 선행의 정신도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2)
이것은, ‘믿음까지도, 사랑의 정신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단 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느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느냐?,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아주 진지한 질문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예수님의 관심이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무려 세 번에 걸쳐 행해졌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합니다.
잠시 후, 주님의 질문이, 또 이어집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주님의 질문은, 무려 3번이나 반복되어졌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던 죄인입니다.
계집종 앞에서 벌벌 떨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저주하고 맹세하며,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죄로 말하면, 하나님을 저주한 죄요, 씻을 수 없는 죄요, 가증스럽고 비굴하기 짝이 없는 죄인입니다.
수제자라고 하는 사람이 말입니다.
그 후,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부활의 몸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두 번씩이나 찾아오셨지만, 제자들은 고기 잡으러 간다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 때, 세 번째로 주님이 찾아오시는데, 그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씩이나 만났으면서도, 고기를 잡으러 간 것은,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죄책감 때문인 것을 보입니다.
‘나 같은 놈이, 무슨 수제자란 말인가?’
‘나 같은 놈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죄책감에 눌려, 절망하고 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나를 부인했느냐?’ ‘네가 이럴 수 있느냐?’ 원망도 책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입니다.
네가 나를 버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네가 어떤 죄를 지었고, 과거에 네가 나를 부인했고, 과거에 네가 큰 죄를 지었던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이것을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베드로]만 주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주님을 부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요나] 선지자만 주님을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원망했었고 불평했었습니다.
주님을 배반하여, 멀리 멀리 떠나던 죄인입니다.
그런 나에게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 질문을 하시는 까닮이 무엇일까요?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니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바로 이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깊은 절망에 빠진 상태입니다.
과거의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놈이, 어떻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겠느냐는 자멸감에 빠져, 주님의 곁을 떠나,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주님은, [베드로]의 죄도 보지 않으시고, 그의 허물도 보지 않으십니다.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더 큰 사랑을 받기 원하고 계십니다.
/////15절에 보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하고 물으십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원하시는 것은, 남들보다 나를 더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주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가정에,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가난도, 시련도, 아픔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힘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약한 것을 감싸주고,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준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와, 죄에 대해 책망하시지 않으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미 [베드로]의 마음을 아셨고, 이미 [베드로]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쳐나가, 통곡하며 울부짖던 [베드로]의 눈물을 보신 주님께서, 이미 그 때 [베드로]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베드로]를 너무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고달픈지 모릅니다.
때로는 좌절과 절망에서 허우적거리며, 정신이 몽롱해짐을 느낍니다.
특히, 죄와 허물로 인한 내 영혼은, 목마르고 숨 가쁜 사슴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내 인생의 새로운 시작은, 분명히 시작될 것입니다.
완전히 망가졌던 [베드로]의 인생이, 주님과 더불어 다시 시작되었던 것과 같이, 내 인생도 그렇게 새 출발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나 또한 주님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세상에 거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절망의 자리에 놓여있을지라도,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고,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려 붙드시거늘,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 또한 주님을 사랑하며 의지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새롭게 펼쳐질 것이 분명한 줄 믿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나의 죄와 허물을 묻지 않으십니다.
과거의 일에 매달리시는 분도 아닙니다.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손을 잡고 다시 시작하자!”
실패하여 좌절한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오늘 내 귓가에 들려옴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고백하며, 주님께로 달려 나아가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인생을, 주께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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