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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 (골 1: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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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 
골로새서 1 : 24 - 29

I. 지상명령

  유치원에 갔다 온 아들 독수리가 엄마 독수리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 독수리 맞지?” “그럼 우리 새끼 독수리지.” 밖에 나가 놀다 오더니 “아무래도 이상해. 엄마, 나 독수리 맞지?” “그럼.”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엄마, 진짜 진짜 나 독수리 맞지?” “그래, 이 닭대가리야.”

  셀 교회는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입니다. 예배의 영광을 상실하지 않는 교회, 셀의 능력을 잃지 않는 교회입니다. 독수리가 비상하여 나는 이유는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서입니다. 독수리가 닭대가리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살 수 없는 비전의 사람들, 두 번째 시간 「복음전도」- 지상명령에 관한 비전을 함께 선포 받기를 원합니다.

  지난번 제가 L.A에 머무는 그 시간 우연히 T.V를 틀다가 한국을 많이 사랑했던 세계적 컨설턴터 피터 드라커가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그분이 한국교회를 향해 했던 조언이 있습니다. “너무 많은 일을 너무 열심히 하려 하지 말고 올바른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른 초점과 바른 목적을 알고 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윌로우크릭 교회의 빌 하이블스 목사님은 최근 당신의 목회에서 새로운 고민을 말한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나는 지금까지 균형 잡힌 교회라고 생각을 했다. 건강한 신앙생활이 어떤 신앙일까? 나는 지금까지 균형잡힌 신앙생활이 건강한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 건강한 신앙생활은 목적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목적에 맞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교회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데 자신의 목적과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여러분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 초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1, 요17:18) 구원받은 우리는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파송받은 대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은 세상의 종말의 때가 궁금하여 주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7-8)

  엉뚱한데 호기심 갖지 말고 위대한 명령 - 복음전도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우리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다. 그것은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명을 이룰 수 있다면 나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명을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가장 큰 목적, 가장 위대한 명령 - 지상 명령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28:19-20)



II. 복음전도가 지상명령인 이유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이 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천사도 흠모하겠네” 이게 복음전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가족을 세워가기 위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가족은 영원히 함께 살면서 서로 사랑할 가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족을 이 도시 구석구석 전세계 열방 모든 곳에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에게 이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너희가 이 사역, 이 사명을 완성해 주길 바란다.”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마지막날 하나님과 천사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태어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우리의 가족으로 삼는 일은 누구에게 맡기실 생각입니까?” “내 자녀들에게 맡길 것이다. 저들이 구원받았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할 것이다.” 또 천사가 묻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부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다른 계획이 뭐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No, Plan! 다른 계획은 없다. 이 일은 가장 소중한 일이요, 가장 소중한 복이기에 오직 소중한 내 자녀들에게만 맡긴다!”

2.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인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크리스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만큼 신뢰하십니다. 내가 전하지 아니하면 그들은 멸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그들이 멸망하면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 죽음에 대한 피 값을 네게 물을 것이다”(겔3:18)

  만일 내 친구가 에이즈나 암으로 죽어갈 때 내가 그 치료법을 알고 있다면 마땅히 그 정보를 알려 주어야겠지요. 그 치료법을 숨기거나, 무관심하고 게을러 치료책을 알려주지 않아 내 친구가 죽었다면 그건 무서운 범죄가 될 것입니다.

  보십시요. 우리는 이보다 더 엄청난 영원한 생명,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내 이웃, 내 친구, 내 가족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러” 여기에 전도의 단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소식을 전할 때 우선 내 가족, 내 친구들에게 먼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곳이 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아파트, 마을, 도시에서 이 명령을 수행하라고 하십니다. 여기가 내 유대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땅끝까지 이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교회에 오랫동안 다닌 사람은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얼마나 무섭고 절망적인 것인지를 잊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에게 가장 긴급하고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것보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행복과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소식이 나를 통해 죽은 영혼들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은 정말 가슴 설레이는 일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기쁨입니다.

3.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인 세 번째 이유는, 복음전도는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내 삶의 여러 목적 가운데 천국에 가서는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는 오직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내가 할 수 있는 긴급한 사명입니다. 내가 살아 있어도 그가 죽으면 끝나버리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살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전도는 이 땅에서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구원해 내는 일은 오직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감당할 수 있는 사명입니다. 만약 여기서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얼마나 긴박하고 중요한 일입니까?

  셀교회의 아버지 랄프 네이버가 들려주신 자신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간호사였는데, 아내를 통해 한 의사를 친구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는 종교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랄프는 이 사람을 어떻게 주님께 인도할까 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성경책을 사서 생일날 주면서 성경공부를 함께 하자고 해야지.’ 그래서 성경책을 사서 책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때 마침 아내가 임신을 했고, 해산할 때 그 의사와 랄프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의사와 야구경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성령께서 랄프의 마음에 영생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아직 야구 이야기가 안 끝났기에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랄프는 빌리 그래함전도 집회를 위해 영국에 갔다 3주후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침대에서 그의 아내가 울고 있었고 많이 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여보 왜 우는 거야.” “그 의사가 죽었어요.” “아직 나이가 어린데. 어쩌다가?” 그가 수상스키를 타러 갔다가 떨어졌는데 다른 보트가 그 사람을 지나가서 몸이 잘라져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랄프의 책장에는 성경책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그의 장례를 랄프가 집례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 집에 가서 가정부를 만났는데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랄프, 그 의사는 당신을 존경했어요.” 그가 말하기를 “그가 당신과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날밤 성령께서 내가 이미 저 사람의 마음을 준비시켜 놓았으니 말하라 했는데 그는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랄프는 자신의 생애동안 가장 후회되는 일 가운데 하나로 들려주며 눈물을 글썽이었습니다.

4.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인 네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명은 영원한 중요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는 다른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복음 전도의 결과는 영원히 남게 됩니다. 때문에 내 이웃이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사명보다 서둘러 감당해야 할 어떤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고 나면 이 사명을 수행할 시간 하루가 줄어든 것입니다. 일년을 살고 나면 일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루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당신이 주께 돌아오도록 도왔다면 그와 더불어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두 “아무렇게나 살수는 없다. 비전을 따라 살자”라고 몸부림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로 인해 천국에 가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영원한 세계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위대한 기쁨입니까?

  죠지 스위팅 박사는 “한 사람이 이 땅에 1천년을 살면서 한 사람을 전도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그것 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영국 글래스고우의 유명한 설교가 존 하퍼 목사가 무디 기념교회 초청으로 타이타익호를 승선 미국을 향해 가던 중 배가 그만 빙산과 충돌해 파선하고 말았습니다. 바닷물에 떨어진 하퍼목사는 구명대 없이 헤엄치던 중 다른 쪽에서 널빤지 조각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한 젊은이를 발견했지요. 하퍼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젊은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러자 그 젊은이는 “아뇨”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파도가 치는 바람에 하퍼는 힘에 겨워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떠올랐습니다. 몇 분 후 다시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하퍼는 그 청년을 향해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했습니까?” “아니오. 아직 안했습니다.” 이때 다시 큰 파도가 와서 하퍼를 삼겼고 젊은이는 구조대에 의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얼마 후 한 젊은이가 뉴욕에서 열린 기독청년집회에 참석해 자신의 이야기를 간증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존 하퍼에 의해 마지막으로 전도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외치던 그 말이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을 때, 우리 혀로 마지막 하고 죽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얼마나 커다란 기쁨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내 아들아, 딸아, 참으로 장하구나. 생명이 꺼져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너는 네 혀로 나를 원망하지도 않고, 왜 이렇게 죽어야 하냐고 묻지도 않더구나.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를 전하는 너의 그 행동이 나를 영화롭게 했구나!”

  우리가 죽어 없어진 후에도 남을 수 있는 중요한 것 -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퍼는 죽었지만 복음을 전해들은 청년은 살아 남아 또 복음을 전합니다. 그의 복음은 남아 생동합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메시지를 기억하십니까? “한 영혼을 구한 것은 우주를 구한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몸부림이 있다면 “한 영혼이라도 더”, “한 영혼이라도 더”가 아니겠습니까?



III. 위대한 고난이 위대한 기쁨이 되는 역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이 위대한 명령을 감당할 수 있다면 어떤 댓가, 어떤 고난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아픔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괴로움을 기뻐한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말입니까?

  이 짧은 구절의 말씀은 함축적이면서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구절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명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께 무슨 남은 고난이 있는가? 이 남은 고난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불충분하다거나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기에 완전하고도 충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남은 고난이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이 고난의 사실을 증거하는 복음전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부터 모든 성도들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성도의 가장 위대한 기쁨은 주님의 위대한 명령을 감당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적어도 성경의 전도자들에게 있어서 전도는 낭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 생명을 거는 모험이었습니다. 전도에는 엄청난 고난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비유하여 남은 고난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첫째로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이 완전한 우리 구원의 도구가 되었듯이 남은 고난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길이 됩니다. 둘째는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 되었듯이 남은 고난의 분량은 예수를 향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남은 고난의 의미를 깨달으려면 우리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보상하시기 위해 실제로 어떤 고통을 견디어내셨던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둥에 두 손목이 묶인 채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혹한 몇 갈래의 채찍들은 납덩어리와 뼈 조각들을 끝에 매달고 있었습니다. 이 채찍으로 한번씩 내려칠 때마다 예수님의 등에는 검푸른 채찍 자국과 함께 뼈 조각 끝에 찢겨 피가 쏟아져 나오고 흐물거리는 살점이 묻어 나왔습니다. 이때 피부가 약한 사람들은 옆구리나 등쪽으로 창자가 흘러나왔다고 로마의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상처라기 보다는 차라리 망가져 버린 어깨 위에 십자가가 지워졌습니다. 로마의 관습에 따라 60kg이나 되는 십자가 기둥을 끌고 600m의 험악한 골고다 언덕을 올랐습니다. 쓰러질 때마다 상처가 터져 피가 흐르고 군인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그리스도의 몸은 전율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셨습니다. 그러다 기어코 예수님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마침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이 십자가 기둥이 지워졌던 것입니다. 왜 구레네라고 하는 지명을 성경이 밝히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프리카에서 온 제일 천한 사람을 들어 쓰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구레네 사람처럼 천한 나를 통해 그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기쁘게 지던, 억지로 지던 예수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기쁨으로 하는 것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고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 억지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분명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더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지금 정발산 언덕에 쓰러졌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께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 피로 엉겨 붙은 머리카락에 반쯤이나 가리워진 그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두 삥 둘러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때 두 주먹으로 눈물을 움켜쥐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지요. 주님, 내 비록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천한 몸이요 힘은 없으나, 그 십자가만은 제가 지고 가오리다”하고 나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 그 십자가를 제가 져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사업과 장사에 바쁘니 나중에 와서 지겠나이다”하고 핑계를 대시겠습니까?

  일찍이 복음전도에 뜨거웠던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주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사랑”을 Mission 즉 “사명”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네가 처음 사명을 버렸으니 내가 촛대를 옮겨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급기야 에베소 교회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지금 에베소 교회가 서 있던 터어키에는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살벌한 회교 국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해서 골고다 언덕에 오른 예수님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완전히 발가벗기우게 됩니다. 성화에 보면 차마 예수님의 하체까지 벗길 수 없어 수건으로 가려 놓았습니다만, 로마 십자가 형은 사형수의 옷을 완전히 벗겨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발가벗기우신 예수님 주변에는 어머니 마리아, 12제자들 그들을 따르던 마리아와 수많은 동네 여인들 모두다 얼굴을 아는 그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창피를 당하신 것입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이요, 창조주께서 사악한 그 인간들 앞에서 완전 나체로 창피를 당했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십시오. 물론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부끄러움도 느끼실 것입니다. 창피와 수치를 당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예수께서 나 때문에 당하신 그 창피와 수치와 비교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예수를 부끄럽게 여기면 예수께서도 최후 심판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예수를 전파하다가 높아진 위신이 떨어질까봐 두려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차라리 인생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의 환영을 받는 여러분이 되십시요.

  오래전 (1973년 12월호) “승리의 생활”에 이런 글이 실려있습니다. 만삭이된 어떤 여인이 무릎까지 눈이 쌓인 추운 어느날 산길을 걷다가 너무나 힘이 들어 눈 위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기진맥진 쓰러져 죽게 됩니다. 때마침 이른 새벽 선교사 한 분이 새벽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짚차를 타고 눈길을 가는데 불빛에 이상한 물체를 발견하고 가까이 가 보았더니 아기 울음소리가 눈 속에서 들려오고 왠 여인이 나체로 눈 위에 죽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기를 낳고 아기를 살리기 위해 속옷까지도 다 벗어서 아기를 싸놓고 자신은 얼어죽은 것입니다. 후에 이 아기는 선교사의 양아들로 훌륭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서양 선교사가 그 옛날의 상황을 그 양아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네 어머니의 신분을 사방에 수소문 해 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어느 산 어디에 네 어머니를 묻었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네 어머니가 너를 살리고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청년은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두문불출입니다. 몇날 며칠을 방에서 드러누워만 있던 이 청년이 눈이 펑펑 쏟아지자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나가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무덤을 부둥켜 안고는 “오 어머니 내가 당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다 벗어 어머니의 무덤을 덮어놓고 한참이나 서 있다가는 또 웁니다. “오 어머니 그때 이만큼 추웠습니까?” “이 만큼 부끄러웠습니까?”

  날 위해 십자가의 고난 당하신 주님의 발 밑에 엎드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주님, 당신을 위해 내가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위대한 명령을 주소서.”

- 네 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 네 가족을 구원하라.
- 네 이웃을 살려라.

  “예 주님. 당신의 위대한 명령을 위대하게 감당하겠습니다. 그 명령을 감당하는 길이라면 어떤 댓가라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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