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라에서 엘림으로 (출 15:22-27)

  • 잡초 잡초
  • 751
  • 0

첨부 1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모든 일이 기대한대로 잘 진행되고, 인생이 참 살만한 가치가 있으며, 삶이 하나님의 은총이고 축복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인생에서 이런 행복감을 맛볼 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인생 도처 유청산이라,." 다시 말하면 "삶의 길에 푸르른 산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이런 행복감이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참 행복하다고 느꼈는데, 다음 순간, 갑자기 폭풍우 속에 휘말리게 되고, 머리에 이고 있던 하늘이 캄캄한 어두움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삶이 꼬이고, '과연 인생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고, '역시 삶은 고통이다' 하는 정 반대의 결론을 내리고 싶은 그런 순간을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기 14장에서 그들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놀라운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그들을 포로로 삼았던 바로의 압제에서 온전히 해방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홍해 체험은 일종의 구원 체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게 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을 만끽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후 찬송을 불렀고 춤을 추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 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을 향하여 행진하는 순례자가 되었습니다. 낮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들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신바람 나는 새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감동체험은 불과 사흘을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홍해를 건너 목마른 사막을 행군한지 사흘만에 그들이 마라라는 땅에 도착해 목마름을 해갈하고자 기대했던 우물에서 물을 마시던 순간 그들의 모든 꿈은 사라졌습니다.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더러는 병들어 누웠고 더러는 그 쓴 물을 토해내며 원망하고 고통 하게 됩니다.

마라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마르'라는 히브리어 형용사에서 나온 말인데 '쓰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 마라라는 단어를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읽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어요. "나를 차라리 마라라고 불러다오." 누가 그랬습니까? 나오미죠? 나오미의 뜻이 뭡니까?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내 이름은 기쁨이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은 전혀 내 이름과 같지 않습니다. 나는 기쁨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차라리 '마라' 라고 불러 주십시오. 나는 지금 고통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로 그 마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마라'에서의 사건을 접하면서 먼저 중요한 질문을 한 가지 던지게 됩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고통스러운 광야의 길로 인도하셨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체험 가운데 가장 위대한 체험은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넌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 여행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22절입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광야로 들어가서"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들어갔습니까? 홍해에서 나와서 광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홍해에서의 구원이 광야여정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매우 길고 긴 광야 길을 걸어야 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신앙의 여정이 막 시작된 것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짧다고만 할 수 없는 인생의 광야 길을 통과하여 천국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주님을 만나신 분들이 기억하실 것은 이제 나에게 새로운 인생 길, 곧 광야 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광야 길을 통해 영원한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한 성경학자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빠져 나오는데는 하루가 필요했지만,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애굽을 빼내는데는 40년이 필요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라는 학교에 넣으시고, 그들이 고통스럽고 힘들어 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훈련시키신 이유는 그들이 애굽에서 지내는 동안 몸에 배었던 세상 적인 생각과 사탄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430년 간 몸에 배인 노예습성을 깨끗하게 청소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인생의 여정 가운데 마라를 만날 때 우리가 해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르짖는 기도를 배우셔야 합니다. 왜 부르짖어야 합니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인생의 길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합리적인 신앙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데 똑같은 말을 왜 반복하는가? 왜 중언부언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귀가 먹었나? 왜 소리지르고 야단을 치나?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도 알고 계신다고 했는데, 부르짖어 기도할 필요가 있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언뜻 들으면 맞는 것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반복과 중언부언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중언부언은 영혼이 실려있지 않은 기도입니다. 중언부언은 마음이 실려있지 않은 기도이며 형식적인 기도입니다. 그러나 절박한 상황, 절박한 문제 앞에서 어찌 반복적으로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마태복음 26장 39절 이하에 보면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세 번씩이나 똑같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결사적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마나 절실하게 기도하셨는지,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의 쓴 물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원망하고 불평할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25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영어로 다시 한번 읽어보면, "Moses cried out to the Lord." 무슨 말입니까?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울고 불고 난리법석을 쳤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귀중하게 쓰임 받았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조르기 때문이었습니다. Crying out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문제만 생기면 하나님께 엎드려 울고 매달렸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절하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을 멸하겠다"라고 하자, 모세는 "한번만 봐주십시오. 한번 용서해 주십시오.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운다 할지라도 이 백성을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울고 매달렸습니다. 40년 간의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즉 모세는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불의 한 재판장과 과부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기도의 자세를 말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과부는 날마다 관가에 가서 재판장에게 부르짖으며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자, 결국은 불의 한 재판장도 귀찮아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불의 한 재판장과 과부 이야기의 결론을 말씀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기적을 맛 볼 수 있습니까? 조르는 사람, 울고 부르짖는 사람, 소리치며 외치는 사람이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영화 관람하듯이 놀러 가는 곳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이 와서 문제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위로 받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코가 석자인 사람이 와서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문제 해결의 응답을 받는 곳,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묵상하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절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와서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기적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모세는 원망을 들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누구든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따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지만,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앞에 어떠한 쓴 물이 있습니까? 어떠한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답답한 일을 당했습니까? 사람에게 따지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특권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광야 길에서 이 부르짖는 기도와 함께 또 하나 배울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말씀에 순종함을 배우셔야 합니다.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모세가 부르짖어 기도하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25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별 것 아닌 나무 가지 하나를 가르치시면서 "그 나무 가지를 저 마라의 쓴 물에 집어 던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느냐고 왈가왈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상징한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쓴 물을 달게 한 것이 아니라, "나무를 던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 물이 달아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무 가지를 사용했느냐"라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그냥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나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찮은 명령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말로는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기도할 때는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실제로 순종해야 할 때는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터넷 유머 코너에 이러한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남편이 도둑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아내 옆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식, 오기만 해보라!" 문 밖에서 부시럭 소리가 들려오자 아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도둑인가 봐." 그러자 남편은 "들어오기만 해 봐라." 도둑은 문을 열고 들어와 두리번거립니다. 남편이 이불 속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말합니다. "뒤지기만 해봐라." 도둑이 농을 뒤져 돈과 금품을 꺼내더니 유유히 가지고 문을 나갔습니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빼꼼이 내민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자식, 또 오기만 해봐라." 이 유머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남편은 행하지 않고 말만 한다는 것입니다. 말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은 말이 아닙니다. 순종은 행동인 줄로 믿습니다. 모세는 하찮은 명령이었지만, 그 명대로 행동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곧잘 순종은 거창한 것을 하는 것만을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교에 가는 것만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에 선교하러 가는 것만이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교회학교 교사를 하라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교회 주위에 있는 휴지를 주우라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한 나무를 집어 던지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찮은 말씀입니다. 그래도 모세는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쓴 물이 단 물로 변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순종이 능력이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기적을 맛본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순종을 결심하고 마라의 샘터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본문의 마지막 절 27절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사막 광야에서는 물샘 하나도 귀한 것인데 물샘이 12개, 종려나무가 70그루--이 정도면 환상의 오아시스이지요. 엘림은 마라에서 남쪽으로 불과 11km 떨어진 것에 위치하고 있는 곳입니다. 마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하나님은 오아시스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에서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엘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은 후에 갖는 큰 축복 중 하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기도 합니다.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8:14). 조금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며, 성령의 인도는 믿는 자만의 큰 특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되 한꺼번에 모든 것을 말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시간표는 항상 어떤 타이밍을 두시고 차근차근 단계를 거치게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6·25전쟁 때 실명을 했던 킴 윅스 자매가 미군의 도움으로 성악을 전공하여 빌리그래함 집회에서 찬양사역을 하면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100m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조심하라,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나는 10년 후, 20년 후 내가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보이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하나님께서 내일도 인도하시고 마침내 제게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킴 윅스 자매를 인도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각자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한 걸음씩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우리는 너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지금 내가 수르 광야에서 겨우 찾은 그 샘에서 마라의 쓴 물을 마시는 어려움이 내게 있을 찌라도 모세처럼 기도하면서 나아갈 때 엘림의 복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다음 길을 열어주시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현재 <마라>의 쓴 물을 맛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풀리지 않는 사업, 답답한 미래,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전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쓰디쓴 <마라>때문에 낙담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물이 없어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름다운 엘림을 만났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더 가 보십시오. 엘림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십시오.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만 힘을 내면 엘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그렇게 비관할 만한 것만은 아닙니다. 비관하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우리에게 마라의 쓴 물을 주시는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를, 우리 가정을 시험하시려고 마라의 쓴 물 같은 어려움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마라의 쓴 물 같은 어려움이 파도처럼 몰려올 때, 모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든지 순종하여 엘림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이곳에 계십니다. 여호와 라파, 그분은 우리의 엘림인 동성교회에 계십니다.

여호와 라파, 그 분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라파, 그 분만이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여호와 라파, 그 분만이 혼돈과 두려움 속에 있는 우리 민족에 새로운 힘과 능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곳, 우리의 엘림, 동성교회에서 말입니다. 아무쪼록 어떤 환경에서든지 우리가 믿음으로 발을 내딛고 걸음마다 보혜사 성령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통해서 우리의 한 생애가 주님께 크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