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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전 세우기 (욜 2: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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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미국의 빌 클린턴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에 수락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Where there is no vision. people perish(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이 유명한 연설은 잠언 29장 18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비전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성경에서 비전이라는 말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는 이 말씀에서 "묵시" 혹은 "계시"라는 말을 비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 이렇게 번역하고있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하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제멋대로 산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비전을 누가 주느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비전을 주시지 않으면 백성은 제 멋대로 산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비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꿈과 이상'이란 말이 나오는데 28절을 보면 꿈과 이상은 '성령께서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진정한 꿈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발견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말하지만 '꿈'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이 말은 1963년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에서 흑인과 백인이 하나되는 세상에 관한 자신의 꿈을 연설한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중의 한 문장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이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 주에서, 흑인어린이들이 백인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꿈에 대한 연설을 듣노라면 절망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절망에 휩쌓여 있는 사람도 이 연설을 듣노라면 없던 희망도 생겨날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귀한 존재입니다.  스스로도 존귀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심으로 존귀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존귀하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존귀한 삶을 산다는 말이며 존귀한 일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현재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고 좌절해 있다면 여러분을 존귀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꿈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의 존귀한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철학적인 주제인 "신 목적론적인 증명"(모든 사물은 목적이 있기에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 각 사람도 목적이 있어서 세상에 태어났다는 의미) 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 각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는 우리가 앞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철야기도 시간에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가치 있고 좋게 보시는지는 한마디로 하나님 당신의 독생자 이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운데 자녀가 있는 분들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더 주고싶은 마음입니다.

여러 해 전 해외 토픽에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15톤 짜리 덤프 트럭이 어린아이를 덮쳤는데 평범한 여인이 자신의 아이를 살리고자 15톤 짜리 덤프 트럭을 들어낸 것은 유명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연약한 사람이 트럭을 들 수 있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초인적인 힘이 나온 겁니다.  그만큼 부모는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만큼 사랑이 깊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자식을 사랑하듯 독생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크고도 넓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롬5:8).  8절의 표현대로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특심하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은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찬양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아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존재들입니다.  무가치한 존재가 아닌 너무나 소중한 존재인 우리를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살아야할 비전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은 비전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 다음주에는 그 비전을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세우며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잘못된 비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중에는 꿈과 야망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꿈' 하면 어릴 때의 희망을 말합니다.  과거 저의 경험을 비추어보면 "너는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대통령이나 과학자가 되겠다고 대답했고, 여자아이들은 선생님이나 간호사가 되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20년 있다가 만나보면 실제로 그 꿈대로 되어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당시 어렸을 때의 꿈들은 말 그대로 한번 꿈꾸어 보았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런 꿈은 상상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다 로또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는 상상을 한번씩 해 보지 않습니까?  혹시 그런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신앙이 아주 좋거나 아니면 희망이 없는 사람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복권에 당첨되는 꿈을 다 꾸어보지만 그 확률은 하루에 낙뢰를 두 번 맞을 정도로 희박한 8백만 분의 1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이런 상상은 말 그대로 공허한 상상이 되고 말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잘 모릅니다.  물론 그 자리가 얼마나 폼 나고 멋있는 자리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꿈꾸지만 대부분 공상으로 끝납니다.

꿈이란 한마디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이 꿈이 잠자다 꾸는 꿈이 아닌 희망으로서의 꿈임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꿈은 대부분 어린아이 때 겉모습의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꿈은 성취되기 어렵습니다.

또 하나는 야망이 있습니다.  야망도 변형된 꿈 중의 하나입니다.  꿈을 국어사전에서는 "현실적이 아닌 착각이나 환각의 상태(dream)"이라고 기록하며, 야망이란 "무리한 욕심을 이루려는 희망(ambition)"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이 얼마나 잘못된 말인가를 말입니다.

물론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망이 "자신의 욕심적인 꿈"이라고 정의한 국어 사전의 말이 맞는다면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도 야망이란 말은 그렇게 긍정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야망이란, 개인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꿈을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이 야망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 야망으로 가득 찬 인물을 꼽으라고 하다면 단연 야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5장 이후에 등장하는 야곱을 보면 온통 장자권을 빼앗고 자신의 복을 얻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형과 싸우다가 지자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창25:26).

야곱은 팥죽으로 형의 장자권을 탈취하였습니다(창25:31).  또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대신 받습니다(창27:19).  이후에도 야곱은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을 속였고 결국은 쳐들어오는 형 앞에서 처자식마저 버리려고 한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오직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한평생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 인생은 험악할 수밖에 없었고 야곱 자신도 창세기 47장 9절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육신만을 위한 꿈과 야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것들은 버려야합니다.  특히 자녀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부모는 잘 지도해 주어야합니다.  최근에는 어린이들이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등 다양한 직업들을 선호하는데 이때 부모들은 자녀들과 많은 대화를 통해서 그들이 바른 비전을 가지도록 지도해 주어야만 합니다.

  두 번째로, 살아있는 비전, 올바른 비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비전(vision)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 있습니다. 잠언 29장 18절의 "묵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존"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포괄적인 은혜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포괄적인 은혜(비전)가 없으면 제멋대로 살다 반드시 망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은 본문인 요엘서 2장 28절에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이상'이란 단어는 "키자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도 역시 '비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늙은이는 꿈을 꿀 것이며"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꿈"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꿈"을 말하기에 비전이라고 번역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비전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개인의 비전이 무엇인가를 쉽게 설명하라면 요셉을 살펴보면 됩니다.  창세기 37장에 가면 17세의 소년 요셉이 꿈을 반복해서 두 번이나 꿉니다.  물론 이 꿈은 요셉과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적 성격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꿈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자신과 가족에 닥칠 일과 그 가운데 자신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 인가도 마음에 새겼습니다.  이 비전은 13년 동안 모진 고난 가운데서 자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으로 팔려가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이 되었습니다(창37:28).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 있을 때에도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창39:12).  이 일로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지만 감옥에서도 그는 비전을 잊지 않았고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해주셨습니다(창39:23).

그리고 그는 마침내  30세에 애굽의 국무총리에 올라 가뭄이 닥친 애굽과 그 인근지역의 사람 그리고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한사람 비전의 사람이 있다면 페르시야의 고위직관리로 있다가 예루살렘성의 중건의 책임을 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비전이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으로 이 비전은 나 개인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살리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꿈이나 야망하고는 분명 구분이 되면서 또한 다른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이 비전을 성령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분명 성경은 말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모두에게 이 비전을 성령님께서 나누어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윌리암 캐리라는 구두수선공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데도 전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이상히 여겨 자신 스스로 선교사가 되어 이방의 선교사로 헌신하여 근대 선교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D.L 무디도, 요한 웨슬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을 받은 후에 자신에게 주어진 비전을 발견하게됩니다.

아프리카 사랑의 아버지인 알버트 슈바이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구원하셨고 나에게 왜 이런 직업을 주셨으며 나를 왜 여기서 살게 하셨는가를 깊이 묵상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비전을 주십니다.

저는 이 비전을 우리 모든 교우들이 받기를 원합니다.  삶이 힘들어지고 물질이 부족하니 사람들마다 꿈이 사라집니다.  희망도, 비전도 사라집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노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게 꿈과 소망과 비전을 빼앗아가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하여 내 비전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큰 문제는 물질이 문제가 아니라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 비전을 마귀에게 빼앗기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지체장애를 원망하녀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송명희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우리같이 한번 불러보십시다.)

여러분 이런 비전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해야 될 제목이 있습니다.  비전의 회복입니다.
나의 비전,  가족의 비전,  자녀의 비전,  교회의 비전이 세워지고 성취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간절하게 부르짖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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