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께서 변형되신 이유 (마 17:1-13)

  • 잡초 잡초
  • 260
  • 0

첨부 1


제자들에게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말씀하신지 엿새 후에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저희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모습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나서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였”습니다(1-3). 오늘은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상당히 의도적으로 3명의 제자들만 선택하여 산에 오르셨고, 다른 아무도 볼 수 없는 광경을 의도적으로 그들에게만 보이셨습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 되신 것이나 ‘저희에게 보이셨다’는 말씀들, 그리고 9절을 보면 산에서 내려 올 때에 명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하신 말씀에서 그 의도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의도성들은 예수님의 변형되심이 제자들을 교육하기위한 측면을 가졌음을 짐작케 합니다.

어떤 교육적 효과가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목격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베드로의 증거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훗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벧후 1:16-18)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과 강림하심과 크신 위엄을, 그리고 존귀와 영광을 변화상에서의 경험과 연관시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당신님의 위엄을 보이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이셨을까요? ‘엿새 후’라는 때의 기록은 수난 기사 외에는 아주 드문 표현입니다. 이것은 본문이 엿새 전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수난 예고’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생각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이 결코 그분께서 능력이나 위엄이 부족해서 당해야 할 일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대적들을 처단할 수 있는 능력과 위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사야 53:2절은 메시아의 모습을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처럼 예수님은 일생동안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는 외모로 활동하셨습니다. 요즘말로 하자면 힘도 없고,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출신성분이나, 학력이나 무엇 하나로도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모습으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것들을 갖추셨다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처럼 무시하고 대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겉모습은 초라해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너무나 영광스럽고 위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과 영광을 잃어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많은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실 때, 촌구석에서 활동하시던 분이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쫄아서(?) 하신 말씀쯤으로 여겼습니다. 스스로 위축되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쫄고 있는 초라한 분으로 여기니 자신들 역시 초라해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무겁기만 하고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분께서 여전히 가지고 계시는 능력과 위엄을 보여주셨습니다. 변형되셨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그 분께서 본질적으로 가지고 계셨던 영광을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약자의 구차한 변명쯤으로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력을 쌓아서 ‘고지’를 점령해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한 처지를 초라하게 여깁니다. 그런 일에 집착하는 분들을 잘 살펴보면 그 내면에 하나님 자녀로서의 위엄이 고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라는 당당함과 자부심이 없기 때문에, 외적인 타이틀에 연연하고, ‘고지’ 점령 전에는 예수님을 섬기면서도 의욕도 기쁨도 만족도 없습니다. 반면 ‘고지’로 가든 ‘저지’로 가든 묵묵히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도 그 내면에 하나님 자녀로서의 영광스러움과 위엄을 상실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은 겉모습은 초라해도 결코 궁색하지 않습니다. 겉모습은 작고 약해하지만 오히려 작은 거인처럼 당당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8b-10절에서 성도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지를 점령하든 저지대에 머물든, 그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내면적 태도입니다. 내면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스러운 위엄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결코 초라하거나 하찮은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고 하는 일이 하찮아 보인다 할지라도, 그 분을 따르는 삶도 결코 초라하거나 하찮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 자체가 영광스럽고 위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도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당신님의 위엄과 영광을 잠시 노출하심으로써, 위축된 제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하나님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거나, 수치스럽게 버려진 것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 하는 일은 유대인들에게 몹시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죽음의 잔혹성 때문에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 쳤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로서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과, 그 분이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을 도무지 조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당혹스러움과 혼동을 느꼈을 것이고, 끔찍하고 수치스럽기만 한 십자가를 져야 한다니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가 단지 저주를 받고 버림받은 표만은 아니라는 것,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존귀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으로는 원래부터 ‘존귀와 영광’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인성까지도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하셨습니다. 아직 그 분의 죽으심이 택함 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까지는 계시하지 않으셨지만, 자기 허물이나 죄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존귀와 영광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해 놓으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는 고난과 괴로움의 관점이 아니라, 그 이후에 있을 존귀와 영광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려면 필연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고난과 괴로움의 관점에서 보면, 당장에 많은 손해와 아픔을 감수해야 할 것 부터 보입니다. 당장 수입이 적어지고, 당장 육체에 고난이 가중되는 것이 부담됩니다. 한 번만 눈감아주고, 한 번만 타협하면 오랫동안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고난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 백성답게 산다는 것은 슈퍼 성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자기를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말씀이 평범하거나 오히려 연약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 해도 십자가를 고난의 관점에서만 보고 있었을 때는 빌빌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회피하고 싶어서 초막 셋을 짓고 그냥 산 위에서 살자고 했습니다(4).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스러움과 존귀함을 체험한 후에 그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5:41절을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 받을 일을 특권으로 여겼고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고난 앞에 담대했으며, 결코 비굴하게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미련해보이고 거리끼는 십자가를 담대히 선포하며 다녔습니다.

초대 교회 순교자들도 주를 위해 고난 받고 죽는 것을 무한한 영광이요 상급이라 여겼습니다. 순교자들 중에서는 아주 여리고 약한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결코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담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이유,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처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십자가를 고난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존귀와 영광’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변형되신 사건은 제자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구속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변형되신 예수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아가 등장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증거가 예수님을 정점으로 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 됩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메시아 예언 기능은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그 소임을 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엘리아가 메시아 이전에 와야 한다는 서기관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것이 참으로 맞는 말이지만 세례 요한이 마지막 선지자로 와서 엘리아의 역할을 충실히 완수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 자녀로서의 내적 위엄을 잃어버리지 않고, 존귀와 영광의 관점에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