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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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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옛 예루살렘 성전 터 위에 황금색 돔을 가진 회교의 바위 사원이 서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헤롯 대왕이 지은 성전이 서 있었습니다. 헤롯왕은 유대교 신자가 아니었으나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무려 46년에 걸쳐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거대한 녹백색 대리석으로 지은 성전은 멀리서 보면 마치 물결치는 바다와 같이 보였으며, 석양이 되면 금으로 입힌 성전의 앞면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성전이 서 있는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은 도합 아홉 개였는데 미문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미문은 그 이름처럼 문 가운데서도 두드러지게 우아한 정취를 풍기는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문 곁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걸인이 남루한 차림으로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곧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역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서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제 구시는 요즘 시각으로는 오후 3시를 말합니다.

두 사도가 미문 곁을 지나려는데 걸인이 손을 내밀어 구걸했습니다. 두 사도는 걸음을 멈추고 그 사람을 주목하고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걸인은 자기 앞에 섰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으므로 다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일어서서 두 사도와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많은 사람이 사도들의 전도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수가 무려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두 사도가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된 비결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나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위해 스승을 버리고 도주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마저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걸어 잠그고 방안에 숨어 지냈습니다. 더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자신의 부활을 입증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할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에 앞서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제자들을 포함해서 120여명의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랬더니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당시의 놀라운 광경을 이 같이 증언합니다.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께서 임하시니 제자들에게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열정과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누가 강요하지 않았지만 닫힌 문을 박차고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서 소리 높여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기 전에도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의심이 다 사라졌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성령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연이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무조건 믿지 못합니다.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을 위해서 자신 있게 나서지 못합니다. 그런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시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불분명했던 부분들을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신앙생활에 열정이 없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이 그 원인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읽어서 알긴 아는데 한갓 지식으로만 알기 때문에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는 데도 차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은 가장 차원 높은 앎을 말합니다. 이보다 더 밝히 아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알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는 만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독교 신앙은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무턱대고 믿는 맹목적인 믿음은 비유하자면 기초가 없이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핍박의 바람이 불어 닥치면 맥없이 넘어지고 맙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이성으로 주님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성은 신령한 영적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하신 말씀과 같이, 신령한 지식은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우리 마음눈을 밝혀주셔야 복음을 듣고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분명히 알게 되고 이로 인해 확신에 찬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신앙의 세계에서도 통하는 진리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의 사도들처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두 사도가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고 한 것은 돈을 몇 푼 던져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두 사도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앉은뱅이를 일으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면 앉은뱅이가 일어날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디서 이런 확신이 생겨난 것일까요? 바로 그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두 사도가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완전히 세속화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시험이 쉴 새 없이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사도들의 시대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확고한 믿음을 갖기 원하시거든 사도들처럼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성도들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어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부어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두 사도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은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미문 곁에 앉은 걸인이 손을 내밀어 구걸했을 때 그에게 돈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의 수중에는 동냥할 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에게는 은과 금으로 살 수 없는 권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주의 이름은 죽은 심령을 살리고 온갖 질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고 인생들을 저주에서 건져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줄로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영이 거듭나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없습니다. 죄 사함 역시 돈으로 받지 못합니다.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는 것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돈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도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죄와 죽음과 저주에서 인생들을 해방시켜 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무이한 구세주의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고, 4장 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유일하신 구세주의 이름이므로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주목하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자, 그 때까지 단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그가 즉시로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하고 계시면 “아멘”하십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고 하셨습니다.

믿는 자들 곧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거룩하고 능력 있는 이름을 사용할 자격이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권세입니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의 이름의 권세를 일상의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약점이 많은 사람에 불과하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싸운다면 마귀의 세력을 너끈히 물리치고도 남음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의 이름으로도 귀신을 쫓아낼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귀신들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물러가고 맙니다.

야보고 선생은 말씀하기를 “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 5:)고 했습니다.

기도 응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고,  기도 응답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찬송가에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를 경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시험에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시험에 드는 것은 그 사람이 믿는 자에게 주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활용하지 않은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연약한 상태를 벗어나서 강해져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것은 동정 받을 이유는 될지 몰라도 자랑거리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믿는 사람이라면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려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 6:10)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 16:13)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두 사도와 같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믿고 나아가심으로 모든 시험과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두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걸인을 일으켰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 곁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걸인이 구걸하였을 때, 발길을 멈추고 그 사람을 주목하였습니다. 두 사도는 그 걸인에게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은과 금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은과 금도 그에게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두 다리로 일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두 사도는 알았습니다.

우리 곁에도 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앉은뱅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영적으로 비참한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은과 금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터져 나오는 대형 사건들을 보면 하나같이 돈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거대한 도박장이 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경마나 게임에 빠져서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사람들, 전 재산을 탕진했다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람들 역시 돈에 눈이 먼 상태이므로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두 사도는 미문 곁의 앉은뱅이 걸인에게 은과 금 말고도 더 시급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있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고 한 후에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자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도는 실제로 가진 돈이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 말은 지금 앉은뱅이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줄로 압니다. 이는 사회 문제 뿐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돈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도가 앉은뱅이에게 말했듯이, 우리는 저들에게 “우리 사회가 지금 당면한 문제나 당신이 당면한 문제는 은과 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돈이 희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두 사도가 앉은뱅이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듯이, 우리는 영적 앉은뱅이 상태에 있는 불신 이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두 사도와 같이 저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잘나고 부유하고 건강한지 몰라도 그들의 영적 실상은 병들고 헐벗고 앉은뱅이 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다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의 길에 들어선 우리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사도가 그 걸인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하였듯이, 우리도 불신 이웃을 향하여 “자, 나를 보십시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잘 남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주 예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고 치료된 나의 삶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화목한 가정의 모습,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모습,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모습을 병든 삶, 불화한 삶, 불만의 삶을 살아가는 이웃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두 사도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앉은뱅이 걸인에게 주되 아무 대가 없이 거저 주었습니다. 요즘은 말세가 되니 예수 이름을 팔아서 장사하고, 예수 이름을 팔아서 유명해 지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무슨 신령한 능력을 행하여서 병도 고치고 복도 내려 주는 양 행동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심판 날에 그런 사람들이 주님께 와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할 것이면,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쌍한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값없이 전해 주는 데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사도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걸인을 끝까지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함과 동시에 그 걸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베드로가 입으로 믿음의 선포를 했지만 그 가련한 걸인에게는 혼자 일어설 믿음이 없었으므로 손을 붙잡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교회에 나왔으나 여전히 죄의 문제를 청산하지 못한 채 앉은뱅이처럼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제 발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꾸준히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미문 곁의 걸인이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던 것처럼, 그들도 역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되어 활기찬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포수가 독수리 한 마리를 붙잡아서 쇠사슬로 발목을 묶어 말뚝에 매어 두었습니다. 이 독수리는 자기 발목이 묶여 있는 것도 잊고 창공을 향하여 날아오릅니다. 그러나 이내 발목에 매여 있는 쇠사슬로 인해 땅에 곤두박질쳤습니다. 이러기를 몇 날이고 계속하다 보니 독수리는 그만 자기는 쇠사슬에 묶여있기 때문에 날 수 없다고 날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독수리는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쇠사슬이 끊어졌습니다. 이제 독수리는 한 번 날개 짓만 하면 창공을 훨훨 날아오를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독수리는 그만 체념과 절망 가운데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 가운데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죽음과 저주를 청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무기력한 상태로  살아가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저들이 제 발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믿음으로 권면하고 붙들어 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날 성전에 올라온 사람들은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걸인에게 ‘누가 너를 낫게 했느냐’고 묻자,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이에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때에 베드로가 모인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병인을 낫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 날, 사도의 전도를 받고 회개한 자가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는 경악했습니다. 이튿날 대제사장들이 공회를 열고 그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을 세우고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들은 불과 두 달 전에 무죄하신 예수님을 붙잡아 정죄하고 죽였던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은 이전의 겁 많고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말을 듣은 저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제자인 것과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한다는 말이 “앞으로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두 사도는 비록 무식한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여 어떠한 억압과 위협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행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두 사도와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통해서도 동일한 능력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권세 있는 주의 이름을 믿고 삶 속에 활용함으로써 활기차고 능력 있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뿐 아니라, 아직도 마귀에게 사로잡혀 영적으로 병들고 앉은뱅이 된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 줌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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