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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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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시인 <칼 부세>의 시 한 구절입니다.
[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하길래
  아 , 님 따라 행복을 찾아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 왔노라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하건만... ]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행복을 찾았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행복은 평면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직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면 행복한 삶은 절로 얻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은 그리스도인의 복된 삶의 생활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복 있는 사람이 되어라 합니다. 그런데 팔복을 통해서 주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핵심은 바로 마음입니다. 기독교는 지성을 배재하진 않지만 지식의 종교가 아니라 마음의 종교입니다. 행위를 배재하지는 않지만 행위의 종교가 아니고 마음의 종교입니다. 복 있는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팔복 중 앞에 4가지는 하나님과 관계라면, 나머지 4가지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맺은 자가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복입니다.

인간관계에 나타나는 첫 번째 복이 무엇입니까?
1. 팔복의 다섯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7절)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즉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서 힘의 통치가 영웅시 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철인들은 긍휼이나 자비는 영혼의 질병이라 할 정도로 경멸했습니다. 이러한 때 예수님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며 참된 강자의 모습은 바로 긍휼을 베푸는 자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럼 긍휼이란 무엇인가?
“ 당연한 결과로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 그를 돕는 미덕 “ 이라 합니다.
<토마스 왓슨>은                                  <2>
「사랑과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 품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세 자매」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자만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사랑과 긍휼의 차이에 대해 사랑은 건강할 때 방문하는 친구와 같고, 긍휼은 병이 들었을 때에 방문하는 의사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건강할 때의 친구는 기쁘고 반갑지만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나 병든 환자에게 의사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긍휼은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 것입니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볼 때 내가 건져주어야겠구나, 하는 마음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합니다. 이 측은지심을 성경에서 긍휼이라고 말하는데 구약성경에서 이 긍휼에 해당하는 단어가 “헤세드”인데 150번 나옵니다. 이 말은 거의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렘31:20절의 경우입니다.           
[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잘못하여 책망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신다고 합니다.
“내가 깊이 생각하노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자녀된 우리들을 꾸지람하시고 채찍질하실 때에 고민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자식을 매질 할 때에 느끼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측은한즉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고 말할 때 “측은한즉”에 해당하는 원어는 “헤세드”로서 성경에서 긍휼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이 말은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 즉 단장의 고통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로 인하여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인간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바로 잡아 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 입니다.

본래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시86:15절 [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
엡2:4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이라 합니다.
이 긍휼이 제일 잘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3>
그래서 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주님의 긍휼의 성품이 성도에게 나타납니다. 즉 주님의 긍휼로 죄사함을 받고 그 은총을 깨달은 자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골3:12절 [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 입고 ] 옷 입으라는 말은 그렇게 행하라는 말입니다.
특히 우리는 불신자에게, 약자에게, 나아가 내가 싫어하는 자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약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강자의 미덕인 것입니다.  미워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 때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면 면류관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눅10:30- 선한 사마리안의 비유에서 긍휼을 베푼 자가 예수의 참된 이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므로 긍휼히 여기는 복 있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라면 반드시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긍휼을 기억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참조/마18:21-35절)
긍휼,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판단해 주는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것을 기억하며 그 긍휼에 감사하여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면 우리는 참으로 거듭난 자요, 참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우리의 영혼이 심각한 질병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한 교포의 아들이 하버드 의과대학에 지원하였는데 불합격하였다고 합니다. 자식 교육에 목숨을 거는 한국 어머니가 그 학교에 가서 전과목 All A를 받은 아들이  왜 떨어지냐고 항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학교 당국에서는 ` 당신의 아들은 고등학교 성적은 미국에서 최고입니다.  성적만으로는 당연히 합격입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다니는 3년 동안 한 번도 헌혈을 한 적이 없습니다.  <4> 의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남을 도우려는 마음이 없이 지식만 가지고 의사가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불합격 시켰습니다. `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의과대학에 들어가려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긍휼이 없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약2:13절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

우리는 모두다 하나님께 큰 죄를 지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영원한 형벌과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그런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오직 불쌍히 여겨주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는
이처럼 저주받아 망할 수밖에 없는 파멸의 운명으로부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나의 삶과 대인관계의 준거기준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대할 때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너그럽게 용서하는 마음을 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8복은 축복의 산에 올라가기 위한 8개의 베이스캠프와 같습니다.
그러니 바로 5번째 베이스캠프인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4번째 캠프를 통과해야 합니다.
4번째 캠프가 뭡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족히 하나님으로 배불림을 얻고
그 축복경험을 나눠주는데서
          긍휼히 여기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말 기억나시죠?
맛을 아는 만큼 멋있게 살아간다는 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자만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찬493장 3절 가사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 주님을 모신 맘 새하늘이로다.
그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는 복이 무엇입니까?              <5>
3.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는 복은 무엇입니까?(7절)
이 말은 왜?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까? 라는 말에 답입니다.
그것은 긍휼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였다면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천국도 갈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마18: 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
일곱 번은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 아니냐, 일곱 번 뿐만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해주라  ]고 합니다.
그리고는 비유를 들어 긍휼에 대해 교훈하십니다.
어떤 종이 임금에게 1만(一萬)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당시 노동자의 하루품값이 1데나리온입니다.
노동자가 1달란트를 모으려면
      한 푼도 쓰지 않고, 하루도 쉬지 않고, 16년을 모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일을 해도 5 달란트도 마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하는 임금에게 1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임금은 종에게 1만 달란트의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종은 돈이 없어 임금에게 빚을 연기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임금은 종의 몸과, 종의 처와, 종의 자식들과,
    모든 재산을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가난한 종은 땅에 엎드려 임금에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종을 불쌍히 여겨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종이 어휴~! 살았다 하고 궁궐 밖을 나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났습니다.
    [ 야~! 너 오늘 잘 만났다 ] 멱살을 잡고 끌고가
                      고소하여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다른 동관들이 보고는 주인에게 고하니
주인이 노발하여 그 종에게 하는 말이
[ 이 악한 종아 네게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당치 아니하냐 ]
하고는 붙잡아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마18:35절
[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긍휼의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형제에게 긍휼을 베푸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팔복의 여섯 번째는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까?            <6>
4.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8절)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먼저 청결한 마음입니다.

파스칼의 사후에
그의 하인이 윗저고리 안에 꿰 메인 곳에
그가 언제나 지니고 다녔던 양피지 조각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것이 아닌 하나님 ]
그는 위대한 과학자요 철학자였지만
지혜롭고 슬기있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어린 아이들과 같이 순전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사람 - 바로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청결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청결>이란 <카다로이>라 해서
`다른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순도 100%의 정금에 청결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청결이라는 말의 영적인 뜻이 무엇이냐?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하나님만 생각하는 마음이 청결한 마음인 것입니다.
나누어짐이 없는 진실한 마음입니다, 순전한 마음입니다.
키에르 케코르는 청결한 마음은
[ 우리의 의지가 한 대상만을 향해서 드려진 마음 ] 이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구약 성경에 욥을 들 수 있습니다. 욥1:에 보면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니고 돌아온 사단에게 묻습니다.
[ 내 종 욥을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 하니
사단이 여호와께 의의를 답니다.
[ 욥이 어찌 까닭없이 여호와를 경외하리이까?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둘러싸놓으니 잘 믿는 것 같지요
  어디 한번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욥은 모든 재산 자녀 다 잃고도              <7>
주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찬송을 합니다.
[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
청결한 마음이란 욥과 같이 하나님 한분만 섬기는 순전한 마음인 것입니다.

청결한 마음의 특징은 죄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마치 흰 옷을 입고 나가면 무엇이 묻었가봐 조심하는 것같이
    죄를 멀리하는 마음이 청결한 마음입니다.
작업복 입고는 아무데나 뒹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정결한 옷을 입고는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는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자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까?               
1)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여 불결하기 때문입니다.
렘17: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알리요?」
마15:19- 온갖 더러운 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으로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하면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히12:14절 [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주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2) 마음이 청결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4: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레19:2절「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성결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관점입니다.
벧전1:15절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거룩한 행실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청결함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1)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습니다.
  딛2: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게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 되게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의 보혈만이 우리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십자가 예수를 나의 주로 믿는 자만이        <8>
      그 마음이 청결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수양을 하고 도를 닦는다고 마음이 청결케 될 수 없고
예수 믿고 거듭나야 청결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말씀과 기도로 청결케 됩니다.
딤전4:5「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합니다.
즉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마음이 청결케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청결한 마음을 강조하셨느냐?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외식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종교의 외적인 형식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동기나, 목적이나, 율법의 정신이 아니라,
          외적인 의식과 형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잔과 주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속은 더럽고 부정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릇의 안의 청결이 중요합니까? 겉의 청결이 중요합니까?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릇의 밖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탐욕과 악의(惡意)로 가득했지만
          입술로는 거룩 거룩을 외치며 경건을 흉내 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람들에게 칭찬과 영광을 받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통체로 삼키는 자들이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말씀과 기도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리는 복이 무엇입니까?
5.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리는 복이 무엇이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8절)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리는 복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합니다.
성도의 눈에는 무엇이 보여야 하느냐?
성도의 눈에는 천국과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성도에게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왜 하나님이 안 보일까요?
성도의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마음이 세상의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9>
성도의 마음이 불의와 죄악에 오염돼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데
    영혼의 눈인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태양을 바로 볼 수 없듯이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감히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창32:에 얍복강 가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도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해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언제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까?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어졌을 때입니다.
간사한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민6:22절 말씀같이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으로 채워지는 복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왜 복이냐? 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고전13:12절에
[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두 번째는 하나님의 측근이 된다는 말입니다.
에스더1:14절에
아하수에르 왕 다음가는 일곱 방백들을 열거하며 이들을
[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들 ]
  이라고 묘사합니다.
즉 왕의 얼굴을 뵙는 자들을 말합니다.                  <10>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바로 궁정의 풍습을 빌어온 표현입니다.
이들은 충신 가운데 가장 총애를 받는 신하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신뢰를 받는다는 표현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는 말씀은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며 하나님의 측근의 복을 누립니다.
축복의 정상을 향해
제5캠프 - 긍휼히 여기는 자로
제6캠프 -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기로 마음먹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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