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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삶(2) :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라 (롬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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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우리의 삶은 원치 않았던 일이나 예기치 못했던 일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원치 않았고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을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축복과 은혜의 깨달음을 체험하게도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백성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러저러한 일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도대체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주도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을 통하여서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함’을 동시적으로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지혜롭고 순결한 믿음의 백성의 모습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번 주에는 특별히 성도의 삶의 두 번째 시간으로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 하라는 로마서 16장 19절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제도 교회 로비를 보니 많은 성도들이 여러 모임과 준비, 행사로 인해서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붐비는 모습을 보면 목사는 마음이 기쁩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은혜 안에 이루어지는 교제와 기대 그리고 성도들이 누리를 즐거움을 보면 마음이 기쁜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백성은 또한 이러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복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의 삶 역시 축복과 은혜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내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무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혹은 세상 밖에서 모든 일을 진행할 때 우리들은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에게 드는 것은 과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합당하게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순간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이요 의인이 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여건과 능력들은 이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의로운 사람이 되지만 내 삶의 습관과 그리고 삶의 모든 모습들은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죄악의 삶의 관성이 우리들에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모든 지혜를 짜내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선을 행하는 데는 지혜롭고 그리고 악한 일에는 미련한 하나님의 백성이 당연히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성도의 삶으로서 선을 행하는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해지는 이와 같은 성도의 삶의 모습을 조금 더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보는 것은 믿음의 사람은 선한데 지혜로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선을 행하는데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선 믿음의 사람은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내 모든 사고 양식과 행동 양식이 전폭적으로 바뀜을 말합니다. 이제는 과거처럼 내 경험과 삶의 모든 기준을 가지고 내 모든 판단과 삶의 근거를 삼지 않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에 삶의 명운을 걸게 됩니다. 선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쓴잔을 피하기 원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본인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선이라고 마음속에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행하고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다니엘 1장 8절을 보면 다니엘의 결심이 나옵니다. 다니엘은 유다백성으로서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간 소년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정책 중에는 소년들을 데려다가 교육을 시켜 지도자로 삼는 이런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니엘은 그렇게 뽑혀온 사람입니다. 포로의 신분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들에게 특별히 진미와 포도주를 하사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니엘은 그것들을 먹기를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교도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의 일부를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게 봉헌한 후에야 그것을 먹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우상 신에게 드렸던 곡물을 먹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을 했던 다니엘에게 그와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을 옳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거부했습니다. 그는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따랐던 다니엘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음식을 먹지 않았고 채식만 먹었던 다니엘이 오히려 준수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다니엘의 세 친구의 준수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들이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것 그것이 선한데 지혜로운 것입니다. 즉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게 유익이 있는가, 편안한가, 불편한가가 기준이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가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9장 12절을 보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해서 달아나는 요셉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요셉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한 가지를 보면 그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무엇인가 요청했을 때 그것을 거절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요셉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즉 선한 일에 지혜로 왔던 것입니다. 결국 거기서 도망쳐 나오게 될 때 보디발의 아내의 음모로 말미암아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고 원망하지 않았고 그 결과 그는 감옥에서 최선을 다할 때 그는 그것이 기회가 되어서 바로의 궁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총리가 되는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가운데 어려움이라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에게 큰 상급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의 열쇠인 것을 봅니다. 선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행하고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삶의 구조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조를 이루어야 합니다.

제가 구조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산위에서 물을 흘리면 그 산 밑으로 물이 흘러서 저 아래로 흘러가게 됩니다. 산꼭대기에서 물을 흘리면 저 아래로 흘러가는데 그것이 어떻게 흘러가지요? 이제 산위에서 물을 흘리면 물이 조금이라도 낮은 곳을 따라서 낮은 곳으로 해서 산 밑으로 흘러갑니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낮은 곳으로 조금 더 낮은 곳으로 골을 따라 흘러가지요. 이것이 구조입니다. 즉 처음에 한번 시작하면 흘러가는 그 경로를 따라서 갈 수밖에 없게 되어있는 것이 구조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생각이 들어 왔을 때 우리가 어떤 생각이 구조 경로를 통해서 그 생각이 어떤 결론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들어왔을 때 내가 살아온 삶의 습관과 관습과 구조로 말미암아 나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이루는가라는 것은 우리 삶의 구조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리 삶의 생활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삶의 습관입니다. 늘 말씀드리죠. 생각이 바뀌면 말이 바뀌고 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뀔 때 인생이 바뀝니다. 우리 인생의 바뀜은 결국 습관의 바뀜입니다. 습관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고 끊임없는 반복적 훈련에 의해서 바뀝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따라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한번 충격적인 변화와 더불어서 정서적 설득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도 있지만 이와 같은 충격적인 정서적 설득이 반복적 훈련에 의해서 이와 같이 습관을 형성함으로 말미암아 구조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습관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훈련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 뜻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삶의 구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늘 이루는 구조가 형성될 수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선을 행하는 것은 억지가 아닌 큰 즐거움 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이런 말 여러분 들어보셨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일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따르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공부를 즐거워하는 사람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억지로 참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일 자체가 좋고 즐거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내가 정말 이 일을 안 하면 안 되라고 억지로 참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좋아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도 예배 참석하는데 너무 즐겁고 좋은 사람하고 내가 예배 참석안하면 안돼라고 의무로 참석하는 사람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즐기는 사람을 노력하는 사람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노력하고 애쓰고 억지로 수고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그 일을 즐거워하고 좋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정말 주의 뜻을 이루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즐거워하려면 내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먼저 바뀌어 즐거워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은혜의 역사를 이룰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것이 억지가 아니라 우리에게 큰 즐거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를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았던 사람은 주인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더 남겨서 열 달란트, 네 달란트를 남겨서 주인에게 주었더니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더 큰일을 맡기리라 네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리라”하고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은 마음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마음이 굳은 자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려고 한다고 주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자신의 게으름과 나태를 오히려 주인에게 덮고 자기의 게으름과 나태를 합리화시키고 땅에 파묻었다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다 주었습니다. 주인이 분노하지요. “네가 이자를 주는 자에게 맡겼으면 이식이라도 남겼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이냐”라고 한탄합니다. 그리고 있는 것도 뺏어서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고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기뻐하고 감사하고 또 어떤 일에 대해서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는 것과 억지로 그 마음에 괴로움 속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데 지혜롭다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 익숙하고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영적 충만 이라는 것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을 행하기위해서 방향성과 판단력과 추진력이 옳아야 됩니다. 사단은 수시로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우리 인간에 대한 통찰과 삶의 상황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세 가지를 꼭 공유해야 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우리 인간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하고, 세 번째는 우리의 삶의 상황과 현실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인간과 현실을 모르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광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는데 인간과 현실을 모르면 광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해 봅시다. 우리 인간이나 현실에 대해서는 아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면 뭐가 됩니까? 이성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고 인간에 대해서도 아는데 현실을 모릅니다. 그러면 뭐가 되지요? 이상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과는 상관없는 이상주의자가 됩니다. 날마다 다른 사람에게 현실가능성이 없어서 그저 꿈꾸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광신도도 아니고 이성주의자도 아니고 우리는 이상주의자도 아니고 이것이 조화되고 균형을 이룬 하나님의 은혜의 성숙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성숙한 백성으로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고 나 자신과 인간에 대해서도 알고 인간이 살고 있는 삶의 상황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파악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 땅속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보통 치우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섭렵하여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주님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는가 하나님 뜻하심이 있었고 나도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주님의 마음속에 뜨거운 사명이 있었고 인간들의 모든 역사의 상황을 보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만족시키고 그리고 인간들의 상황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셔서 그들을 구속해주셔야 되는 은혜 생각하면 예수님은 필연적으로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힘이 투자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일부의 힘이 투자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력을 다하는 힘이 투자되어져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이 말씀을 분명히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기준과 원칙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면 옆의 사람을 한번 보세요. 여러분 이 사람이 어떤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살고 있어 앞으로도 어떤 일이 이루어지면 저 사람은 이렇게 할꺼야라고 알면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에요? 안 괜찮은 사람이에요? 여러분 사람이 기준과 원칙이 있는 것은 아주 괜찮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준과 원칙이 있습니다. 10년 전에 한 말과 5년 전에 한 말과 3년 전에 한 말과 2년 전에 한말과 지금 한말이 똑같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지요? 그 사람은 일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일관성이 있다는 것은 어떤 기준과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볼 때 무엇을 생각합니까? 아 사람은 앞으로도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상황이 일어날 때 저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 것이고 어떻게 생각할 것을 압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이지요? 믿을 수 있다는 것이고 계획을 세울 수 있고 같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기준이 없습니다. 원칙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말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이렇게 말해놓고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서 다르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었으면 조금 있다가 또 바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사람을 어떻게 믿고 확신을 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 알고 우리가 그 사람을 믿고 어떻게 확신하고 일을 진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너무나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전에 그렇게 했는데 왜 이렇게 하는가? 간단합니다. 마음이 바뀌었다. 설명하기는 쉽습니다.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앞으로 그 마음은 또 바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옛날로 또 돌아가려고 하지만 또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고 일관성이라는 것은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하고 그 기준과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자 따라해 봅시다. “약속대로 정한대로” 여러분 이 말이 굉장히 좋은 말 같지요? 그런데 나에게 정확히 적용해보세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 자신에게 적용해볼 때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워합니다. 약속대로 정한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기는 쉬워도 내가 약속대로 정한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기는 쉬워도 내가 약속대로 정한대로 지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대로 정한대로라는 것을 지킬 때 많은 어려움이 있고 손해도 보고 하지만 그러나 손해와 아픔을 보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신뢰를 쌓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결국 어떤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진보되고 발전되고 성숙한 모습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선한데 지혜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옆 사람에게 칭찬 해줍시다. “나는 당신의 기준과 원칙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통 모르겠습니다라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적어도 내가 말하고 약속한 것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입니까? 끝까지입니다. 사단의 가장 큰 계략은 모호함입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잘 모릅니다. 전에는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앞으로 또 무슨 얘기를 할지 모릅니다. 전에는 이렇게 이야기하더니 지금은 또 그게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왜 그러면 전에는 그렇게 이야기했느냐는 질문에 그 때는 그게 맞는다고 생각해서 그랬다합니다. 마음이 변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자신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마음이 바뀌기 시작하면 수시로 바뀝니다. 우리의 삶을 감정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수시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정서에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 속에 이루어지는 삶의 원칙과 근거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바람결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인생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공을 이룹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음의 갈등과 갈림에 있어서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한 번 정한 것, 약속대로 정한 대로 끝까지 가는 사람들이 매우 희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일정한 원칙과 기준과 약속대로 정한대로 끝까지 그 모든 일을 감당할 때 결국 마지막 최종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뛰어나간 사람이 우승자가 아니라 최종도착지점까지 가는 사람이 우승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주의 성도들이 바로 이와 같은 성도들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선한 일에 지혜로워야 하는데 선한 일에 지혜롭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그 마음에 변개가 없이 주의 뜻을 끝까지 이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억지로 노력하는 사람이 즐겁게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노력하는 사람이 즐거워하는 사람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그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선을 행하는 일을 즐겨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 믿음의 사람은 악한데 미련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고 싫어져야 합니다. 경건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양도 싫어져야 합니다. 냄새도 싫고 가까이 가기도 싫어져야 합니다. 악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져버리고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선악과라는 과실을 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울 왕이 힘이 생기고 전승의 결과가 생기자 자기의 뜻에 따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관심이 없어지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어지면 위기가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좀 귀찮은 것 같아도 어떤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어떤 것 때문에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며 사는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관심이 없어지면 그 때부터 우리에게 위기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위기는 서서히 닥치지만 어느 한 순간에 우리의 목을 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항상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라는 험난한 성을 정복했습니다. 정말 어렵게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성이라는 작은 전투에서 그들은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서 제물을 취하여 몰래 숨겨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결국 아간을 찾아내어서 죽임으로서 정리한 후에야 아이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고 불안해지도록 만드는 사고의 구조 속에 거하게 되면 우리는 늘 고통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악을 행하면 그것이 싫어져야 합니다. 악을 행할 때 두려워져야 합니다. 다윗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내게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고 나니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우리 믿음의 백성들에겐 영력, 지력, 체력, 업무능력, 인격 및 매너가 필요한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력이라고 말씀드려왔습니다. 모든 게 다 되었는데 영적으로 괴롭다면 기쁨이 있을까요? 자다가도 식은땀이 나고 괴롭고 마음에 눌림이 있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영적인 절박감, 상실감과 공허감이 있을 때 우리에게 다른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힘이 주어지면 그것으로 포악하게 휘두를 뿐입니다. 그것은 점점 우리를 멸망의 지경으로 나아가게 할 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팔을 꼬집었는데 하나도 안 아프다면 나는 이제 아파하지 않고 견딜 수 있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팔이 마비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도 화인 맞으면 이와 같이 가책이 없어집니다. 작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예배드리시는 분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의 기쁨이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 예배를 안 드리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몇 번 반복되다보면 그것도 지낼 만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짓는 데는 소심해야 합니다. 무능해져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데 파란불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뜻이고 빨간불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 하면 안 된다고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뜻 파란불,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빨간불이 켜지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죄를 안 짓겠죠? 그랬으면 좋겠습니까? 제 생각으로서는 아닐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는데 너무 괴로울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주님 비록 죄는 짓지만 이번만은 모른척하고 넘어가주십시오.’라는 때가 많지 않습니까? 사람이 알고 죄를 짓고 모르고 죄를 짓는 것 이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편이 더 많을까요? 대부분은 알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니 빨간불, 파란불이 들어오면 더 괴로운 것입니다. 차라리 불 안 들어오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삶에 있어서 악한데 미련해지는 것은 매우 피곤합니다. 예배당에 오면 괜히 졸리고 힘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박하는 곳에 가면 갑자기 화기애애해지고 좌중을 휘어잡는 사람이 된다면 문제일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순간에는 두렵고 떨리고 소심해져야 합니다. 악을 행하려고 모인 곳에 가면 “야, 네가 있으면 될 일도 안 되니 넌 빠져.”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퇴출당해야 합니다. “너 왜 이렇게 벌벌 떨어, 이렇게 벌벌 떨어서 어떡해? 할 수 있겠어? 네가 있으면 될 일도 안 되니 빨리 꺼져!” 이렇게 퇴출당해야 합니다. 악한 일을 도모하는데 “네가 핵심이야, 네가 없으면 안돼.” 이렇게 이야기하면 큰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악한 곳에서 퇴출되어야 합니다. 악한 곳에서는 따돌림 받아야 합니다. 퇴출되면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얼른 나오면 됩니다. 악한 일에서는 물고기가 뭍으로 나와 숨을 못 쉬는 것처럼 숨쉬기가 불편해야 합니다. 한 번 따라합시다.
“청정한 백성 됩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 한 복판 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숲도 있고 산들도 있습니다. 서울 한 복판에 있다가 분당, 용인, 수지, 구성, 광주, 오포 이런 지역에 오면 옆에 나무도 있고 산도 있고 숨쉬기가 조금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울 한복판에 가면 너무 답답합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역시 맑은 공기가 낫구나라고 생각하며 호흡의 편함과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무언가 우리는 느낌으로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한 일이구나, 지혜로워야지. 악한 일이구나, 미련해져야지.’ 우리는 분명히 본능적으로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방면으로 머리를 쓰면 자꾸 발달됩니다. 행동하면 기능이 계속적으로 발달됩니다. 우리는 선한데 힘을 쓰면 선한 쪽으로 발달되고 악한데 힘을 쓰면 악한 쪽으로 발달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악한 일을 도모하지 않기 위해서 주변 여건과 능력과 사람들이 차단되어야 합니다. 옆에 있으면 자꾸 쓰게 되고 사용하게 되고 만나게 됩니다.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면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나 장소에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제가 나쁜 곳에 가더라도 나쁜 일을 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하나님, 제가 나쁜 사람과 어울릴 지라도 나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제가 나쁜 곳에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가 나쁜 사람은 만나지도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쁜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 자체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장소나 모임이나 여건을 방치해두지 말고 그것을 내 주변에서 정리해 버려야 합니다. 내 주변에 유혹거리가 있으면 치워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까워서 치워버리지 못합니다. 아까워서 그것을 치워버리지 못하면 그것을 반드시 사용하게 됩니다. 퇴로를 만들어놓은 사람은 반드시 사용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정말 끊을 것은 끊고 자를 것은 잘라야 합니다. 정리하지 못하면 결국은 사용하게 되고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준비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까?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늘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한 비전과 계획과 훈련, 그리고 회개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을 이루려는 비전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획과 훈련과 회개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준을 높게 잡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제가 산에 다녀왔습니다. 산 아래에서 보기만 해도 놀다오려는 사람과 산꼭대기까지 가려는 사람이 확연히 다릅니다. 산 아래에서 놀다오려는 사람은 양복입고 구두신고 손에는 술병을 들고 올라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산 아래 개울가에서 놀다오려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산꼭대기까지 가려는 사람은 등산화를 신고 배낭이라도 메고 모자를 쓰고 갑니다. 산 아래에서 볼 때 분명히 눈에 보입니다. 저 사람은 놀다 올 사람인지 산꼭대기까지 갈 사람인지 눈에 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높은 수준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어느 수준을 정할 것인가, 내가 어떤 수준에서 내 삶을 살 것인가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수준을 우리가 미리 정해놓지 않으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진보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정하고, 이것은 선한 일 악한 일 분명한 말씀의 기준에 의해서 선한 일에는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미련하고 내가 하나님의 선을 행하되 어떤 수준에서 행할 것인가라는 분명한 일을 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 앞에 겸비하며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최소의 수준에 만족하지 말고 최선의 기준을 강화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굳건한 도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적인 거인이 되고 위대한 산성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어려움, 산전수전을 통해서 굳건해집니다. “난 한번도 실수하지 않았어.” 이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어떤 실수를 해도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어.” 이것이 오히려 우리의 자랑거리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환호도 받았지만 가는 곳마다 비난도 받으셨습니다.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수난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한 번 구축된 것으로 평생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더 쌓아가고 날마다 더 강화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서 합시다. “큰 나무가 되면 그 그늘에 쉬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믿음의 거목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그늘에 많은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요즘 늘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10년 동안 더 말씀드릴 것입니다.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되십시오.” 앞으로 10년 동안 말씀드릴 것입니다. 10년 동안 들을 생각을 하니 지겨울 것같아라고 생각하면 이 교회 못 나오실 것입니다. ‘내가 10년 동안 듣다보면 나도 그렇게 될 거야.’라고 믿으면 여러분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꼭 그런 사람 되십시오.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 될 줄로 믿습니다. 큰 나무는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더니 큰 나무가 된 것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큰 나무가 자꾸 옮겨 심으면 큰 나무가 못됩니다. 그저 한 자리에 무조건 오래, 별 것 없습니다. 무조건 오래 있으면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나무가 한 자리에 오래 있는데 별 일이 없겠습니까? 벼락 맞아 가지도 뚝 떨어져 나가고 벌레 먹어서 썩어져 나가고 푹 파져서 상처도 있고 아이들이 와서 칼로 흠집도 내고 자르기도 하고 이름도 새깁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꿋꿋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 나무로 말미암아 마을의 전경이 달라지고 주변 사람들이 그 나무를 통해서 얻는 유익도 많아지고 그 그늘에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어서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큰 역사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우리 삶의 역사를 보면, 요즘 제가 늘 말씀드리는데, 현상이 반복되면 반복되는 현상 가운데 일맥상통한 원리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현상, 현상, 현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비슷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뽑아내서 우리는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원리를 가지고 또 다른 상황 속에서 현상을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를 발견해서 원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현상 속에서 원리를 발견해낼 수 있는 관찰의 눈을 가지고 원리를 발견해내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원리를 적용해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능력을 주셨습니다. 믿음대로 살면 승리합니다. 선한 일에 지혜롭고 악한 일에 미련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보면서 그것을 느꼈고 원리를 발견했으면 우리는 어떠한 삶의 현장 속에서도 그렇게 적용해서 우리의 삶의 현장을 그렇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사람과 같이 어울릴 때 몇 가지를 따져봅니다. 무엇을 생각해봅니까?
1. 이 사람이 충성된가? 성실한가? 진실한가? 끝까지 어떤 일에 대해서 성실과 진실과 그 모든 최선을 다함이 있는가? 충성됨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2. 겸손을 포함한 능력이 있는가? 사람은 성실하고 진실한데 능력이 없으면 일을 잘 못합니다. 그러니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겸손도 능력입니다. 겸손을 포함한 능력이 있는가?
3. 그릇의 크기가 얼마인가? 능력도 있고 성실하기도 한데 그 그릇의 크기가 얼마인가? 이 사람의 용도가 얼마나 큰 그릇인가 생각합니다. 그릇의 크기를 생각할 때 또 무엇을 생각합니까? 그 그릇이 계속해서 커질 수 있는 확장형인가? 아니면 저 사람은 지금 완전히 고정되어서 자기의 아성 때문에 절대 그것만으로 섬길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지금 부족해도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와 같은 진행형의 그릇이라면 우리는 더욱 더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충성심이 있고 한 번 약속한 것 끝까지 변치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루는 분들입니까? 아니면 겸손을 포함한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의 그릇의 크기는 제한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점점 확장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주의 뜻과 은혜와 능력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셔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갖춘 사람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충성심이 있으면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고, 능력이 있으면 충성심이 떨어지는 것 같고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기는 쉽지 않으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하고 애쓰며 우리는 주의 뜻을 이루고 그렇게 되기를 즐겨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충성심도 있고 능력도 있고 그릇의 크기도 확장될 수 있는 이와 같은 유용한 주의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악한데 능력이 있을 수 있으나 그 능력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악한 데는 미련하고 선한데만 지혜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선을 행하는 데는 출중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인정받는 주의 역사를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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