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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삶(3) :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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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녀서 그런지 자라는 과정가운데 별로 싸워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학생들에게 바르고 착하고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중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물상시간 잠시 쉬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학실에서 저희 같은 반 옆에 있는 친구와 말다툼 끝에 주먹이 몇 차례 오고간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친구들의 만류로 한순간에 끝나고 이후에 더 친해지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직후 저를 무척 괴롭힌 것이 있는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대라고 했는데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었구나’ 하는 죄책감으로 많은 자책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어린나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나고 그 이후에 어떻게 제 마음과 감정을 처리했는지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어른이 되어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종류의 생각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무조건 양보만 하고 살아야하는가? 남이 하자는 대로 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주장을 펴고 내 생각을 펴서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를 이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 이런 문제들의 답을 찾기 위하여 우리 성도들의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승리생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는 마태복음 10장 16절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번째 주에는 로마서 16장 19절 말씀을 가지고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았고 오늘은 로마서 12장 말씀을 가지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즉 이 세 가지를 조합해 보면 우리들에게는 조화와 균형이 매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비둘기 같은 순결함과 뱀 같은 지혜로움 두 가지가 같이 균형을 이루고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 분별하는 선별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한 것 같은 선별의 은혜, 분별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바른 분별 이후의 결코 유약하여 피해 다니는 약함이 아닌, 강한 선의 능력과 힘을 발휘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가주고, 겉옷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라’는 말씀을 생각해보면 도대체 내가 이 말씀을 지키면서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사단의 세력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그들을 능가하는 여력과 의지와 너그러움을 가지고 충분히 상대방을 배려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커지고 담대해지고 축복을 받으라는 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게 대하여 해코지 하는 사람에 대하여 오히려 배려할 수 있는 여유, 그리고 내게 요구하는 자들의 요구 이상을 지켜 해결해주는 너그러움과 관대함, 그리고 배려의 심정과 능력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적어도 그러한 능력을 가지려면 우리는 잠도 안자고 일만해야하고 우리는 놀지도 않고 일만하는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천지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축복이라는 방법으로서 그들의 수고 이상으로 우리들에게 차고도 넘치는 은혜를 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마음을 넉넉하고 삶을 넉넉하게 하셔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베풀고 나눌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주의 뜻을 실행함으로 말미암아 너그럽고 관대함으로 말미암아 주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초조하고 우리는 언제나 바동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넉넉하고 여유가 있어 주고 주어도 또 줄 수 있고 나누고 나누어도 또 나눌 수 있는 풍성한 백성이 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첫 번째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악에게 쫓기고 억압당하는 약한 자들이 아니라 악을 능가하는 강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악한 일에 쫓기고 억압당하고 도망 다니는 약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악을 능가하는 강한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가 나가 복음을 전합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충만한 사건 이후에 나가 복음을 전하니 한번 말씀을 전할 때 3천명이 회개했습니다. 이제 앉은뱅이 걸인을 일으켜 세우고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에 그것을 보려고 모였을 때 그 가운데 복음을 전하니 5천명이 한꺼번에 회개를 합니다. 가는 곳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회개하며 주의 역사를 이루게 될 때 유대인들이 그저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관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다가 문초를 합니다. 그리고 4장 18절 이하를 보면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을 해봐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관원들은 백성들이 다 그 베드로 요한을 따르는 것을 보고 그들을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위협만하고 놓아줍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돌려지는 것을 봅니다. 즉 이것을 보면 악에게 쫓기고 억압당하고 강제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악을 능가함으로 말미암아 악에게 승리하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해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와 같은 베드로가 아니라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를 체험한 후에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하는 관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내가 너희말보다 하나님 말 듣는 것이 더 합당하다.”라고 이야기할 만큼 담대한 투사가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을 보면 베드로는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지만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베드로도 기도하며 그 감옥에 있게 됩니다. 그 때 잠자고 있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천사가 깨워 일으켜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감옥에서 나오게 됩니다. 나중에 성도들과 만납니다. 베드로가 깨닫게 됩니다. 11절을 보니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라사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을 알겠노라”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도 낙심하지 않고 성도들은 오히려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기대했을 때 오히려 소망가지고 기도하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기대했을 때 오히려 그는 그의 모든 삶의 상황을 능가하는 이와 같은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감옥이 베드로를 가질 수가 없고 결코 어떤 위협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는 것은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일을 어떻게 이루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그저 이리저리 쫓기며 비실거리며 살아갈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담대하고 용기 있고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여러 가지 어려움은 가슴아파하며 살아갈 수도 있지만 내게 주어진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이루실 더 큰일을 바라보며 우리는 승리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동대문 가야한다고 생각을 하면 시청 앞을 지나서 종로를 타고 가서 우리는 동대문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한남동으로 가서 남산을 지나 동대문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동대문 간다고 하고 대구나 광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돌이켜서 동대문까지 갈수도 있겠지요. 어차피 그 길은 동대문 가는 길이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쓸데없는 힘을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이렇게 어리석은 때가 있습니다. 저도 이런 때가 있는데 저희 큰 아이가 한 살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여름휴가를 간다고 용평이라는 곳을 갔습니다. 저는 자동차를 운전해서 다니기도 했지만 제가 어디를 다녀본 적이 없었습니다. 매일 학교, 집, 교회 그리고 교인들 심방하는 곳 외에는 가본 곳이 없기 때문에 제가 고속도로를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중부고속도로로 나가서 호법을 지나서 거기서 영동고속도로를 가면 약 190Km 정도의 거리가 되면 용평이라는 곳에 도착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마음속에 새기고 갔는데 아무리 가도 호법이라는 곳이 안 나옵니다. 그리고 가다가다 보니까 신탄진이 나왔습니다. 제가 호법을 스쳐서 정신없이 대전 근처까지 간 것입니다. 신탄진은 제가 초등학교 때 담배공장 신탄진을 많이 외워서 그곳이 어딘지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대전 있는 곳에 있다는 것도 알아서 ‘이거 너무 지났구나’ 생각을 하고 다시 도로를 타고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와서 영동고속도로를 탄다고 생각을 했는데 오다가 중부고속도로를 놓쳐서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신갈 있는데까지 와서 거기서 영동고속도로로 꺾어져서 타고 가니까 한 200Km도 안 걸리는 길을 400km이상을 돌아서 갔습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는 데에는 익숙하니까 여름 휴가철은 사람도 많고 하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자고 해서 제가 운전하고 제 아내하고 저의 큰아이, 그 당시는 꼬맹이는 뒤에 탔는데 사람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출발하면 금방갈 수 있는 길인데 한나절 지나서 저녁쯤 되었을 때 도착했습니다. 결국 가기는 갔습니다. 목적하는 곳에 갔지만 엉뚱한 곳으로 빙빙 돌아서 가니까 시간도 소비하고 힘도 소비하고 또 여러 가지 지치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고 20년 전쯤의 그 일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길을 잘못들이고 무지하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어리석고 무지해서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저는 그때 느끼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40년 동안 방황했는데 그 광야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시내광야가 얼마나 크기에 거기서 40년을 걸어가겠습니까? 왔던 곳을 또 가고 왔던 곳을 또 가고 빙빙 돌아서 눈앞 가리워서 40년 동안 헤매고 간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결국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길을 가는데 있어서 바른길 가면 괜찮으나 바르지 못한 길 가면 언제나 수고하고 고생만 하게 됩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적지에 도착해도 바른 시간에 바른길에 가야 힘이 남아서 그 남은 일을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일을 하는 그 지점까지 이를 때 우리는 바른길 짧은 거리를 달려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엉뚱한 곳에 힘을 소비하면 우리는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장소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소에 갔을 때 힘 다 빠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이제는 그는 이전에 그가 살았던 삶의 방법을 버렸습니다. 무서워하여 예수님 부인하는 법도 버렸고 이제 주님 앞에 담대한 마음으로 그는 복음을 위해서 그의 마음에 뜨거운 열정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4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실라와 더불어 빌립보 성에서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짜증내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서 찬송하며 기도할 때 죄수들이 듣습니다. 그때 홀연히 큰 지진이 일어나고 옥토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집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는 거기서 나오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통하여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과 실라는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마음이 쓰이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니까 감옥에 가도 그리고 바깥에 있어도 안에 있어도 그것이 별로 그렇게 큰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헨리 데이비드 쏘로우라는 사람을 아실 것입니다. 보스턴에 보면 월든 연못이라고 있는데 월든 연못 곁에 조그만 오막살이를 짓고 살아가는데 이 사람이 세금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낸다고 하면 되는데 끝까지 저항을 하다가 감옥에 간 것입니다. 에머슨이라는 친구도 있는데 “친구야 감옥은 어떤가? 괴롭지 않은가?”라고 하자 오히려 그 친구들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난 여기가 괜찮은데 밖에 사는 너희들은 괜찮나?” 이렇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결국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바뀌는 것입니다. 그 헨리 데이비드 쏘로우라는 사람은 아주 조그만 침대하나 들어가고 조그만 책상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방의 전부였습니다. 그만한 집을 짓고 월든 연못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저도 여러번 자주 가본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는 사람마다 자기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주어진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시각이 변하여서 우리가 어떻게 그 삶을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영적인 체험과 승리의 체험을 가지게 되면 내가 옥에 있던지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이 인도하신 그곳이 바로 축복의 자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 있는 곳에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있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는가 아닌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화려한 곳에 잠시 머무는 것 보다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어떤 누추한 곳에도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현상보다 현상이 의미할 것과 현상을 통하여 이루어질 최종적인 결과를 더욱더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상 못하는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긴 호흡입니다. 보다 길게 호흡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평가는 마지막에 주어지는 최종적인 평가로 점철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 세상에 악에 쫓기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히브리서 11장을 볼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35절 이하인데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이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따라서 합시다. “구차히 면치 아니하며” 악형을 받아도 구차하게 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내가 어떤 악형을 받아도 나는 구차하게 그것을 면하고 싶지 않다. 내가 하나님 앞에 더 좋은 부활을 이루려고 하면 내가 여기서 악형을 받아 차라리 죽는 것도 괜찮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실형도 받았고 돌로 침을 받고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쓰고 유리방황하며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38절을 보면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우리 한번 따라해 봅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세상이 감히 감당치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살지 않습니다.

여러분 외국에 나가 보신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외국에 나가시다 보면 어떤 물건 살 때 꼭 계산해 보지요. 이건 얼마짜리이다. 그러면 그 화폐 단위가 얼마라는 것을 생각하고 물건을 사고팔지 않고 머릿속으로 벌써 우리나라 돈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얼마인가? 비싸다 싸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 20불이다. 30불이다고 하면 20불이 30불이 비싸다 싸다 생각하지 않고 한국 돈으로 계산을 해서 20불이면 2만원, 30불이면 3만원 그러면 비싸다 싸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은 언제든지 어디를 가도 한국 돈으로 환산을 해서 그 가치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면 이 세상에 살아도 ‘이것 하는 것이 옳은가 나쁜가? 세상 사람들이 하라, 마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가. 원하시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될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늘 계산을 하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세상에 살면서도 두려움 없이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선으로 악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기쁜 것은 이 세상이 평가하는 슬픔과 기쁨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심이 기쁨이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이 슬픔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기준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성도들이 100명이 있다고 합시다. 키 작은 순서대로 1등에서 100등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이제 10명을 뽑아야 하는데 어떻게 뽑을 까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제일 작은 사람부터 10명을 뽑으면 앞에서부터 10명을 뽑으면 되고, 제일 큰 사람부터 10명을 뽑으면 뒤에서부터 10명을 뽑으면 되고, 가장 중간의 삶을 뽑으면 그 가운데에서 10명을 뽑으면 됩니다. 줄을 세웠지만 그 가운데서 기준을 어디에 정하느냐? 이 기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준이 어디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준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결코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는 강하고 담대하게 쫓기지 않고 악을 능가하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선으로 악을 능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 악은 우리에게 거세게 달려올 수 있으나 그 실상은 강한 것이 못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을 뿐입니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가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이 사단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욥이 너무 하나님께 순전하고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사단에게 “욥이라는 사람을 유의해 보았느냐?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욥처럼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욥을 자랑합니다.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흡족했으면 욥을 자랑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사단이 피식 웃으면서 비소를 날립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라사대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의 집과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둘러주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고 그 소유물을 땅에 널리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손을 펴서 그 모든 소유물을 딱 쳐버리소서. 그러면 정녕 대적하여 여호와를 욕 하리이다.” 하고 사단이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많은 것 주셨으니 욥이 이렇게 잘하는 것 아닙니까? 다 뺏어보시오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말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사단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마음대로 해보아라. 오직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못하리라.” 이게 무엇이냐 하면 “그래 그 모든 소유물을 빼앗으면 그가 하나님을 욕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네가 한번 빼앗아보아라. 그런데 네가 그의 소유물에 손을 대는 것까지는 허락하는데 네가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즉 사단이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주권은 사단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사단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허락의 범위 내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뜻을 능가하지 못함으로 결국 욥을 굴복시키지 못합니다. 여러분 욥도 가만히 놔두면 굴복 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결국 욥에게 깨달음을 주지요. 자연 만물의 섭리를 보여주며 자연의 세계의 모든 섭리 속에서 욥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셨을 때, 욥이 손으로 ‘내 입술을 가리우나이다’하고 자기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돌아와 귀의할 때 욥은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욥을 인도하셔서 은혜 받을 자리에 이끄실 것을 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욥이 하나님 앞에 믿음의 의인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을 봅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이하를 보면 40일간 금식 기도하는 예수님에게 사단이 가서 세 가지 시험을 합니다. 첫째 돌로 떡을 만들라. 두 번째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세 번째 내게 엎드려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리라. 첫째는 무엇이지요? 기본 의식주로 배고파하고 있는 예수님을 유혹한 것입니다. 두 번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공명심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만국의 영광을 제게 주리니 나에게 내게 절하라 권세와 영화에 대한 욕구로 사단은 시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결국 그 백성을 용서하시고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의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도 예수님은 절규하시지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좌절하지만 그러나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 이루었다.” 주님께서는 결국 그 십자가상에서 모든 과정을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고 유혹을 받았으나 결국 그 모든 것을 이기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들에게도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십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 결국 그들은 풀무 불에도 던져졌고 사자굴에서도 구함을 받았습니다. 만약 구함을 받지 않아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 믿기로 결정한 것 우리는 끝까지 믿을 것입니다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요셉은 갖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어려움 때문에 속히 가야할 자리에 이릅니다. 야곱은 갖은 고생을 겪으나 그 고생 때문에 그는 결국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내게 슬픔이 주어져도 슬픔 때문에 배워야 할 것이 있고 아픔이 주어져도 아픔 때문에 깨닫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여서 그것을 통하여 이룰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조탁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혜의 작품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쁩니다. 여러분 어떤 조각품 보시지요? 명과 암을 통해서 볼록한 면과 오목한 면을 통해서 이와 같이 바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림도 그렇고 사진도 그렇고 반드시 명과 암의 조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들의 삶의 모든 것도 슬픔과 기쁨의 조화를 통해서 각각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니 모든 것 하나 우리들에게 필요 없는 것은 없고 마침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니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결코 사단의 손에 놀아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단은 악은 우리를 장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악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풍성한 능력으로 결코 약해지거나 위축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갈 때 다윗에게 자신이 있었습니다. 내 물매 한방이면 너는 한방에 끝난다 하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달려가면서 가속도를 붙여서 물매를 돌리며 달려가는 가속도에 그 물매가 회전하는 가속도를 붙여서 정통으로 골리앗의 이마에 맞출 때 그 한방에 골리앗은 넘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신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도로서 어떤 자신감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헌신할 때 어떤 것이 자신 있습니까? 나는 적어도 이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봉사하리라는 물매가 우리들의 손에 들려져 있습니까?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미디안의 대군을 향하여 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말씀하셔서 가보았더니 미디안의 군사들이 꿈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그러자 그 동무가 말하기를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라는 말을 듣고 기드온은 승리를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 보내서 왜 미디안군사의 꿈 이야기를 내게 듣게 하셨는가? 그러므로 말미암아 기드온은 확신하여 돌아와서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아주 단연하게 확언하는 마음을 가지고 횃불 항아리와 나팔을 가지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확신시켜주시고 승리하게 마음의 결과를 주시고 우리들에게 승리하는 주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우리는 특별히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여유와 여력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대처하고 남을 넉넉한 여력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리를 가주고자 할 때 십리를 가주고 겉옷 달라 할 때 속옷까지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넉넉한 마음,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어떤 사람이 천원만 달라고 합시다. 배가 고파 보여요. 그러면 우리 마음에 무슨 마음이 들지요? 천원만 주자라고 생각이 들지 않고 천원가지고 무엇을 사드실 수 있습니까? 여기 오천원이 있으니까 이것가지고 밥 한 끼 사드세요. 우리는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가줄 수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도 캄보디아를 갔을 때 쌀을 한 6톤 정도 300가정정도 300부대정도 나눠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아주 고맙게 받아 가시더라고요. 그랬더니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이번 겨울에 와서는 더 많이 준비해서 300명분 뿐 아니라 1000명 분량쯤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분들은 달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우리 마음에 좀더 드려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 수 있잖아요. 오리를 가고자 할 때 십리를 가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넉넉한 마음을 우리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뜻과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넉넉한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무언가 있어야 넉넉한 여유가지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넉넉한 여유를 가지면 무엇인가 생깁니다. 무엇인가가 있어서 넉넉한 것이 아니라 넉넉한 여유를 가지면 무엇인가 줄 수 있는 것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품고 용서할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준비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관계를 이용해서 우리를 시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용서받았는데 내가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으랴 생각하면 우리는 누구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우리는 주기도문을 날마다 기도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지 않으면 우리의 죄도 사함 받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었는데 내가 누구를 못 용서해 주랴하는 마음을 가지고 용서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정말 용서 못할 죄도 없고 주님 부인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우리는 기회를 주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악인만 아니면 누구든지 같이 일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악인이 있고 사단이 있습니다. 악인만 아니면 누구든지 같이 일할 수 있습니다. 사랑함이라는 전제가 있다면 우리 앞에 모든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여러분 배고플 때와 배가 부를 때의 위가 다릅니다. 배고플 때 음식이 있으면 맛있게 먹습니다. 배부를 때 음식을 보면 부담스럽고 싫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어떤 사물과 현상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같은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사람에게 이야기 합시다. 당신이 나에게 행하는 대로 갚아주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이야기 해보세요. 당신이 나에게 행하는 대로 갚아주겠어. 말 못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도 내가 행하는 대로 갚으면 어떻게 하나? 이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내가 원수를 갚겠다는 말 아닙니까? 당신이 나에게 행하는 만큼만 해주겠어.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사람끼리 그저 원수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한번 따라합시다. “나는 비록 지금 능력이 모자라서 잘 못해주었지만 앞으로 시간이 가며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내가 주고 싶은 것 다 주고 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옆에 사람에게 그렇게 이야기해보세요. 그러면 옆의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겠습니까? ‘그래 당신이 그런 마음 가졌으면 너무나 감사해’ 당신이 행한 대로 갚아 보이겠다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무서워 살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못되게 행하겠습니까? 그것 다 갚아보아요. 우리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긍휼과 사랑으로 덮임을 받고 사랑받고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당신에게 행한바 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주고 싶은 모든 것을 다 세상 끝날 까지 주고 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 가지면 우리는 악에게 선으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전투성을 상실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참된 승리가 무엇인가는 영적인 분별과 기준을 가지고 기쁨을 가지고 우리는 전투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될 일이 되어서 감사하고 때로는 안 될 일이 안 되서 감사합니다. 모든 일이 잘되면 감사하고, 하고 싶었는데 안 되면 아 이것은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구나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전투성을 상실하면 안 됩니다.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 구호가 있지요. “준비는 철저히 훈련은 가혹히 전투는 치열히”입니다. 준비하는 것도 훈련하는 것도 전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투에는 치열하게 달려들어서 격렬한 전투를 이루어 갑니다. 그리고 사단과의 전쟁에서 우리는 싸워서 승리해야 합니다. 자, 따라해 봅시다. “가급적 싸우지 말고 싸울 때는 반드시 승리합시다.” 여러분 가급적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전투다라고 생각하면 그때는 정말 우리의 모든 혼신의 힘을 다하여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필승의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전투성을 상실하면 안 됩니다. 그냥 대강 넘어가는 것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떨 때 용기 있고 자신 있을까? 두려움이 없을까? 여러분 사람이 ‘나는 어떤 일이든지 나는 다 이길 수 있어’라는 자신감이 있으면 사람들은 마음에 자신감이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자신감은 무엇인지 아세요?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나는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의 의지가 생길 때 사람은 더 자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경우도 다 승리할 수 있으라고 하면 그런데 승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하면 우리 마음에 불안해진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것도 다 수용할 수 있으라고 마음을 넓혀버리면 ‘내가 최선을 다하여 역사하지만 어떤 경우에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있어도 그것을 수용할 수 있어’라고 생각을 하면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잘 되고 안 되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각오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성도님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리함으로 어떤 전투든지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는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비실비실하고 힘도 없고 저 변방지방으로 쫓겨 다니고 주변 세력으로 되는 이런 사람이 아니라 어디를 가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사회 속에 주류가 되어서 주의 역사를 이루고 정말 어려운 사람을 돕고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세력으로 규합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능력을 이루는 영광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나서지 않는 것은 힘이 없어서 나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이 가지고 있어봐야 가지고 있다고 말하나 오히려 남이 그것을 신경 쓸까봐 오히려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게 됩니다. 빛나는 사람은 자기의 빛을 가릴 줄 압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빛이 나지 않으니까 억지로 강제로 그 빛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지 정말 빛나는 보석 가지고 있으면 남들이 탐낼까봐 오히려 꽁꽁 숨겨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되 겸손하게 그 능력을 보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자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한번 따라합시다. “나는 자신 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을 다 수용할만한 자신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자신 있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길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부단한 준비와 훈련으로 힘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힘이 없으면 왜곡되게 되며 비굴 하게 되고 비겁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단한 준비와 훈련으로 힘 있는 백성이 되어야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듣고 실행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함으로 영광 돌려야 합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야합니다. 우리는 쫓기는 자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이 우리는 기뻐하시면 우리는 드릴 수 있는 마음으로 담대하게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우리 분당중앙교회 성도들의 특징은 자신감입니다. 우리의 자신감의 근원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근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감이 있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우리는 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그것이 기쁨이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의 은혜와 은총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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