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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린 문을 가진 교회 (계 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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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호평 속에 공연되고 있는 작품 중에 “요덕 스토리”라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함경남도 요덕군에 가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는데 그 정치범 수용소에서 탈출한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 요덕 스토리라는 뮤지컬입니다.

  수용소에 사는 이들의 삶은 얼마나 처참하고 굶주려있는지 모릅니다. 500g도 안 되는 옥수수 한 그릇으로 하루를 견뎌내야 하고, 열네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려야 합니다. 너무 굶주려서 뱀이나 쥐, 개구리를 잡아먹은 날은 횡재한 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도 날아오는 것은 채찍과 고문입니다. 거의 6개월이 되면 굶어서 절반은 죽어 나가는 곳이 그 수용소의 실상이었습니다.

  뮤지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북한의 인기 있는 한 여배우가 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고위 관리로 있다가 간첩 행위자로 몰림으로써 온 가족이 숙청됩니다. 온 가족이 하루아침에 이 요덕 수용소로 끌려와서 고난을 당합니다. 그 수용소의 파견대장이 여대생인 예쁜 배우가 오니 눈독을 들였다가 겁탈을 해서 자기 아이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숨깁니다. 그래서 뱃속에 있는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서 애쓰는 여인의 모습, 처음에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 뱃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과정 속에서 증오와 미움, 사랑이 그 뮤지컬 속에 복잡하게 얽혀서 우리에게 보여집니다. 특별히 이 뮤지컬을 통해서 인간이 살기에 너무나 처참한 북한 수용소의 실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뮤지컬을 잘 모릅니다만, 그런 제가 보기에도 참 내용이 훌륭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도 안 보신 분들은 기회가 되면 가족이 보시면 참 좋겠단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그 뮤지컬이 참 좋은 것이 기독교적인 심성 위에 각본이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거기 주로 나오는 노래 가사가 이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거기 계시지요
  아버지 이름 거룩히 여김 받으시며 아버지 나라 이 곳에도 세워 주옵소서
  아버지 뜻이 이 곳도 이루소서
  일용할 양식은 바라지 않아요
  저들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시고 다만 우리를 즉결심판대에 세우지 마시고
  이 곳 수용소에서 구하소서
  아버지 남조선에만 가지 마시고 공화국 이 곳 요덕에도 와 주소서
  아버지 남조선에만 가지 마시고 공화국 이 곳 요덕에도 와 주소서”

  그 여배우가 아들을 낳는데 그 이름이 요덕이고, 그 아들이 그 곳을 탈출해서 내용을 증언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각본을 쓰는데는 김용숙이란 8년동안 그 수용소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탈출한 연로한 배우의 증언과 김은철이란 탈북자의 증언이 생생하게 녹아있어 북한의 실상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뮤지컬을 통해서 폐쇄된 사회의 위험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귀가 막히고 눈이 막힌 이 폐쇄된 일인 독재의 사회가 얼마나 놀랍게도 인간 말살과 유린 생명의 살상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민주주의 사회는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려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밀이 없고 누구에게나 투명하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의견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고 용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린 사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열린’이란 말이 많이 사용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열린 음악회가 있습니다. 장르에 상관없이 함께 노래하고 연주합니다. 교육계에서도 열린 교육이란 말도 많이 사용합니다. 교회에서는 열린 예배란 말을 많이 씁니다. 불신자들도 처음 교회에 오시는 분들도 쉽게 그 예배에 동화될 수 있는 예배가 바로 열린 예배입니다. 예배의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우면 처음 온 사람은 동참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오죽했으면 정당이름까지 열린 우리당이 있습니다. 그 당이 정말로 열려있는지는 모르지만 열려 있다는 의미는 좋은 것입니다. 나아가 열린 진보, 열린 보수라는 말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우리 교단의 큰 스승이시고 경동교회의 원로목사이신 강원용 목사님의 소천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우리 한국을 대표하는 목회자요, 예언자요, 사회개혁가로서 큰 족적을 남겨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방송이나 언론을 통해서 많이 알고 계시겠지만 그 분은 민주화를 위해서도 많이 수고하고 고생하신 분입니다. 5공화국 때는 군부독재에 대항하시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분에 대해서 대하는 많은 평가가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열려있는 이 시대의 양심이요, 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열린 목회자셨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대화 운동을 통해서 대화가 없는 우리 사회에 대화 운동을 처음 시작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장로교 목사이지만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 불교의 송월주 스님, 6개 종단의 대표 등 그 외에도 많은 종교인들과 대화를 주창하시고 지금까지 이끌어 오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 분이 얼마나 열린 분인지는 한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합동신학교의 교수고, 강변교회에서 목회하시는 김명혁 목사님이 계십니다. 보수 교단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이십니다. 이 분이 미국에서 공부하시고 한국에 들어오셨을 때 강원용 목사님과의 신학적인 차이로 인해 매우 신랄한 논조로 여러 책에서 비판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회의 석상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계면쩍은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강목사님이 개의치 않으시고 먼저 손을 내미시며 악수를 청하시며 당신의 비판과 충고 잘 들었고 너무 고맙다고 말씀하시며 대화를 나누는데 그 분의 넓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김명혁 목사님은 강원용 목사님을 가장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주 보수적인 목사님이 진보교단의 목사님을 가장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곤 그 분 교회의 11월 둘째 주일을 원로주일로 만들어서 어김없이 그 분을 모셔서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오셔서 설교하셔야 하는데 너무나 아쉽다고 술회하는 것을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온 사회가 강목사님을 추모하며 큰 지도자를 잃었다고 아쉬워하는 것은 그만큼 열린 마음의 소유자요, 열린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열린 문을 가진 한 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교회는 빌라델피아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소아시아 일곱 개 교회를 하나씩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은 여섯 번째 교회 빌라델피아 교회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주님으로부터 책망은 전혀 없고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받은 교회가 두 교회가 있는데 다른 교회가 바로 서머나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순교자를 많이 배출한 교회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해 믿음으로 살다가 그 분 앞에서 그 분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희생한 사람들, 그런 성도가 있는 교회가 어찌 주님의 칭찬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빌라델피아 교회의 칭찬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에 보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고 주님 은 말씀하십니다.

  어찌 보면 이 교회는 작은 사이즈의 교회입니다. 한국에서 보통 5천명에서 1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보통 대교회(mega church)라고 말합니다. 보통 우리 교회 같은 사이즈를 중형교회라고 말합니다. 아마 빌라델피아 교회는 우리 교회보다 작은 교회였나 봅니다. 왜냐하면 그 도시 자체가 작은 도시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고난 앞에서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은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종종 교회에서 봉사하지 않는 분들에게 이제 성가대 봉사 하시지요, 안내 봉사도 하지시오 하고 말을 건네보면, 능력이 없어서 못한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 은사와 재능을 주셨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난 분들도 계시지만 부족한 가운데 다 은사가 있는 것입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듯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주님을 위해 하고자하는 마음만 있으면 봉사할 자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까 예배실로 오다보니 2층 여자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줍는 것은 특별한 은사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방언 못해도 휴지는 주울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름다운 봉사입니다. 꼭 노래를 잘 해 성가대 봉사해야 봉사만 아닙니다. 남 앞에 서서 안내해야 봉사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주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봉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의 장점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충성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많은 능력을 가지고도 봉사하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주님은 책망하실 것입니다. 5달란트 받은 종이 그저 땅속에 묻었다가 내 놓으면 더 책망을 받겠지요.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열심히 일해 갑절로 남겨놓았다면 주님은 훨씬 칭찬하실 것입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이 교회를 칭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뭐라고 축복하십니까? 7절, 8절 말씀 읽습니다. “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아멘.

여러분, 빌라델피아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분은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시고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요라고, 예수님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누구를 상징합니까?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주권자로서 메시야의 권세를 가지고 빌라델피아 교회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8절에 보니 네 앞에 무엇을 두었다고 하십니까? 열린 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빌라델피아 교회는 열려있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교회가 될 것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빌라델피아 도시의 역사는 아주 짧습니다. 또 지진을 통해서 많은 고난을 당한 교회였습니다. 또 이 곳은 교통의 요지에 있습니다. 소아시아와 로마를 연결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빌라델피아입니다. 여기를 통해서 로마의 문화가 소아시아지역으로 퍼져나갔는데 사면팔방이 다 길이 뚫려있는 교회가 바로 빌라델피아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열린 문을 주셨다는 것은 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교회를 보면서 우리 교회도 이제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저는 우리 교회 건물이 높은 언덕에서 예배당이 대로변까지 내려왔다는 것이 너무 나 감사합니다. 높은 언덕에 있을 때는 아무나 올 수 없습니다. 아주 문턱이 높은 교회입니다. 적어도 70-80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말씀 듣기가 그렇게 힘든 교회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대로변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들어와서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열린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또 우리 교회는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많은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투명한 교회요 개방된 교회입니다. 누구든 수용하는 열린 문을 가진 교회라고 믿습니다. 중세의 붉은 벽돌로 높은 산 위에 세워진 교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흰 대리석에 많은 유리로 투명하게 세워진 이 교회는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는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열려 있어야 합니다.

  어느 도시에 한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교인이 네 명 뿐입니다. 새신자가 가끔 오는데도 어떻게든 그 사람을 상처를 주어서 내보냅니다. 너무 신기해서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교회 뒤뜰에 가보니 교인들을 위한 묘지가 있는데 딱 네 개가 남았다고 합니다. 새신자가 오면 묘지 뺏길까봐 쫓아내버리는 교회, 저는 우리 교회가 묘지가 없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교회는 기득권을 주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새로운 영혼들이 올 때마다 마음을 열고 환영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8월 한달동안 친절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에 누가 새로 오셨는데 불친절합니다. 막 째려보는 것 같고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면 누가 그 교회에 오겠습니까?

  교회는 낮아져야 합니다. 친절해야 합니다. 그 교회가 바로 열린 교회입니다. 열린 교회가 되려면 먼저 성도들이 열린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교인들이 마음 문을 꽉 닫고 있으면 열린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옆에 분과 인사합시다. “우리 열린 성도가 됩시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열린 문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열린 문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는 첫째,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안고 교회의 울타리 안에만 있으면 안 됩니다. 복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나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로 들어오라고 초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복음의 문을 활짝 여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열려있다는 것은 늘 그 교회에 주신 전도의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상황도 보면 전도에 특별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해방 후에, 한국전쟁 후에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로 찾아오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가 드로아에 갔을 때 하나님이 유럽의 관문을 열어주셔서 마게도니아 도성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도의 문을 열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골로새 교인들에게 내게 전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도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울 때 하나님은 우리 한국에 전도의 문을 열어주셔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우리 땅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에 망하고 패전의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가난의 설움을 이길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맥아더 장군이 미국의 선교부에 편지를 보내서 “지금 일본 사람들은 너무 가난합니다. 마음이 열려있습니다. 지금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싶어합니다. 빨리 선교사들을 수 천명 보내주셔서 일본을 복음화시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미국 선교부에서는 선교사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10년 동안 100명도 채 안 되는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0년이 지나니 일본이 다시 경제를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잘 살게 되고 경제가 부흥하니 다시 마음이 교만하고 닫혀 버렸습니다. 그 때는 복음을 가져가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전 국민 가운데 1%도 안 되는 기독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20%라고 생각하면 상상이 되실 것입니다.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몽고에 가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징기스칸을 꼽습니다. 그런데 그 징기스칸의 손자가 쿠발라이칸 이라는 원나라 황제였습니다. 동방견문록을 작성한 마르코폴로가 원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가면서 이탈리아 교황청에 황제 친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이 우리나라에 과학교사와 종교교사를 많이 보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선교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5명을 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다 죽어버렸습니다. 25년 만에 다시 갔는데 겨우 한 명이 갔습니다. 그 때 가니 황제가 이미 죽고 정권이 바뀌어버렸습니다. 복음의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복음의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다고 믿습니다. 건축 이후에 많은 새신자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이 때,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하는 교회가 열린 문을 가진 교회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구세군 대장인 월리엄 부스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뜨거운 영혼에 대한 열정을 가지신 분입니다. 한 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갑판 위에 이상한 변장을 하고 북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 때 윌리엄 부스는 북 치기를 멈추고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퀵 블랭이라는 시인이 빈정댔습니다. 아니, 당신은 구세군 대장쯤 되어서 그렇게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냐고 말입니다. 그 때 윌리암 부스는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내가 한 영혼이라고 구원할 수 있다면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북을 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영혼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일을 못하겠냐고 말입니다. 그 말 속에는 영혼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싱가풀에 가면 아주 유명한 침례교회가 있습니다. 작은 도시에서 몇 만 명이 모이는 교회인데 그 교회의 목사님이 로렌스 콩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는지 그 목사님이 매직, 마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마술을 배워 많은 사람을 초청하고 마술대회를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신기해서 쳐다봅니다. 그리고나서 마술이 끝나면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한국에 와서도 마술을 하면서 복음을 증거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분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목사님이 남을 속이는 마술을 하느냐구요. 그러나 로렌스 콩 목사님은 내가 한 영혼이라고 구할 수 있으면 마술 그 이상도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전도하는 그 열정이 얼마나 귀합니까? 전도하는 교회가 바로 열린 문을 가진 교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전도에 힘써서 우리 교회에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열린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하늘 문을 열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도구가 되는 것을 아십니까? 너희는 내게 무엇이든 구하라 그러면 내가 줄 것이다, 네가 찾으라 찾을 것이다, 너희가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즉 기도는 바로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늘 문을 열고 하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다 목격했습니다. 야곱도 형 에서를 피해서 멀리 외삼촌 라반에게 도피하다가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는데 환상 중에 하늘 문이 열리고 사다리가 놓이고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까지 기도했는데 그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하늘 문이 활짝 열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기도하는 성도들에게는 하늘문의 축복이 열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늘 문이 열릴 때 축복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의 삶이 은혜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솔로몬이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이후에 그가 하나님 앞에 성전을 봉헌하고 나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 성전에 나와서 기도할 때 하나님 응답해 주소서. 우리가 전쟁 가운데 있을 때 기근가운데 있을 때 질병 가운데 있을 때 실패 가운데 있을 때 이 전을 향해 기도하면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오늘 우리 교회가 그런 축복을 누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피와 땀과 기도를 통해서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이제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하늘 문을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할 때 진급의 문이 열리고 사업의 문이 열리고 성공의 문이 열리고 대학의 문이 열릴 줄로 믿습니다. 하늘 문을 여는 열쇠, 그것이 바로 기도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로, 열린 문을 가진 교회는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 지역의 도성이 되면 안됩니다. 예수님도 변화산에 올라가셨지만 거기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올라가셨는데 거기서 모세와 엘리야를 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에 초막을 짓고 여기에 거하자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니 너무 좋아서 여기 있자고 하지만 예수님은 내려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밑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역 사회를 향해서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건축을 하고나서 어린이집을 개설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린이집이 근 70여명에 이르는 많은 아이들이 와서 공부하고 뛰노는 배움터가 되었습니다. 또한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마 내년에는 90명 정도의 아이들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어린이집을 통해서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와 말씀을 배우고 좋은 신앙의 교육을 받고 부모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감사한 것이 방과후교실을 시작한지 한 두달 정도 되었는데 이 방과후교실이 참 인기가 좋습니다. 이 지역에 어려운 살림 속에 있는 많은 분들이 아이들을 보내셔서 교회에 와서 방학 동안에는 아침 9시에 와서 공부하고, 교회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저녁까지 배우다가 돌아갑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얼마나 아이들이 방과후교실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수영장도 가고, 견학도 가고 아주 즐겁게 생활합니다. 또한 참 감사한 것이 그 아이들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오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더라구요. 어느 날 제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 방으로 올라오다가 초등학교 1,2학년 으로 보이는 아이들 둘을 만났습니다. 어찌나 열심히 뛰어놀았는지 얼굴은 새카맣고 온 몸도 옷도 땀과 때가 가득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어디가냐고 물었더니 놀이터에 간답니다. 아이들에게 “너희들 이 엘리베이터 타면 돈 내야 되는데...”하고 장난을 걸었습니다. 아이들은 “정말 돈 내야 되요?”하고 눈이 동그래지더니만 이내 “저희는요 방과후학교 학생이예요!”하는 거예요. 자기들은 거기 공부하는 학생이니 돈 안내도 된다고 당당합니다. 다른 아이들같으면 쭈뼛쭈뼜했을텐데, 혼 날 것 같아 주눅들었을텐데 그 아이들은 방과후교실 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너무 당당하더라구요. 교회 놀이터는 자기들 놀이터입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 교회가 참 좋은 일을 하는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대개 방과후 교실 오는 아이들 보면 생활이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이 많습니다. 부모님들이 맞벌이로 나가면 아이들끼리 더운 여름에 방 안에 방치되는데 그런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마음껏 뛰놀고 공부하고 맛있는 음식 먹고 놀이터에 놀고 견학도 아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런 좋은 프로그램들이 앞으로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에는 우리가 경로대학을 시작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이 지역의 어른들이 교회에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리라고 기대해 봅니다.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 그것이 바로 열린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열린 교회는 서로를 사랑으로 용납하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열린 교회가 되려면 성도들의 마음이 열려야합니다. 성도들 마음속에 막힌 담이 있다면 그것이 허물어져야 합니다. 때로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용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와 의견이 다르면 원수처럼 여기고 적대시하면 틀린 것입니다. 의견이 달라도 그도 바로 그리스도의 형제요 그리스도의 자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옆 분들과 인사하십시다. “당신과 나는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열린 교회를 지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가족이 와도 환영을 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나친 주인의식, 텃세의식을 가지고 주인 노릇하면 안됩니다. 왜입니까?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새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성경의 말씀이 있습니다.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 오래 넣어두면 그 가죽 부대가 굳어진답니다. 딱딱하게 되어서 결국 찢어져 버린다고 합니다. 무엇입니까?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교회는 많은 장점과 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칫하면 우리 신앙이 독선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경직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평가하고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난한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빌라델피아 교회에 주시는 마지막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주님은 오늘 고난받는 빌라델피아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속히 갈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면류관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그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도록 굳게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재능과 특별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주님이 그것을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그것을 빼앗아서 다른 교회에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충성과 순종의 삶을 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면류관을 빼앗긴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특권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그는 자기 동생 야곱에게 그 면류관을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왕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어린 다윗에게 왕의 직분을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불완전한 성격 때문에 결국 넷째 동생인 유다에게 장자의 면류관을 빼앗겨 버립니다. 가롯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림으로써 사도의 축복을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과 축복의 자리 가운데서 이것을 활용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는다면 우린 언젠가 이 면류관을 빼앗겨 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옆에 계신 분과 얘기합시다. “면류관을 빼앗기지 맙시다!”

  어떤 교회에 가니, 성가대 석이 50석입니다. 그런데 성가대원은 60명이 됩니다. 늦게 오는 분들은 성가대석에 자리가 없습니다. 늦게 오면 성가대에 자리가 없다고 하니 성가대원이 자리 차지하려고, 성가대석에 서로 앉으려고 일찍부터 앉아서 대기중이라고 합니다. 면류관을 빼앗길까봐 그 축복을 빼앗길까봐 말입니다. 우리는 성가대석이 너무 넓어서 늦게 와도 내 자리가 있나니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진 이 축복,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린 충성하고 순종하는 분들 되셔야 합니다. 마지막 12절에 보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는 보아스와 야긴이라는 두 개의 기둥이 있어서 그 집을 떠받들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순종하고 지키고 이기는 사람에겐 하나님의 기둥, 즉 중요한 인물로 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기둥이란 말이 나쁜 의미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곧아야 합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말씀에 바로 서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천상의 기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영신교회가 이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열린 교회가 되어서 이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마음껏 신앙생활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교회, 우리에게 주어진 이 아름다운 축복과 특권을 잘 지켜서 하늘의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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