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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자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난다 (막 16: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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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셨을 때 그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14절 말씀에 보면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라고 했습니다. 믿음 없는 것도 모자라서 완악하기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완악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완악하다는 믿음이 없는 정도를 넘어서 그 마음이 아주 단단하게 굳은 것을 의미합니다.

  표적과 이적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믿는 자들에게는...”이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표적과 이적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고향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의 권위 있고, 세력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의 지혜와 권능이 어디에서부터 오느냐?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의 형제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이 우리와 함께 있고,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하면서 그분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게 되자 예수님은 그곳에서 능력을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향에서 능력을 행하시지 않은 것입니까?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날 제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이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그저 그분에 대해 아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떻게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동네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아는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능력을 믿고 우리가 선언하면서 나가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쓴 4차원의 영적 세계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어느 자매가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그녀는 목 아래가 마비되어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를 보자마자 가슴이 요동하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가슴을 파고들어 옵니다. 눈을 들여다보니 그 자매의 마음에는 이미 자신이 목사님의 기도를 받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자매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자매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은 나았습니다.”라고 믿음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즉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들것에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정말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 자매가 기적적으로 낳았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얼마 후에 부유한 어느 여자 집사님이 목사님을 방문했습니다. 그녀 역시 들것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경에 기록된 신유에 대한 많은 구절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오랜 세월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에 많은 구절들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향해 목사님은 있는 힘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무런 표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 집사님에게는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들것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쓰러지곤 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치료되지 못한 채 절망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조용기 목사님은 그 책에서 두 사람의 차이는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의 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한 사람은 그 마음에 정말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위를 걸어오라!”고 하신 것처럼 그 마음에 주의 성령이 선포하신 믿음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유한 여집사님에게는 “기록된 말씀은 있었지만 그 마음에 주님께서 선포하신 믿음의 말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이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이 정말 내 말씀이구나. 내가 이 말씀을 들으니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는 구나 ”하고 가슴에 느끼면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고, 삶 속에서 정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체험하게 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찡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어떤 역사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적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듣는 귀가 닫혔으니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변화가 되고, 기적이 일어나고 무엇인가 인생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기 위해서는 내 가슴을 흔들고 몸을 흔들고 천지를 흔드는 듯한 강력한 말씀에 붙들려야 합니다.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했을 때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나는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그 자리에서 즉시로 일어났습니다. 그가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 말씀이 자신을 일으키는 능력의 말씀이라는 것을 그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무엇인가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그를 사로잡고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앉은뱅이가 베드로가 “일어나라!”고 선언한 그 선포의 말씀을 가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가 그 자리에서 일어 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아마 ‘미친놈 돈이나 주고 갈 것이지 헛소리는 왜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멀뚱멀뚱 베드로를 처다 보았을 것입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내 인생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나를 붙드는 능력의 말씀을 믿을 때부터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 순간부터 나는 믿음의 능력에 붙들려 기적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단단하여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꾸짖었다고 하셨습니다. 16절에는 더욱 심각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믿지 않은 사람들은 정죄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강력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하셨기에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구할 것을 담대함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도 걱정하는 것은 그 말씀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약5:13~16)고 하셨기에 그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고난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다가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사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서로 고백하고, 병 낫기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18절 말씀에 보면 믿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믿음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병든 사람이 분명이 있습니다. 현대 질병의 80%는 마음에서부터 오는 질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먼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의 치유가 없기 때문에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면 평안이 오고, 빼앗긴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치유를 받아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고,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와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치료 되야 내가 아닌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악한 영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는 믿음이 좋은 것같지만 사실은 악한 영에 붙들려 살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에 짓눌려 살고 있습니다. 분쟁의 영에 붙들려 가정이 파괴 되고 있습니다.

  지난주 일에 금식 마지막 날이라 아주 힘든 날이었지만 자신의 아이가 영에 붙들려 있으니 치료해 달라는 말을 들고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아이는 만난지 십분도 안되어 잠들어 버렸습니다. 힘든 몸을 이끌고 설교를 약 1시간 정도나 했습니다. 왜 그렇게 오래했느냐?하면 그 부모들이 병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 다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소년부 교사라고 했습니다. 자매도 기도도 열심히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의 마음에는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부부가 내면의 깊숙한 대화 하지 않고 지낸지가 벌써 수년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집에서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얻고 축복 기도해 준 적이 있느냐?”아이가 태어난 후로 한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목사님께 축복 기도를 받은 적이 있었느냐? 담임목사까지 다섯 분의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 있었지만 한 번도 아이가 목사님으로부터 축복을 비는 안수 기도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무슨 가정이 이렇습니까? 주일학교 교사이면서도 믿음의 아버지이면서도 자녀를 위해 기도하며 축복한 적이 없고, 목사님으로부터 축복 기도를 받아 본적이 없는 아이가 어떻겠습니까? 막내 아이가 깨어 있기에 그 아이의 머리에 손을 대었더니 손을 밀어냈습니다. 그 아이는 그것이 너무도 어색하고 이상한 것입니다.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축복을 받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정을 위해 기도를 마친 후에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집에 들어 올 때마다 “이 가정에 큰 복과 평안이 있을 지어다!”라고 외치면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선 여러분들에게 있는 악한 귀신의 무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아주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가정과 마음의 집들이 얼마나 어두운 영들에게 눌려 있고, 저주의 영들에게 눌려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분명히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그 첫째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할렐루야!

  다른 것은 하지 못하더라도 가정에 있는 악한 귀신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더러운 귀신, 음란의 귀신,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귀신, 육체의 정욕과 온갖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귀신들을 쫓아 내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오직 성령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평안과 안식과 기쁨과 소망이 넘치며, 찬양이 넘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집에서 분노의 소리가 높아지면 안 됩니다. 집 안에서 아내를 멸시하거나, 남편을 저주하는 소리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욕하거나 영적인 지도자인 교회의 목사님을 비난하거나 기도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목소리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들의 집에서 찬양이 멈추고 기도가 멈추고 말씀 읽는 소리가 멈추었다는 것은 이미 귀신들이 그 집을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 갈 때마다 선언해야 합니다. “내 집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집이다” 할렐루야!

  둘째로 믿음의 사람들은 새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새 방언이란 새로운 언어를 의미합니다. 본문의 새 방언은 영적인 언어로서의 방언을 의미합니다. 방언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를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처럼 새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어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부정적인 언어에서 반드시 긍정적인 언어로 바뀌어야 합니다.

  할 수 없다라는 말에서 할 수 있다는 말로 바뀌어야 합니다. 창세기 1:2절에는 성령님께서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했습니다. 운행하다라는 말은 새가 알을 품듯이 품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을 품으셨지만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선언하셨고, 그 때서야 비로소 빛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성령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선언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그림을 잘 그려야 합니다. 긍정적인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10년 후의 나에 대해 부정적인 그림을 그리면 안 됩니다. 20년 후에 나에 대해 아주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잠언 23:7절에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어떤 그림을 품고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그릇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새로운 말을 해야 합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하고, 위로의 말을 하고, 기쁨의 말을 하고, 소망의 말을 자꾸 해야 합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다윗도 말하기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자신을 위로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절대로 절망이 오고, 낙심이 오고, 좌절이 올지라도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의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처럼 자신을 붙들고 위로하고 힘을 주는 적극적인 말을 할 때 그 사람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독을 먹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공기 중에 얼마나 많은 유독가스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바이러스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뱀이라는  것은 우리를 유혹하는 악한 세력을 상징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오늘도 마귀는 뱀처럼 혀를 놀리면 우는 사자의 모습으로 우리들을 삼키기 위해서 달려들고 있습니다. 함정을 파고 죄에 빠져 고난의 길을 가며 불신의 길을 가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나갈 때에 모압 여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꾀어 우상에게 절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간음하게 하는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 앞에 온갖 세상의 우상과 덫을 놓고 유혹합니다. 거짓된 물질에 빠지게도 합니다. 헛된 권세에 빠지게도 합니다. 화려한 세상의 쾌락과 육체적인 죄악에도 빠지게 합니다. 우리는 비느하스처럼 우리의 죄악을 날카로운 말씀의 창으로 찔러 제거해야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들은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하신 분입니다. 누가 예수이 피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을 정죄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바라보는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악한 마귀의 권세, 뱀의 권세와 영혼을 죽이는 온갖 독약의 권세들이 물러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권세를 이기기도 남을 예수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찬양)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

  낙심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 합시다.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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