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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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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 중에 보신탕이 있다. 수년전에 유럽의 동물애호가들이 보신탕을 먹는 한국인들을 비난했다. 그 무렵 비난을 희석시킬 만한 재미 있는 TV 광고가 하나 있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어!?”

게맛은 몰라도 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맛을 모르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맛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원하는 간구를 드리고 있다. 지식적 사랑아니라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통하여 알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에는 사도 바울의 주옥같은 기도문 2개가 있다.

첫 번째는 엡1:17-19의 내용인데, 그 기도는 성도 각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1)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도록.
2)성도들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도록.
3)성도들이 장차 받을 유업이 무엇인지 알도록.
4)성도들에게 주신 능력과 지극히 큰 것을 알도록.

이 사실들에 대해서만 알고 있어도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기도문은 엡3:14-21의 말씀이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도 바울의 자세가 예사롭지 않다.

엡3:14-15,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이신가? 세상 모든 족속들의 기원이요 창조자가 되신 아버지이시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그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었다라는 것은 그의 간절한 마음의 외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이 기도는 반드시 들어 주셔야 합니다!” 간절하고도 적극적인 자세, 몸으로 드리는 기도였다. 

그러면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 두 번째 기도문도 4가지로 요약되는데 ...

1)속 사람을 강건케 해달라는 것.
2)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도록.
3)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
4)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도록.

이 두 번째 기도문은 첫 번째 기도문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것이 성도 각자 개인을 위한 기도라면 두 번째 것은 교회공동체를 위한 기도문이다.

첫 번째 기도문대로 성도가 알고 있다면 그는 이미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기도대로 응답된 교회라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 능력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다른 기도 제목은 제외하고 17절로 19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초점을 맞춰 살펴 보고자 한다.

그리스어에는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가 4개 있다.

1)에로스 - 이성간의 사랑
2)스톨르게 - 부모의 사랑
3)필로스 - 친구 간의 사랑
4)아가페 - 무조건적 사랑. 하나님의 사랑.

사도 바울은 지금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아가페 사랑을 소유하기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가페 사랑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엡3:19상,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

그리스도의 사랑을 네 가지 측면으로 표현하면서 간구하고 있다.

1)넓이가 어떠한지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2)길이가 어떠한지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3)높이가 어떠한지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4)깊이가 어떠한지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죤 스타트 목사는 이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넓이가 한이 없다는 뜻은,

온 인류, 곧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다 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의 넓이가 한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랑의 폭은 좁다. 특별히 에로스적인 사랑, 이성 남녀간의 사랑은 진하고 독해서 사랑에 빠지면 두 사람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 중에서 제일 저급한 사랑을 에로스적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다. 하나님은 유대인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요3:16의 말씀대로 “세상을 다” 사랑하신다.

계5:9-10,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2)길이가 한이 없다는 뜻은,

영원까지 계속될 만큼 긴 사랑을 말한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3번까지 봐준다. 베드로는 7번까지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70번씩 7번까지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제한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변함 없이 기다려 준 사랑이었다.

3)높이가 한이 없다는 뜻은,

하나님의 보좌에 도달할 만큼 높은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악과 죽음의 수렁에서 건져내셨다.

시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그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고, 그리고 장차 영광스러운 하나님 보좌 우편에 두실 것이다.

4)깊이가 한이 없다는 뜻은,

타락하여 가장 밑 바닥에 있는 죄인에게 도달할 만큼 깊은 사랑이라는 뜻이다.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장 사이에 빠진 부분이 있다. “못 박혀 죽으시고” 다음에 “지옥에 내려가시고..”라는 부분이 빠져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지옥까지 내려 가셨다. 이 말은 그 분의 사랑의 깊이가 지옥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1993년 불교계의 큰 어른이신 성철스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글귀에서, “자신이 평생에 지은 죄가 수미산을 지나쳐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했다. 그 어른은 자신의 지은 죄로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지옥 밑바닥에 떨어질 만큼 큰 죄를 지은 자도 용서하실 수 있을 만큼 깊은 사랑을 가진 분이시다. 예수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는 것이다.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만난다. “내 죄가 너무 많아서 교회 나갈 수 없습니다.” 자기 죄 때문에 못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집 때문에 못나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다툼과 시비가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자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와 같다. 그런데 어찌하여 100데나리온 빚 때문에 자기 친구를 고소하고 있느냐?”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다툼과 시기가 사라지게 된다.

사도 바울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 이유는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쏟아 부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레만이라는 목사가 있었다.

그는 주로 가난한 시골 교회만 전전해 왔던 목사였다. 그러나 레만 목사는 시적 재능과 음악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가 너무 어려워서 그의 생활비를 충분히 공급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생계를 위해서 치즈공장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점심 도시락을 먹으려는데 도시락 속에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부인이 시 한 구절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바다가 먹물이고 하늘이 두루마리인들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다 적으랴!” 이 시는 11세기 죠셉 마커스라는 사람이 아람어 시를 번역해 둔 것이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레만은 그 싯귀로 인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그의 머리 속에 찬송시와 곡조가 완성되어 오선지에 옮겨 놓은 것이 바로 찬송가 404장이다.

3절,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지난 주, 2005년도 인구센서스의 종교인구 발표에서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861만명이라고 보도되었다. 10년 전의 통계와 비교해 보면 천주교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고, 기독교는 15만명이 줄었다. 숫자는 많은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1-3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일이요, 짐이 된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예수를 알기 전에 포학자요 훼방자요 죄인 중의 괴수였다고 고백했다.

그때는 자신이 죄인인줄도 몰랐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보니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구원받은 것이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인 것을 알았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난 후 비로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다.

빌3:8-9상,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먼저 나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맛을 아는 것이다.

다음 주일, vip초청주일이다. 전도대상자로 인해 상당한 심적부담감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해야 할 일이다. 강권해서라도 데려와야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그의 마음을 품을 때 다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게 될 것이다.

마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실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토요일 휴무가 시작되면서 안 믿는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그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갖는가?

- 어휴 부럽다. 난 이게 뭐야. 이 좋은 날, 놀지도 못하고 교회에 묶여만 있고... 스트레스!!

그러나 부러워하지 말라. 탕자의 가출이 처음에는 화려하고 멋 있어 보였으나 나중의 그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상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수 없는 즐거움은 공허할 뿐이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다.

세상 일과 사람을 통해 사랑을 구하지 말고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그 큰 사랑을 기억하라.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큰 사랑, 영원한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기 바란다. 그럴 때 여러분의 눈에 Vip가 들어올 것이다. 그 때 우리가 받은 그 큰 사랑을 전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을 가지고 의 삶이 그 큰 사랑을 전해주는 복된 인생이 되길 바란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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