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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 짓 (롬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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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모든 성도들에게 역사하는 내적인 생명

신학자 폴 틸리히는 현대 교회 교인들의 현실을 이렇게 진단한 바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 중 10%는 죽었고, 80%는 잠자고 있고, 10%만이 깨어있다' 이 말을 성령과 연결하여 해석한다면 '현대 교인들 중 성령 충만함을 받은 이가 10%요, 성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가 10%요, 성령을 알고 체험하고 받았지만 점차 소멸해 가고 있는 이가 80%'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대부분 조직의 핵심 멤버는 조직원의 10% 정도입니다. 10%의 사람들이 그 조직을 실제적으로 이끌어 가는데 그들이 바로 그 조직을 지탱해 가는 최소한의 멤버입니다. 그리고 어느 조직이든 10% 정도는 방관자로서 그 조직에 전혀 무관심하며 그냥 이름만 걸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그 조직이 발전하느냐 쇠퇴하느냐는 나머지 80%에 달려 있습니다. 이들은 유동적인 사람들로 중간 지대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얼마간의 의무는 행하지만 역시 소극적인 자들인데 그래도 소속감은 갖고 있는 이들입니다. 이 80%에 해당하는 자들이 어느 쪽으로 쏠리느냐에 따라 그 조직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에도 이와 같은 법칙이 적용됩니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시작은 12명의 제자들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들 12명의 핵심 멤버들과 더불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핵심멤버도 실은 한 사람의 소중한 구원받은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영국의 설교자 스펠전은‘하늘의 보고를 여는 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성령 안에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며, 우리의 본성과 삶이 변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짜이고, 우리의 고백은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화되는 것은 절대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화되지 않도록 하는 믿음은 부패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 중에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만약 성령을 받았다면 어찌하여 여전히 전통의 노예, 죄의 노예, 율법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을 꼭 해야 할 몇 종류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늘 울적한 얼굴과 근심어린 표정을 하고 살아가는 성도

위로자 되시는 성령님이 계시는데 주님 안에서 늘 즐거워하지 못하고 어찌 우울해 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일원이지만 매우 기분이 언짢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떤 것이든지 반드시 흠을 잡는 타고난 불평장이입니다. 그렇게 불안하고 불행해 하며, 모든 사람을 성가시게하고 귀찮게 하는 그대여! 그대는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또 다른 사람은 갑자기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

그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끄집어냅니다. 그 후에 그는 그 일에 대하여 미안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그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를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격정을 쏟아 붓고 나중에 냉정을 되찾았을 때, 그 일에 대하여 후회하는 그대여! 그대는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또한 세상 즐거움에 빠져 있는 사람

그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떠들어 댈 때 안정감을 느끼는데 경건의 즐거움은 무시합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에 빠져 있는 그대여! 당신은 믿은 이후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돈을 모으기 위해 사는 사람

그는 부유해 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괴롭힙니다. 탐욕스런 돈을 한참 모으고 있는 그대여! 당신은 믿은 이후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찬양하면서 아침에 종달새처럼 높이 날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아버지의 뜻을 순종합니다. 거룩한 땅의 꿀을 담고 있는 그들의 매일의 대화는 감미롭습니다. 그들과 십분만 같이 있어도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는 그들을 봅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질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일상적인 하루는 깊은 잠에서 깨어남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무엇이 여러분의 깊은 잠을 깨워서 오늘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입니까? 소음입니까? 햇빛입니까? 시계입니까? 또한 인생의 깊은 잠, 나태와 무기력과 나약함, 절망과 좌절과 영적 침체의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그 마음과 영혼을 깨워주셔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새로운 몸짓을 시작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육신은 공기로 숨을 쉬지만 우리의 정신은 희망으로 숨을 쉬는 것처럼 각 분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는 사람을 희망을 가지고 배출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크게 쓰임 받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일 성령강림주일을 지냈고 지금은 교회 절기로 오순절 기간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쉽게 말하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생긴 예루살렘 교회의 창립기념일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교회의 부흥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는 교회는 분란과 침체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되지만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이 은혜안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운 행복감이 느끼게 됩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성장하고 성숙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어떻게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성령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성령 충만함으로 창조적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항상 성령 충만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기쁨을 줍니까? 혼자 자기에게 영광이 되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보다 전체를 생각하고, 형제를 생각하면서 협력하며 일하는 사람이 기쁨을 줍니다. 앞에서 열심히 일하면서도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또한 뒤에서 조용히 협력하는 사람을 봐도 마음이 얼마나 시원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협력 중에서 최고의 협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해보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은 대개 넉넉함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은 항상 큰 일 난 것처럼 흥분하며 말하는 사람입니다.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듣는 사람이 다 불안하게 됩니다. 우리는 좋은 말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좋은 일을 한 다음, 그 칭찬을 우연히 외부로부터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마음이 뿌듯하고, 모든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듭니다. 반면에 우연히 다른 사람을 통해서 부정적인 말을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해지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듭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원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답답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항상 막힌 담을 뚫어 주는 시원스럽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출산하고 생명을 살리는 교회

여러분, 생명을 출산하고 생명을 살리는 교회는 필연적으로 전도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양육하는 교회,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아가서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배우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유능한 자나 무능한 자나, 함께 모이면 차별의식, 열등의식, 부끄러운 수치감이 아니라 서로 떳떳이 고개를 들고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힘이 가난한 자,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재와 미래를 사는 사람

믿음의 사람은 과거에 살지 않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성공이나 실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과거를 따지지 않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 점검하고 살펴보면서 새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차지해야 할 백성들이기 때문에 과거를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에 자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주 과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무거운 짐을 혼자 지고 끙끙대며 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

누에는 계속 자라다가 때가 되면 그물을 만들기 시작해서 고치 속에 들어가 그 안에서 잠을 자는데 누에의 몸에는 특수한 세포가 여기저기 있습니다. 그 세포들이 애벌레로 사는 동안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자랐을 때에는 몸에서 무슨 성분이 나와서 고치를 만들고 잠을 잡니다. 자는 동안 이 세포가 퍼지기 시작하여 서로 연결해서 퍼지고 마침내 이 세포들이 애벌레의 나머지 부분을 다 먹어버립니다. 그리고 누에벌레가 없어지고 대신 나비가 나옵니다. 벌레가 변해서 나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비의 세포가 벌레 안에 있었는데 처음에는 조그만 세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세포가 퍼지고 퍼져서 변화를 일으켜서 마침내 나비의 몸뚱아리와 날개 등 여러 지체가 따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창조의 과정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구역이나 다락방 등 소그룹이 아름다운 공동체로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과 은혜와 아픔과 희망과 비젼을 나눔으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퍼지고 퍼져 마침내 서로 연결되어서 완전히 새로운 교회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요란한 외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개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벌레에 속하는 신자들이 우리를 보고 성령을 받아서 나비에 속하는 신자가 되려고 힘쓰며 육적인 신자들이 점점 없어지는 대신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들이 많아져서 교회 전체가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나 자신부터 모여서 조그만 공동체를 시작하고 그것이 점점 퍼지고 퍼져 마침내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 받은 우리 신자들에게 부여된 책임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

오늘 성경말씀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며 또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이요, 그 얼굴이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충만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밝은 이성의 지배를 받고, 이성은 영의 지배를 받고,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에 인도함을 받을 때,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존 번연이 지은 유명한 "천로 역정"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그리스도인이 순례의 길, 하늘나라를 향해서 멀리 여행을 떠나는데, 그 어느 곳에 가서 한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 방에서 누가 청소를 하는데 그저 비를 가지고 먼지를 열심히 쓰니까 그 먼지가 일어나서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뽀얗게 되었어요. 쓸려고 하면 할수록 더 방이 어지러워지고 더러워지는 것을 보면서 인도자에게 묻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저것이 율법이니라.  바르게 해보려고 애쓰고 또 애쓰고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죄가 많아지고 점점 더 어지러워지느니라." 바로 옆방을 들어가 보니까 그 옆방에는 먼지가 똑같이 많은데 쫙 다 물을 뿌리고 청소를 하니까 깨끗하게 청소가 되는 겁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성령이니라. 이건 은혜의 역사니라."

여러분 내 노력으로 바로 해 보려고, 뭐 큰 일 해보려고 몸부림치고 애써보아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먼지만 나고 점점 더 형편없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성령의 역사 안에서만 깨끗하게 되고 모든 율법과 죄와 허무함과 불의함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형성이 되었고 바른 신앙고백 위에 서서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신앙의 시작과 하나님 사역에의 참여는 모두가 성령의 지도하심과 주관하심에 의하여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성령의 충만하심과 교통하심을 믿고 기원하면서 거룩한 교회 공동체를 섬기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에 매진하게 됩니다. 성령은 결코 우리를 종교적 자아도취에 빠지게 하거나 비정상적 삶을 사는 신비주의자가 되게 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부르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거룩의 영이신 그분께 대한 순종과 헌신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으심으로 이룩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온 교회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 짓

길을 잃어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등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기회는 위기 덕분이고, 일류는 이류 덕분이고, 고귀함은 고생함 덕분입니다. 상처는 상급을 기약합니다. 만신창이가 되어도 사는 길은 있습니다. 넘어진 곳이 일어서는 곳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때가 가장 희망적인 때이고, 어두움에 질식할 것 같을 때가 샛별이 나타날 때입니다. 희망이 늦을 수는 있지만 없을 수는 없습니다. 별은 멀리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축복은 조금 멀리 있어 보일 때 오히려 인생의 보약이 됩니다. 늦게 주어지는 축복이 더욱 풍성한 축복입니다.

꿈과 희망은 영혼의 날개입니다. 내일의 희망이 있으면 오늘의 절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꿈과 희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실현하고자 하는 꿈과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꿈과 희망은 축복의 씨앗이고, 행복의 설계도입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삶을 바라보십시오. 힘들다고 느낄 때 진짜 힘든 분들을 생각하십시오. 절망 중에서도 마음속에 태양을 품고 온기를 느끼십시오. 바른 길로 이끄는‘상처의 표지판’을 긍정하며 내일의 희망을 향해 훨훨 나는 나비가 되십시오.

19세기의 최대의 시인 롱펠로우는 그 명성에 비하여 많은 시련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유학중에 첫 번째 부인을 잃고 재혼한 두 번째 부인마저 불행한 사고로 불타 죽었습니다. 롱펠로우는 그렇게 인생의 쓰라린 경험자였습니다. 롱펠로우가 75세가 되어 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선생님은 두 부인의 사별 뿐 아니라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것으로 아는데,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가 있었습니까?" 이에 롱펠로우는 마당에 보이는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했습니다."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지만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옛 가지에서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 생명을 계속 공급받아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롱펠로우에게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생명과 부활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 성령의 능력 안에 사는 사람은 그 삶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성해 집니다. 지칠 줄 모르는 생명의 세계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 짓'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령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새 피조물로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고민하며 새로운 꿈과 소망을 향해 달려갑니다. 심령 가운데 샘물처럼 솟아나는 단 하나의 기쁨, 생명과 진리를 좇는 행복을 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삶, 승리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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