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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으시는 하나님 (신 1:30~33, 막 9: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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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혈구와 적혈구의 사랑 이야기’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혈액 속에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그리고 혈장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백혈구는 몸에 어떤 이상한 침입자인 병균이 들어오면 침입자를 처리합니다. 백혈구가 침입자를 처치하는 모습은 신비합니다. 백혈구는 침입자를 향해 절대 무력을 쓰지 않습니다. 대포를 쏘거나, 기관총을 난사하거나, 화학약품을 뿌리거나, 심한 욕설을 하는 게 아닙니다. 백혈구는 침입자를 품에 껴 안아버립니다. 아주 깊은 사랑으로 감싸줍니다. 백혈구에게 안긴 침입자는 황홀하여 정신을 잃습니다. 백혈구의 사랑에 감동하여 녹아버립니다. 백혈구의 이 사랑이 놀랍기만 합니다. 보기 싫든, 지저분하든 가리지 않고 모두 껴안아줍니다.

  적혈구도 백혈구처럼 아주 사랑이 넘칩니다. 골수에서 태어나 폐에 가서 산소 받아들여 자기 몸에 가집니다. 적혈구는 언제나 생명인 산소를 풍성하게 품고 있습니다. 적혈구는 혈액 속 이리 저리 다니면서 산소가 필요한 세포가 있으면 아낌없이 다 줍니다. 자기 몫은 챙기지 않고 온전하게 다 나눠줘 버립니다. 그리고 4일쯤 살다가 비장에 가서 적혈구로서의 역할을 끝내고 죽습니다. 백혈구의 사랑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반면, 적혈구의 사랑은 모든 걸 나누어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껴안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주고 죽는 사랑입니다.

  “생명, 사랑”이란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전쟁 중에 폭격으로 어머니가 죽어 있습니다. 죽은 어머니의 품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죽은 어머니의 품에서 잠들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아기는 살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죽어서도 아기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그 아기의 천진난만한 잠든 모습에 생명의 고귀함이 스며있습니다. 어머니의 품에는 사랑이 스며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광야생활은 놀라운 기간입니다. 40년의 은혜는 완전한 은혜입니다. 가장 괴롭고 긴 여정이지만 가장 은혜로운 여정입니다. 그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생활하던 아무 것도 없는 시대는 모든 것을 가진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하신 시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안아주셨습니다.

  광야는 구원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까지의 과정입니다. 광야란 지금 우리의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이 여정 가운데서 우리도 안아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안아주십니다. 안고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시며, 세상의 위험에서부터 벗어나게 안아서 옮겨놓아 주십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이들은 길을 가다가 조금만 힘들면 그냥 두 팔을 벌립니다. 안아 달라는 사인입니다. 부모들은 아이의 사인에 안아줍니다. 아이들은 외출 중이라도 졸리면 아무데서나 잡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권입니다. 부모의 사랑에 대한 아이들의 신뢰입니다. 우리도 그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신뢰가 있습니다.

  김홍식의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는 글에는 아빠의 사랑은 아이에게 정서적인 안정을 주고, 고난에 대항하려는 용기를 갖게 한다고 합니다. 아이를 안아주는 아빠의 팔은 그저 단순한 두 개의 팔이 아니라 아이의 인격과 삶을 형성하는 인생의 버팀목이라고 합니다. 그 팔에 담긴 아빠의 마음이 아이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팔은 우리 인생의 버팀목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팔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이사야 46:3에는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태어남으로부터 하나님께 안겨 있습니다. 하나님께 업혀 살고 있습니다. 삭막한 세상이지만 이런 사랑 때문에 버티고 있습니다. 개리 토마스는 “포옹은 접촉 스포츠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아주시고 손을 대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보여주신 모습니다. 병든 사람들, 약한 사람들에게 손을 대시고 만지시고 쓰다듬어 주신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 그대로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안으시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때로는 말로 표현됩니다. “내가 사랑한다”, “너는 내 자녀이다”,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씀들은 사랑의 말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때로는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사람들을 안으시고, 품으시고, 그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안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표현한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지 못할 것입니다.

  안음은 사랑의 가장 보편적인 표현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아기들을 안는 것은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기들은 특히 어머니와의 신체접촉이 아주 중요합니다. 모체접촉은 지능을 발달하게 만듭니다. 모체접촉이 많을수록 암에 걸릴 확률이 낮다고 합니다. 모체접촉은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합니다. 모체접촉은 결과적으로 육체와 지성과 감성에 모두 좋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에게 젖도 안 먹이고, 안 안아주고 키워놓고 나중에 아이가 머리 나쁘다고, 공부 못한다고 탓하지 마세요. 어머니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랑을 많이 베풀면 머리도 좋아지고, 몸도 건강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 건강하고 머리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식과 지혜도 쌓입니다. 이사야 40:11에는 “그는 목자 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양인 우리를 팔로 모아 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저의 형님은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친께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시고 평양신학교의 강사 겸 능라도교회 목사님이셨답니다. 형님이 돌이 막 지났을 때에 부모님은 평야에서의 삶을 접고 남쪽으로 내려오셨답니다. 돌박이를 안고 38선을 넘어 온다는 것은 여간 모험이 아닙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나면 모두가 잡혀가고 처형당할지 모르는 형편입니다. 그 때는 아기를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절대로 아기를 버리고 올 수는 없어서 향님을 때로는 안고, 때로는 업고 오셨습니다. 38선을 넘어 안전하게 남쪽에 내려올 때까지 형님이 울지 않더랍니다. 아기를 안고 오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기는 업고, 안고 며칠이라도 걸어오지만 물건을 종일 그렇게 안고 다니라면 아마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게리 채프먼의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사랑의 언어, 즉 사람들이 사랑을 구사하고 이해하는 방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제1의 사랑의 언어는 인정하는 말입니다. 제2의 사랑의 언어는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놀이하는 것은 놀이가 아니라 감정이 중요합니다. 제3의 사랑의 언어는 선물입니다. 제4의 사랑의 언어는 봉사입니다. 제5의 사랑의 언어는 육체적인 접촉입니다. 아동 발달 과정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육체적 접촉을 전혀 갖지 않고 지낸 아이들보다 안아 주거나 입을 맞춰 준 아이들이 훨씬 건강하게 자란다고 합니다. 손을 잡아 주거나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는 것은 사랑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상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미술관에 가면 렘브란트의 유화 ‘돌아온 탕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머리를 가슴에 품고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안으므로 용서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사랑으로 포용하면 모든 것이 용납이 됩니다.

  호세아 11:3에는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 하였도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안아주심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한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아이들을 안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고유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리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도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두 팔을 벌리고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안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품고 구원하시려고 그렇게 팔을 벌리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하시면서 팔을 벌리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 곳에 이르기 까지 안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평안히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안으신 것입니다. 광야생활 40년 내내 하나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40년 내내 안아주셨습니다. 40년 내내 불과 구름기둥으로 이끄셨습니다. 40년을 한결같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마 하나님은 40년이 아니라 100년이라도 그 백성들을 안으셨을 것입니다. 일주일이면 가는 길을 40년을 간 것이 광야길입니다. 하나님은 일주일만 안으면 될 걸 40년이나 안으셨습니다. 누가 더 힘들었지요? 길을 가는 백성들보다 하나님이 더 힘든 광야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안아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이 힘들어 할 때, 위험할 때, 아플 때, 모른척하거나 도망가겠습니까? 악한 부모라고 할지라도 안아 가슴에 품든지 등에 업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아버지가 버릴지라도 버리지 않는다고 하신 하나님은 버려두거나 모른 채 하지 않고 안아주시고 인도하십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아무도 만져 주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병원에서는 시간을 나누어서 교대로 간호사들이 갓 태어난 아기를 안아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에 다 들어갈 때까지 안아주십니다. 우리가 무사히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 안아주십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세 살 난 아들, 그러나 혼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안아주기만 하고 혼낼 줄 모르거나, 혼내기만 하고 안아주지 않거나 그러면 안 됩니다. 낼 땐 확실히 혼내고, 다시 힘껏 안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리한 분별력을 가진 아이로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길에서 백성들에게 얼마나 호되게 혼을 내셨습니까? 그들이 불 뱀에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백성들을 안아주고 온갖 필요한 것으로 함께 베풀어주셨습니다.

  공산당이 기독교를 핍박하던 루마니아 감옥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다가 잡혀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새로 들어온 죄수를 보고 사람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핍박하던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근무하고 있을 때에 한 소년이 꽃을 들고 면회를 신청하였습니다. “대령님, 대령님은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체포하여 감옥에 갇히게 하였어요. 오늘은 저의 어머니 생신이예요. 생신 때마다 저는 어머니께 꽃을 드리곤 했지요. 그러나 오늘은 대령님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없게 되었네요.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예요. 항상 저에게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어머니를 만날 수 없으니 이 꽃을 대령님의 아이들의 어머니에게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을 사모님에게 전해줄 수 있으세요?” 대령은 꽃을 받아들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 소년을 껴안았습니다. 그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더 이상 무죄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통을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자가 되어서 감옥에 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와 아이의 안음, 이것이 그를 변화하게 하고, 증인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안아주는 경험은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끝까지 우리를 안아 그 사랑을 변치 않고 보이실 것입니다.

결론

  전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는 ‘철의 여인’이라 불립니다. 1982년에 국운을 건 포크랜드 재탈환 전쟁을 합니다. 아르헨티나와의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과정에서 25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대처는 여름휴가까지 반납하면서 일과 후 밤마다 250명의 유가족들에게 직접 친필의 편지를 썼습니다. 이런 대처 수상의 정성이 영국 국민을 감동케 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안아줄 수 있습니다. 멀리 있어 가까이에서 안아줄 수 없는 사람들, 고통 가운데 힘들어하고 상처받은 어려운 사람을 껴안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손을 잡아줄 수도 있습니다. 편지를 써줄 수도 있습니다. 기도해줄 수도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살포시 안아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안아주시고 평안히 우리의 길을 성공적으로 가서 하나님의 나라에 다다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길뿐만 아니라 우리 국가, 민족의 길도 함께 지켜주시고, 안아주십니다. 우리 민족의 길에서 언제나 안아주십니다. 40년을 한결같이 실족치 않게 하시고 위험을 당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나라, 우리 민족, 우리 개인 한사람, 한사람을 안아 주시고 평안히 하늘나라에 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팔에, 넓은 품에 안겨 사는 우리들, 우리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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