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정체를 아는 신앙의 신비 (눅 15:1-7)

  • 잡초 잡초
  • 280
  • 0

첨부 1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의 마음에는 내가 통제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양면성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둘 중에 어떤 것에 나를 빼앗기느냐에 따라 인생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본질적인 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만큼 불행 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창조 이래로“나는 누구인가?”라는 인생근본에 대한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하며 살아왔지만 또 다시 끝없는 질문으로 남는 것이 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나는 누구인가?”라는 이 문제에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아갑니다.<본래의 나>그 본질적인 나를 아는 것을 우리는<자기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다.”이처럼 사람에게는 알고자 하는 욕구 즉<지식욕>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아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 질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정작 가장 필요한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야말로 가히 지식의 홍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 보다는 얼마나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느냐의 문제가 더 절실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질적으로 필요한 지식이란 어떤 것입니까? 바로<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인간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것이 곧<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본래의 자기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에 관한 지식 중에서 가장 미발달된 지식은<자기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은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소크라테스]의“너 자신을 알라”는 이 말이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유명한 말로 유식하다는 당대의 온갖 지식인들의 무지를 폭로하고 그들을 창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너 자신을 알라”는 요구 앞에 나 자신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알고 보면 모두가 서로에게 알다가도 모를 사람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신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어떤 시인이 말한“왜 사느냐고 물으시면 그냥 웃지요!”라는 시 구절처럼 그렇게 희미한 그림자처럼 살면서 인생의 참 가치를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로 여러분, 나를 안다는 것, 이토록 중요하며 끝없는 우리의 인생 주제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간이라고 하는 이 정체성만큼은 분명해야합니다. 이 땅에 수 억 명의 사람들이 얼굴도 다르고, 피부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지만 한 가지 분명하고도 서로 달라서는 안 되는 중요한 한 가지는 인간이라는 하는 그 본질입니다. 사는 곳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다고 인간이라는 본질이 달라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동전의 종류가 몇 가지입니까?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1원짜리 동전과 5원 짜리 동전부터 10원, 50원, 100원, 500원 모두 여섯 가지 입니다. 그런데 이 동전의 앞뒷면이 모두 다릅니다. 그림도 다르고 크기도 다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가치가 다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그 정체성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화폐의 기능으로 통용된다는 한 가지 사실입니다. 이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반지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동전이란 오직 본래의 기능인 화폐의 기능으로 통용되는 그 정체성만큼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만물이 그렇습니다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분명히 정립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사와 은혜와 권세 아래 있는 영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위치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한 차원 높은<신앙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비유에서 우리는 영적인 자기정체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정체성이란 너무나 명확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양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양이어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양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든지, 들판에 있든지, 심지어는 오늘 비유에서처럼 잃어버림을 당하였다 할지라도 양은 양이어야 합니다. 양이 양의 무리를 이탈해서 이리가 되어버리면 안됩니다. 만약에 양이 이리로 변해 버리면 주인이 찾도록 찾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잘 새겨보십시다. 잃어버린 양이, 양이 아니라 다른 짐승이 되어 버렸다면 그 고생하면서 찾을 보람이나 있었겠습니까? 양이었기 때문에 주인은 자기의 몸에 상처가 나도록 험한 산과 골짜기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양이 자기의 양됨을 잊어버리고 이리처럼 행동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양이 자기의 양됨을 잃어버리는 것, 이게 뭡니까? 자기정체성의 상실입니다. 여러분!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양이어야 합니다. 양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아는 지혜입니다. 자, 양은 어떤 동물입니까?

양은 천성적으로 순진합니다. 악의가 없는 동물이 양입니다. 어찌 보면 단순하기까지 한 동물이 양입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과도 통합니다만 정말이지 양에게는 약은 구석이라고는 한군데도 없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으면 더울 때는 포개서 자고, 추우면 서로 떨어져서 잠을 잘 정도로 바보스럽고, 잔머리를 쓸 줄 모르는 순수한 짐승이 양이란 동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순수함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 이중성입니다. 간사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런 이중성은 없어야 합니다. 표리가 부동한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말하는 것은 절대로 양 같은 성도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집을 찾지 못할 정도로 어리 숙한 동물이 양입니다. 주인이 데려가지 않으면 어디도 가지 않는 양입니다. 그런데 양 같아야 할 우리는 주인의 인도 없이도 너무나 잘 갑니다. 못 가는 데가 없어요. 아니 오히려 주인에게 이끌려 가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닙니다. 싫어요, 이게 혹시 우리의 본심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맘대로 우리를 뛰쳐나가 볼까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혼자 어디서 물을 찾을 수 있겠으며, 어떻게 풀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자생 능력이 없는 동물, 무능한 동물인 양과 같은 존재가 우리의 존재인 줄 안다면 이러지는 못할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합시다. 신앙이 눈꼽만큼이라도 있다면 교회를 벗어나서 이리저리 헤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양은 철저하게 순종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소는 코뚜레를 하지만 양은 코를 꿰지 않습니다. 목을 매지도 않습니다. 멍에도 없습니다. 들판에 그냥 풀어놓았을 뿐입니다. 도망가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맘대로 도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조금도 흩어짐이 없이 목자만을 바라보고 따라갑니다. 어디 좋은 길만 가겠습니까? 산을 넘기도 하고, 내를 건너기도 하고 가시밭길을 넘어가기도 하지만 양들은 묵묵히 따라만 갑니다. 반항이나 독자행동을 할 줄 모릅니다. 자기만의 어떤 이유도 어떤 방식도 없습니다. 여기는 싫고 저기는 좋다는 식의 자기주장도 없습니다. 소는 뿔이 있고, 말은 강한 뒷발과 빨리 달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는 강한 이빨과 발톱이 있어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날 교인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무기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얼마나 날카로운지 모릅니다. 비수 같이 찌릅니다. 너무 깊이 숨겨둬서 도무지 보이지 않는 무기들입니다. 그러나 한 번 꺼내들면 상처는 큽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휘둘러대는 무시무시한 살생무기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정말 우리는 양이어야 합니다.

또한 양은 다른 일 때문에 그 행렬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양이 그랬습니다. 곁눈질하다가 길도 잃고 목자의 음성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들 중에 처음 믿음을 잃어버리고, 불신앙적인 자기본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내 성격이 문제요, 내 인격이 문젭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너희는 양 같아야 한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양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곤두박질하든 썩어지든 간에 반드시 양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자를 만나도 양이요, 이리를 만나도 양입니다. 양은 항상 양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이리 같이 교묘히 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요,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숱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우리는 양이어야 합니다. 이 존재는 절대로 둔갑해서도, 변모해서도 안 됩니다. 끝까지 양된 존재를 지켜야 합니다.

세상 말이지만 흔히 여자 분들을 두고 하는 말이“여자란 결혼하기 전에는 비둘기요, 결혼 초에는 양이요, 10년이 지나면 여우요, 그 다음에는 호랑이요, 늙으면 사자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둔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그를 두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을 양의 무리에서 빼어내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양은 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비록 길은 잃어버렸지만 끝까지 양의 울음소리로 울었을 때에 그 주인이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가끔씩 이런 저런 이유로 신앙을 등지는 사람들을 보면 이 양의 울음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웬 사자 소리며, 호랑이 소리며, 때로는 분간 할 수 없는 소리로 교회를 향하여 소리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린 죽을 때까지 주님의 말씀대로 양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양으로서의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비록 길을 잃고 헤맬 때라도 찾으시는 주님의 큰사랑을 경험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양이기를 포기하면 그 순간 사랑도, 은사도, 은혜도 멀어 질 것입니다. 언제든지 주인이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양, 찾아서 잔치를 벌일 만한 가치가 있는 양으로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자기 정체를 아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