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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집념의 신앙인 야곱 시리즈(3) - 벧엘의 하나님 (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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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최대의 위기의 순간

여러분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위기의 순간을 맞이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번 수해로 인해 특히 강원도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오늘 헌금시간에 성도들 전체가 수해를 입은 지역을 위해 특별헌금을 할 것인데 갑자기 결정된 사항이라 미리 광고는 부족했지만 헌금시간에 따로 헌금 바구니를 돌려서 헌금을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도우려는 강원도 평창지역은 하루아침에 모든 삶의 터전을 잃고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에 찾아온 최대의 위기입니다. 문제는 수해 자체가 아니라 절망감과 정신적인 박탈감입니다. 이 분들은 지금 살아갈 희망을 다 잃고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모을 작은 정성은 액수보다 이 분들에게 "여러분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도 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가정의 위기든, 물질적인 위기든, 건강의 위기든 어떤 이유에서건 도저히 이겨내기 힘든 위기의 순간에 서게 될 때 우리 마음도 크나큰 두려움, 무거운 걱정근심, 그리고 세상에 오직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은 한없는 외로움에 짓눌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위기 자체가 아닌 이런 두려움과 걱정,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좌절하고 때론 인생을 포기하게까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겪는 인생의 고통과 절망은 누가 위로해 주나요? 누구를 만나야만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야곱도 인생 최대의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집안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곱게 곱게 자란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빼앗은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형 에서를 피해 처량한 도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며칠 동안만 피해 있으라고 했지만 얼마나 긴 기간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가 지금 피해 가고 있는 곳은 천리만리 떨어진 밧단아람의 하란 땅입니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남동생 라반이 있다고 하지만 외삼촌은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안한 상황입니까?

게다가 10절에 보니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 땅으로 가는 야곱은 가는 도중에 날이 저물어 길바닥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지금처럼 여관이니 호텔이니 하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이 길바닥에 누워 자는데 요즘 말로 치면 졸지에 노숙자 신세가 된 셈입니다. 이스라엘 같은 사막기후는 낮에는 덥지만 밤에는 무척 춥습니다. 야곱도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겉옷을 펴서 이불처럼 덮고 잤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이 불편합니다. 집에서는 늘 따뜻한 장막 안에서 푹신한 베개를 베고 잤는데 길바닥에 그런 베개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저도 여행을 가서 텐트 치고 잘 때 베개가 없어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만 두리번거리던 야곱은 마침 베게 비슷한 모양을 한 돌을 하나 발견합니다. "저거라고 베고 자면 좀 낫겠지" 싶어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귀하게 자란 아들이 지금 어딘지도 잘 모르는 먼 곳을 향해 도망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길바닥에 혼자 누워 돌베개 베고 잠을 청하려니 더욱 처량할 뿐입니다. 이 처량한 처지를 오늘 설교 후에 부를 찬송가 364장 2절 가사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찬송을 부른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하늘을 쳐다봤겠지요.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니 더욱더 처량합니다.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고 낯선 세상에 자기만 뚝 떨어져 있는 그런 느낌으로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절망감에 젖은 야곱은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을 세면서 억지로 잠을 청했을 것입니다.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

그러다가 겨우 잠이 들었을 때 야곱은 어떤 꿈을 꿉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꿈속에 웬 사닥다리 하나가 나옵니다. 자세히 보니까 그 사닥다리 꼭대기는 저 하늘 위까지 닿아 있습니다. "참 신기하다. 사닥다리가 참 높기도 하네." 하고 생각하는 순간 더욱 신기한 것은 그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에 하나님의 사자(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하늘까지 닿아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닥다리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이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는 바로 야곱이 누워있는 이곳이 하늘과 통하는 곳임을 뜻합니다. 더구나 하늘과 이어진 그 사닥다리에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오늘도 천사는 하늘과 땅 사이를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우리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기 위해 올라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돕고 보호하기 위해 내려옵니다. 즉 천사들이 왕래할 정도로 야곱이 누워있는 이곳은 하늘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거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13절을 봅니다. "또 본 즉 여호와께서 그 자리에 서서 가라사대" 그 자리란 사닥다리가 닿아있는 하늘 꼭대기입니다. 그 하늘 꼭대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야곱이 누운 이 땅이 하늘과 직통하는 통로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직통하는 범상치 않은 장소임을 뜻합니다. 사실 야곱은 지금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하란 땅으로 가는 도중에 해가 지니까 아무 생각 없이 누워서 잠을 청한 장소인데 내가 누워있는 그곳이 놀랍게도 하늘과 하나님에게 연결되는 신성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그 곳 이름은 본디 '루스'였습니다. 이제 그 루스에서 꿈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에 짓눌린 야곱에게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13절부터입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그 당시 가장 귀한 재산인 땅과 자손을 동시에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면서 어디로 가든지 지키며 인도하시다가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놀라운 약속까지 하십니다.

이곳이 벧엘이다

이 꿈을 꾸고 깨어난 야곱은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한 후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짓습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 그곳은 본디 루스(아몬드나무라는 뜻)라는 지명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생각해 봅시다. 과연 그 루스가 본디 하나님이 계시던 곳이기에 그런 환상이 보인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루스라는 곳도 본디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소였는데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야곱이 누워 자다가 루스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아하, 내가 몰랐는데 본디 이곳이 하나님이 계시는 집이구나." 싶어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벧엘'로 지었다고 봅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머릿속에 그림을 한 번 그려 봅시다. 자, 본디 루스라고 부르는 곳에 성소가 있고 거기 하나님이 머물러 계십니다. 그런데 하란으로 도망하던 야곱이 우연히 그곳 루스를 지나다가 길바닥에 누워 자게 되었고 본디 거기 계시던 하나님을 만나 약속을 받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려보면 하나님은 산신령 비슷한 분이 되고 맙니다.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 아시지요? 도끼로 나무를 베던 나무꾼이 그만 실수로 도끼를 연못에 빠뜨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연못에서 '펑' 하고 산신령이 나타나 나무꾼에게 도끼를 내밀며 "이 도끼가 네 도끼냐?" 하고 묻습니다. 그 산신령은 어디 사는 산신령입니까? 연못에 사는 산신령이지요. 연못 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연못에만 삽니다. 그러니까 그 연못에 도끼를 빠뜨려야만 나타나는 산신령이지요. 한 곳에만 머무는 산신령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결코 루스든 벧엘이든 한 곳에만 머무는 분이 아닙니다. 그곳에 가야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가야만 계신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려면 교회에 가야만 한다. 여러분, 하나님은 산신령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어디든지 가시고 어디든지 계시는 분입니다. 무소부재, 안 계신 곳이 없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루스나 벧엘에만 머물러 계시다가 우연히 그곳에 들른 야곱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증거가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이래도 하나님이 루스나 벧엘에만 계시는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야곱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함께 가시는 하나님입니다. 야곱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서 야곱을 지키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떤 하나님이라고요? '나를 따라다니시는 하나님'입니다. 가만히 한 곳에 계시다가 사람들이 찾아오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자유롭게 어디든 다니시되 특별히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와 함께 하고, 나를 보호하고, 나를 돕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상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나 벧엘 같은 성소에만 계신다고 믿었는데 오늘날에도 부처님은 절간에 가야만 있고, 영험한 바위나 나무 밑에 가야만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지은 다음에 "하나님은 여기만 계신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여기 와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상종교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 여기만 계십시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구속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장소나 건물에도 구속 받지 않으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또한 자유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어디든지 마음대로 가실 수도 있고 어디든지 계십니다.

따라서 잘 구분하십시오. 왜 야곱이 꿈에서 깬 후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지었을까요? 그곳이 하나님이 계신 신성한 장소라서 벧엘이라고 붙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심을 깨달았기 때문에 벧엘이 된 것입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벧엘은 한 곳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벧엘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지도에 벧엘이라는 지명은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벧엘은 그곳 하나뿐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그 어디나 다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되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른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495장)."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면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요 하나님이 집 벧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모든 삶속에 하나님을 모시어 들이십시오. 나를 따라오시고 나와 동행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을 느끼면서 그 분을 모시어 들이십시오. 하나님을 내 삶속에 모셔 들이고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내 자신이 벧엘이 되고, 내 자신이 하늘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이 내 가정에 계시고 우리 가정과 동행하시면 내 가정이 벧엘이 되고 내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요, 내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내 삶속에 주님이 안 계시면, 주님이 다스리시지 아니하시면 그곳은 바로 지옥이 됩니다. 나중에 여로보암이 이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자 그 지명이 벧아웬, 곧 허무의 집, 죄악의 집이 됩니다(호 10:5).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이 안 계시고 우상이 서니 죄악의 집이 된 것입니다. 우리 가정도 직장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멋지고 큰 집에서 산들 그곳은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남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다니고, 아무리 남들이 부러워하는 큰 예배당을 으리으리하고 지은 들 그곳은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돌베개로 세운 제단

계속해서 18절부터 보면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붙인 후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20~22절을 함께 읽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얼핏 보기에는 참 그럴듯한 신앙고백이요 서원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야곱이 뭔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비집에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서원합니다만 사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15절에 분명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며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고 이미 약속하셨는데 야곱은 "그렇게 해주신다면" 하고 조건을 붙입니다. 여전히 계산적이고 약삭빠른 옛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이 조건에는 '먹을 것 입을 것'이라는 세상적인 조건도 포함됩니다. 이런 조건 다 들어주셔야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런 조건 다 들어주셔야만 비로소 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순서가 잘못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야곱처럼 하나님께 세상적인 조건을 붙입니다. "하나님, 제가 열심히 교회 다닐 테니까 이런 것 해주세요. 돈 벌게 해주시고 사업도 성공하고 자녀도 잘 되고 건강하고, 그러면 제가 하나님을 확실히 믿겠습니다." 뭔가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해줘야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를 사랑하시기에 이런 것들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나의 주되심을 인정할 때 이런 일들은 따라오는 것이지 이런 조건을 들어줘야지만 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한 가지 잘 한 일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제단은 어떻게 쌓았습니까? 시간도 없고 재료도 없는데 그럴듯한 제단을 쌓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베고 잔 돌베개를 세워서 제단을 삼습니다. 제사는 어떻게 드립니까? 제물이 될 만한 양이나 염소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기름을 부어 서원제사를 드립니다. 어디서 난 기름일까요? 아마 고향집 떠날 때 어머니가 가다가 먹으라고 챙겨준 올리브기름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제사는 이렇게 드리는 것입니다. 거창하고 화려하게 준비하고 조건이 완전하게 다 갖춰져야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베고 자던 돌베개 세워 제단 삼고, 내가 먹으려고 챙겨둔 기름 부어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을 드릴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내 일상생활은 지저분하고 세속적이라 하나님께는 숨기고 싶고, 주일에 교회 오면 세속의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거룩하게 구분해서 드리는 그것이 제사요 예배인 줄 아는 분들이 많은데 아닙니다. 내 삶 자체가 산제사가 되어야 하고 내 일상생활이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합니다. 모세는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생수를 낼 때 자기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 칠 때 늘 갖고 다니던 낡은 지팡이를 사용합니다. 한 이름 없는 아이가 주님 앞에 자신의 소박한 점심도시락인 보리떡 다섯 개와 말린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맨 마지막 22절에서 야곱이 십일조를 약속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액의 돈을 벌어 드리는 큰 액수의 헌금보다, 넉넉하게 잘 살게 되면 드리겠다고 약속하는 많은 헌금보다, 지금 가난하지만, 지금 내 쓸 것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쪼개어 드리는 과부의 두 렙돈 같은 헌금, 그런 작은 십일조를 더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떤 특별한 장소가 아닌 하나님 계신 그곳이 바로 벧엘이요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특별한 제물이 아닌 현재 내가 가진 것, 나의 가장 일상적인 삶을 하나님께 드릴 때 그것이 참된 제사요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내 삶의 어떤 부분을 주님께 드리시겠습니까? 나의 삶을 주께 드림으로 야곱과 같은 벧엘의 체험, 천국의 체험을 누리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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