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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할 수 있습니까?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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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처음 믿을 때, 용서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은 인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 죄를 예수의 피가 용서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죄는 내가 지었는데, 처벌은 예수가 받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십자가의 피를 생각했습니다. 생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 값을 다 갚았다는 말씀이 믿어졌습니다. 믿음은 정말 선물이었습니다. 죄는 여전히 그대로 있는데, 죄책감이 없어졌습니다. 신기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천사가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죄 의식은 사라지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찬양이 흘러 나왔습니다. 죄를 용서받으니, 참 기뻤습니다.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이제 다 됐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사는 세상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손해를 줍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를 피할 수 없습니다. 같은 교인끼리도 상처를 받습니다.

물론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압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그런데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용서한다고 결단해도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원망과 증오가 남아 있습니다. 처음 믿을 때는 용서 받는 것이 중요했는데, 이제는 용서하는 문제가 중요해졌습니다.

여러분! 용서가 무엇입니까? 아니 용서 이전에 비용서는 무엇입니까? 비용서는 용서하지 못하는 정서입니다. 비용서는 대개 이렇게 진행됩니다. (1) 누군가 나에게 해를 입힙니다. 주먹으로 한 대 치거나, 손으로 따귀를 때립니다. (2) 그러면 나는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상처를 받으면, 아픕니다. (3) 아프면, 화가 납니다. 분노가 폭발합니다. (4) 한두 번 화내고 끝나면 별 일 아닙니다.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납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합니다. 마음에 증오와 원한이 뿌리를 내립니다. 생각날 때마다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다 그 사람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여러분! 용서는 이렇게 비용서가 남긴 증오와 원한의 정서를 풀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것입니다. 나 혼자 내 마음의 정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 준 사람을 더 이상 비난하지 않고 내 마음의 정서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증오를 긍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원망을 축복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물론 용서가 어렵습니다. 마음대로 안됩니다. 용서하겠다고 의지로 결단해도, 정서상으로는 용서가 안됩니다. 그렇다고 용서를 안하고 살 수도 없습니다. 내 마음이 힘들어 못 살겠습니다. 그러니 용서를 안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다 잊었습니다. 나 혼자 상처 받고 마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증오를 품고 있는 것입니까?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이미 과거의 사건입니다. 다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나만 과거의 사건에 매여 있습니다. 현재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왜 과거에 당해야 합니까? 정신대 할머니들 뉴스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복잡합니다. 항의도 해야 하고 보상도 받긴 받아야 하겠는데, 할머니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저런 정서 속에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처 준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적으로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오늘 예수의 비유 말씀에 참 모순적인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왕의 종이 왕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주석가들에 의하면, 만 달란트라는 돈은 보통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돈이 아니랍니다. 왕이나 만질 수 있답니다. 아마 이 종은 왕의 재산을 관리하다가 손해를 입혔겠지요. 왕은 그 사람과 아내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팔아 빚을 갚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종이 사정했습니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제가 갚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자기가 무슨 수로 일만 달란트를 갚습니까? 왕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 팔아 보았자 얼마 되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종이 불쌍해졌습니다. 그래서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어차피 못 갚을 돈이거든요.

그런데 이 종의 한 동료가 이 종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졌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보통 백성들이 거래할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니까요. 종은 길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멱살을 잡고 소리쳤습니다. “내 돈 내 놔.” 동료는 사정을 했습니다. “조금만 참아주게. 곧 갚겠네.” 그러나 종은 “빚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못 나올 줄 알아.” 하고는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왕에게 사정을 다 아뢰었습니다. 왕은 화가 났습니다. ‘나는 만 달란트를 면제해 주었는데, 저 놈은 백 데나리온 빚도 못 기다려 주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왕은 종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호통을 쳤습니다. “나는 너를 불쌍히 여기고 네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느냐?” 그리고는 감옥에 도로 가두었습니다. “너도 만 달란트 빚 갚을 때까지 감옥에 들어가 있어라.”

왕은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요? 만 달란트의 빚을 면제해 준 자기 호의가 모욕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 놈 하는 짓을 보니, 내가 만 달란트 면제해 준 것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하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주께서 오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주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내 죄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골 3:1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참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에버렛 워딩턴의 『용서와 화해』(IVP)란 책이었습니다. 에버렛 위딩턴은 미국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교의 임상 심리학 교수입니다. 그는 본래 용서 문제 전문가로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1995년에 참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의 노모가 10대 강도들에게 처참하게 피살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죽은 현장을 보고 몸서리를 쳤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분노 속에서 그 강도들에게 쇠 파이프로 복수하는 상상을 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에버렛 워딩턴은 결국 자기가 그리스도인이고, 자기가 가르친 대로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가르쳐 온 것을 실습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먼저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가 피살 당시의 상황을 재연했습니다. 일종의 ‘공감’의 방법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집을 골라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한 아이가 겁에 질려 할머니를 내리쳤습니다. 할머니는 쓰러지고, 아이들은 집안 살림을 마구 때려 부셨습니다. 에버렛 워딩턴 교수는 괴로웠지만, 가능한 한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가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두려움과 자책감과 수치심을 느껴보았습니다. 조금씩 아이들이 불쌍해졌습니다.

에버렛 워딩턴 교수는 자기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기도 상상 속에서 그 아이들을 몇 번이나 때려 죽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폭력적 본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자기에게 피를 보려는 복수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고 자기의 죄성을 인정했습니다.

에버렛 워딩턴 교수는 그들을 용서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살의를 품은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이 딱한 아이들도 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결론내렸습니다. 물론 혼자서 행한 용서였습니다. 그들은 아직 경찰에게 잡히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영 잡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에버렛 워딩턴 교수는 자기 마음 속에서 어머니를 죽인 10대 아이들을 용서했습니다.

저는 에버렛 워딩턴의 글 중에서 자기가 폭력적 죄성을 발견하고 살인자 아이들을 용서했다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 내 죄가 용서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지은 죄가 어디 간 것도 아니고, 단지 내 죄의 벌을 면제받은 것이지. 내 죄는 용서받았으나, 내 죄성은 그대로지. 나는 여전히 십자가의 피 공로가 필요하지. 그러니 나도 용서해야 용서받지.’ 이런 묵상이 죽 흘러갔습니다.

용서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에버렛 워딩턴 교수는 용서하고 나니 후련해졌다고 말했습니다.
“비용서에 시달리다 마침내 용서를 베풀면 깜짝 놀랄만한 변화가 찾아온다. 용서는 동틀 녘에 쏟아지는 빛과 같다. 어둠에 싸인 하늘로 돌연 태양이 수평선을 비집고 나온다. 하늘 가득 뻗은 거대한 구름이 햇빛을 받는다. 굽이치는 구름은 주황색, 빨강색, 자주색으로 불타고 하늘은 온통 총천연색 빛이다. 비용서와 씨름하다 맛보는 용서의 후련함이 그와 같다.”
여러분! 용서는 우리 마음에 천국의 평화를 회복시켜 줍니다. 마음이 다시 평안해집니다. 그러나 용서는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선물하기도 합니다.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이타적 선물입니다. 용서보다 더 값진 선물은 없습니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용서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용서 받아 본 분들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서가 얼마나 나를 회복시켰는지 말입니다.

대학 4학년 때 사법시험에서 떨어진 후, 진로 문제를 놓고, 오래 기도하다가, 신학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무슨 응답을 받았다기보다는, 신학을 공부해야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가족이었습니다. 나 혼자 믿는 예수 신앙이고 보니,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를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정말 큰 일 났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동생을 통해 말해 놓고, 3달 동안 집에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제는 집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습니다. 3달 후, 아버지가 내려오라 해서 내려갔습니다. 가족에게 큰 죄를 지었으니, 할 말도 없고, 머리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엄마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 좋으면 됐다!” 이 말은 지금까지 제가 들은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가족의 꿈을 짓밟은 나를 용서해 주는 선언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신학 공부를 한다는 나를 믿어 주고 용서해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용서받았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용서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그러니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용서하는 훈련을 합시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을 인정하신다면, 우리도 남을 용서합시다. 그 사람이 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용서합시다. 하나님의 용서를 모방합시다.

물론, 한 번으로 용서가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하지만, 우리의 용서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 시도합시다. 정서상으로 용서가 될 때까지 십자가의 피 공로를 붙들고 도전합시다. 용서해서 우리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용서를 선택합시다. 성령 하나님에게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덧입혀 달라고 기도하면서 용서합시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값있게 합시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더 구체적으로 경험합시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용서의 여정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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