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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길 (창 50: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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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활용적으로 속용 되는 길에 대한 의미는 다양합니다. 우리 국어사전에는 길에 대한 품사만도 145가지나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합당한 길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갈보리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나 의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뒤 애굽에서 반세기 이상을 더 살아온 요셉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의 족장시대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요셉은 야곱과는 달리 가나안에 장사되지 않고 일단은 애굽에 묻혔습니다

. 그러나 요셉은 임종을 앞두고 그의 후손들에게 자신의 유골을 가나안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요셉은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야곱과 요셉은 애굽에서의 영광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집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후손들에게 한 유언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할 때부터 가나안 땅에 이를 때까지 요셉의 해골을 가나안에 매장하기 위하여 줄곧 메고 다녔습니다.

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른바 길은

요셉의 유언에 따라 그의 해골을 메고 가는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가는 것은

1) 종 되었던 애굽을 청산하는 신앙적 행위입니다.
출애굽기 13장 18-19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무질서하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도망가듯이 피난민들처럼 나온 것이 아닙니다. 200만으로 추산되는 사람들과 그들의 소유를 가지고 항오를 정제히 하고 나왔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7절에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다급한 때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습니다. 그 당시 요셉의 해골은 미라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로서 애굽 땅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장례 또한 격이 있는, 이른바 애굽의 국장도감에 의한 고급 장례식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침내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해골을 메고 출애굽의 거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을 상기시키는 신앙적 행위입니다.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가는 것은

2) 요셉의 유언을 실천하는 신앙적 행위입니다.
출애굽기 13장 19절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하여 일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권고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50:24).
요셉은 유언하기를 자신의 해골을 애굽 땅에서 가지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이때로부터 약 350년 전에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출애굽입니다. 요셉이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임종시에 후손들에게 부탁했던 그의 유언입니다.
창세기 15장 13-16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유언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것입니다.
본문 50장 25절에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집념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신앙에서 그 끈질긴 동인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야곱처럼 자신이 죽자마자 자신의 유해를 가나안 땅에 안장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훗날 가나안 땅에 이장토록 유언한 것은 그의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2절에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후손들은 그의 유언대로 요셉의 해골을 메고 출애굽의 여정을 계속 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가는 것은

3) 요셉의 신앙전통을 계승하는 신앙적 행위입니다.
여호수아 24장 32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결국 요셉의 믿음대로 그가 죽은 지 415년 후에 그의 유해는 그리던 약속의 땅에 안치되었습니다. 바로 이곳이 어디입니까?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와서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약간의 땅을 산 후 그곳에 단을 쌓으므로 그곳을 정결케 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내 가나안 정복 후에 요셉의 해골은 그의 믿음대로 가나안 땅 세겜에 평안히 묻히게 된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부터 가나안 입성 때까지 요셉의 뼈를 메고 다니는 일은 중단할 줄 모르고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바쁘고 고달팠지만 요셉의 뼈를 광야도중에 매장하지 아니했습니다. 광야의 험한 길을 오는 동안에 요셉의 뼈는 천박하게 관리되지 아니하고 철저히 관리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유해를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과 광야길 40년이라는 긴 세월 그리고 가나안 땅에 약속대로 묻었다는 사실이 이를 넉넉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요셉의 뼈를 메고 다니는 일을 잊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역사적 신앙 전통 계승의 행동화가 바로 요셉의 해골을 메고 애굽을 나오는 일로 가시화된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각자의 전통과 단절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본 사람과 다른 것은 외모나 언어 때문도 아니고 죄의 경중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의 전통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한국적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가진 전통과 우리가 가진 전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갈보리 교회는 우리만의 신앙 전통이 있기 때문에 다른 교회와는 상이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전통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전통은 창조의 힘입니다. 바른 신앙 전통이야말로 오늘의 바른 교회운동을 계승하는 힘이 됩니다.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간다는 말은 요셉의 유언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간다는 일차적 의미 외에 하나님께서 조상적부터 약속하신 거룩한 신앙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Ⅱ.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험한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1)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8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형을 언도 받은 자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간데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해골을 메고 다녔다는 데 유의해야 합니다. 지금은 조상의 뼈를 메고 다니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뼈를 메고 다닐 수도 없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나무 십자가를 메고 다니는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원죄와 자범죄를 용서받았다는 증거로 십자가를 메야합니다. 따라서 뼈를 메고 간다는 현대적 의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말로 대용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땅 도처에는 죽은 사람의 뼈를 메고 다니는 것이 최고의 거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입니다(세크라맨티즘-형식주의). 저들은 앞서간 신앙인들의 뼈들을 숭배합니다. 저들은 형식적인 장신구들을 종교적으로 실제화 하는데 익숙합니다. 이것은 유희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짓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뼈를 메고 다니라고 아니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 메고 간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벽한 일체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①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말합니다. ② 자기 부정의 삶을 의미합니다. ③ 구원에 대한 보은적 행위를 말합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승리와 영광과 감사와 보은의 십자가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 보은이라고 하는 이상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즉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 운동으로 현실화 될 때 오는 유형무형의 정신적, 육체적 고난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성간의 사랑이나 가족간의 사랑이나 친구간의 사랑은 본능적 사랑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본능적 사랑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시편 18편 1절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한 말은 그 이면에 깊은 뜻을 함의 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랑하나이다"(라함, )라는 말은 주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실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시편 18편 1절은 예외적으로 사람이 주어(主語)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신 그 사랑, 곧 십자가에 피 흘리신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 따라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주님을 사랑한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한다 라고 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 흘리기까지 사랑한다는 당위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친구간의 사랑이나 가족간의 사랑이나 이성간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 아가페적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이중인격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원론 자가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랑을 아가페적 사랑으로 일관해야 합니다. 결혼식에 신랑신부에게 서약을 받을 때 고 정암 박윤선 박사님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하고'라고 했고 다른 예식서에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목숨을 걸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로 아가페적 사랑을 반영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불충분성이나 미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교회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마치 머리가 당하는 고난을 몸의 지체가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고난의 현장은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운동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4)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에 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의 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 십자가는 그의 의이자 그의 본분입니다.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는 사명의식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 운동으로 집약됩니다.
이것을 먼저 생각하고 최우선으로 행동화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결코 변칙적인 이기주의 이어서는 안 됩니다. 촛불을 훔쳐서 성경책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될 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 추구하는 이른바 최대주의(Maxmillism) 효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5) 자신의 영적 소속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32장 7절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전통은 ① 하나님 절대 주권사상을 믿는 개혁주의 신앙노선입니다. ② 신, 구약 성경 66권만을 믿는 신앙입니다. ③ 우리는 아벨에서부터 발원된 신앙의 물줄기가 선지와 사도들의 영통을 따라 종교개혁자들의 피의 희생으로 이어지는 신앙세계입니다. ④ 그 신앙의 세계는 갈보리교회가 가진 신앙 전통과 신학사상을 통하여 맥맥히 흐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 각자의 신앙의 연륜 동안 메고 왔습니다.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메고 왔다고 해서 무게가 줄었다든지 요령이 생겨서 십자가를 가볍게 메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의 무게는 우리의 더운 피가 식을 때까지 여전합니다.
언제까지 이 뼈를 메고 어디까지 가야 합니까? 우리의 생이 끝날 때까지 메고 가야만 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바통 터치하듯 계속해서 메고 가야합니다.
우리의 신앙 전통을 믿음의 후손들에게 바르게 전하는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 신앙운동은 옛 것의 파기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 앞에 반드시 필요한 옛 것을 쟁취하기 위한 이른바 새로운 영적 패러다임(Paradigm)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빼앗긴 옛것을 찾거나 혹은 무너진 것을 수축하는 데는 그것을 지킬 때보다 몇 배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옛 고려파는 성경을 상황 윤리적으로 해석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패한 고려파 역사입니다. 성도간의 불신법정 송사를 반대하는 반고소 고려파 운동은 성공한 역사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고려파의 성공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여기에 와 있습니다. 이것은 저 개인적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저의 노래요 저의 사명이요 저의 고별사입니다.
Old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다같이 졸업장을 받았다고 해도 좌경 후와 좌경되기 전에 졸업생들은 표면적 동문이지 내용적 동문은 아닙니다.
1924년 1월에 150명의 목사들이 뉴욕 주에 있는 오번신학교에 모여서 이른바 오번선언(Auburn Affirmation)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1,293명의 지도자가 서명했습니다. 이미 프린스톤 신학교는 좌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다면 1923년 이전에 공부한 사람들과 1923년 이후에 공부한 사람들은 신학적, 신앙적으로 같은 동문일 수 없습니다.1923년 이전에 공부한 사람들은 1929년에 세워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차라리 동질입니다.
현재 고신과 고려의 역사적 관계가 엄격하게 말한다면 이 같은 함수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고려파와 우리가 동질일 수는 있어도 지금 고신과는 많은 부분에서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우리가 반드시 복고해야 합니다. 실패한 역사의 복고는 역사 진행의 순리입니다. 그래서 반고소 운동은 성공한 역사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족보는 또 다른 우리, 즉 ID입니다. ID가 무엇입니까? 자기 同一性, 또
다른 나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① 우리의 ID가 목적어로써 Identity가 될 때 우리의 개혁주의 신앙 전통과 우리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우리의 ID가 명사로써 Identification이 될 때는 갈보리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때문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을 못하면 안 됩니다.
인간들의 이기주의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이란 저서 속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모든 자가 한 사람같이 동일한 것을 내 것이라 부르면, 그것은 훌륭한 것이겠지만 실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최대 다수에 의해 공유되는 것은 가장 빈약한 취급을 받는다. 모든 자는 주로 자기 자신의 것을 생각하고 공유물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그 자신 개인으로서 관련될 때 비로소 흥미와 이해를 갖게 되는 것이다.……누구나 남이 하여 주리라고 기대하는 임무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극복할 때 희생이라 할 수 있다."(제2권 3장)고 했습니다. 근래에 들어서도 '가렛 하딘'(Garrett Hardin)이나 일리노 오스트럼(Elinor Ostron) 같은 학자들도 '공유의 비극'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공유의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데이비드 흄은 그의 <인간 본성론> 속에서 "내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악의에 찬 말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성주의는 실존주의와 깊은 우정관계를 가지고 개인주의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개인주의는 타락의 깊이를 더해 갈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 이성주의는 무신론 사상을 그 요람으로 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요셉의 해골을 메고 나오는 운동은 장례행렬이 아니라 신앙행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이제 우리는 해골 대신에 십자가를 메고 가야 합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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