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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닮아가려면?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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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독교 선교잡지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료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한 흑인 청년이 정글에서 칼로 나무를 찍다가 자기 발등을 잘못 찍어, 피 흘리는 발을 나무 잎으로 움켜 싸고, 병원이 있는 이십 리 길을 뛰어 온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그 청년을 치료 하고 있는데, 얼마 후 그 흑인 청년의 어머니가 찾아 왔습니다. 선교사님은 그 어머니에게 밀림에서 어떻게 이곳을 찾아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의 핏자국을 보고 따라왔지요.” 그 말이 선교사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메시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의 핏자국을 보고, 날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이야.”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합니까?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리신 예수님! 우리가 그 분의 피로 죄 사함 받았다면, 이제 예수의 피에 대한 감사, 감격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 그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저와 여러분에게 먼저 기쁨의 삶을 소개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살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기쁨의 삶을 살았던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내용이 본문 바로 앞,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1절의 내용입니다. 당신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통해, 인류 구원이라는 기쁨의 절정을 누리셨던 분,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떻게 하면 이 분을 닮아 갈 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그 구체적인 방법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원문에 보면, 빌립보서 2장 12절부터 18절은 명령형의 세 가지 동사를 중심으로 본문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12절의 명령형 “이루라”를 주문장으로 삼고 있는 12절부터 13절의 본문이고, 둘째 부분은 14절의 명령형 “행하라”를 주문장으로 삼고 있는 14절부터 16절의 본문이며, 셋째 부분은 18절의 명령형 “기뻐하라”를 주문장으로 삼고 있는 17절부터 18절의 본문이 그것입니다. “이루라, 행하라, 기뻐하라” 가 본문의 주된 문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사들이 오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 있을까요?

첫째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의 지금까지의 순종을 회상하면서, 그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구원을 생활 속에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으로서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문에는 계속 꾸준히 노력할 것을 암시합니다. “구원을 완성하기까지 이루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이루라” 고 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고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라는 이 단어는 항상 사람에 대한 태도를 가르칠 때, 사용됩니다(고후 7:15; 엡 6:5). 성도 상호간에, 혹은 이웃 간에 있어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성도 간에 혹은 이웃 간의 만남에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까? 성도 역시 땅을 밝고 사는 인생인지라 인간관계에 위기가 찾아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면, 그 위기는 오히려 주님을 닮아 가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인간관계의 위기는 영적인 성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마음 내키지 않는 사람들을 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되고, 그 분을 닮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빌립보 교회처럼, 교회 안에 다툼이 있고, 성도 간에 시기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실생활에서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웃 간에 알력이 있고 분쟁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을까요?

본문 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죄와 싸워 보고, 자신의 타락한 본성에서 벗어나 보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해 본 성도라면, 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우리의 형편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아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당신의 신령한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얼마나 연약한지를 이해하시고 동정하십니다.

그래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적극적인 순종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만이 아니라, “항상 복종하여”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고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이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 “항상 복종”함으로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요, 우리가 힘써 달려가야 할 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한 싸움이 있을 때, 우리 가운데 기쁨이 찾아옵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게 되며, 또한 그것을 간증하는 기적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단번에 나의 악습과 내 속에 깊이 숨겨진 죄의 뿌리들이 다 뽑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러한 가운데서도 성도의 구원은 계속되어 집니다. 우리의 실수와 우리의 연약함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성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주님의 성품과 삶을 닮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선한 싸움을 싸우느라 여기저기 다치고 부끄러운 상처를 입어도, 성도의 내면은 서서히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비록 주위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고, 많은 약점이 있다 하더라도, 성도의 심령은 조금씩 조금씩 하늘 아버지의 손길아래 거룩함으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구원의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쉬운 길이 아닙니다.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나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나를 당신의 온전한 자녀로 다듬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숨겨져 있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무한한 희생까지도 불사하신 우리 주 하나님과 함께 걷는 동행의 길입니다. 우리의 허물,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로 만들어 가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는 길입니다. 이것이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이런 신앙의 여정에 참여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된다든지, 혹은 갑자기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자신 있게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여러분이 주 앞에 서는 그 날, 여러분이 후회 없이 인생을 마치게 될 것이라는 것과 그 분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복종함으로 여러분에게 허락된 구원을 완성하여 가십시오. 영적 성숙을 향한 우리의 소원 보다 더 큰 소원, 더 깊은 열정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 있을까요?

둘째로,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불평을 하거나, 옳고 그름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빌립보서 3장에서 거짓 교사들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고, 시비를 가렸습니다. 그는 할례당을 개들이라고,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거침없이 비난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보호하려면, 이성적인 판단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을 원망과 시비의 정신에서 처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우선 강조된 것은 “모든 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 부딪치는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망이란 단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단어이고, 시비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곧, 원망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시비는 사람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사람에 대한 불신, 이것이 원망과 시비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끊임없는 원망과 시비의 반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당하는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출애굽을 원망하였고, 그들의 지도자 모세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것이 비단 그들만의 모습입니까? 우리들도 생활이 어려워지고 시험을 받게 되면, 쉽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어려움이 오면, 시비가 앞서고 불평의 말들이 자주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이 땅의 모든 출애굽 백성들에게 광야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됩니다. 바로의 손에서 구출된 백성들은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셨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메마른 인생의 광야 길은 누구나 다 거쳐야 할 필수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어려움 앞에서 원망과 시비를 하는 것은 자칫 하나님의 큰 구원을 만홀히 여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원망하고 시비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하면, 삶의 기쁨은 떠나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 속에 기쁨은 자리할 수 없습니다. 이웃들과 시비하는 사람에게 기쁨은 찾아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삶의 간증을 상실하게 됩니다. 주님을 닮아 가는 믿음의 순례 길에서 그만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합니까? 원망 없는 삶, 시비 없는 삶, 그것은 흠 없고 순전한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의 빛 된 삶이며,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타락한 세상의 모습을 정의하기를,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흠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 사람들의 박해 속에서, 원망과 시비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흠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세상이 그들에게 빛 된 삶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기대하는 빛 된 삶은 어떤 삶일까요? 저는 이 모습을 작가 이승우씨의 ‘향기로운 세상’이라는 산문집에서 발견했습니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종종 누구에게는 향기이고 싶지 않은 유혹을 받습니다. 물론, 나를 비난하고 나를 헐뜯는 사람에게 향기를 풍겨 내기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향나무는 자기를 쳐서 쓰러뜨리려는 도끼날에도 향기를 토해 낸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을 해내는 것이 향기의 향기다움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 받을 사람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이어야 한다고 충고하지 않습니까?

만일에 우리가 향나무처럼 우리를 치는 도끼날에조차 향을 뿌려, 그 흉기를 향기로 바꿀 수 있다면, 아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조그만 향기의 확산으로 세상은 얼마나 더 눈부시고 아름답겠습니까? 얼마나 더 향기롭겠습니까?”

작가 이승우씨는 성도인 우리들에게 향나무처럼 살라고 도전합니다.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 속에서, 나를 비난하고 나를 헐뜯는 사람들에게, 생기 있는 향긋한 향내를 발하라고 합니다. 심지어 우리를 치는 사람들의 도끼날에조차 향을 뿌려, 그 흉기를 향기로 바꾸도록 도전합니다. 찍혀도 찍혀도 향을 발하는 향나무처럼 살 것을 부탁합니다.

왜요? 그것이 흠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요, 세상의 빛 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주님이 향나무처럼 사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성도로써 원망 없는 삶, 시비 없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 속에서 빛 된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까? 생명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을 밝혀”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 합니다. 원문에는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아”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까?

우리가 원망과 시비로 인해 삶을 망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우리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부터 심히 부패했던 인생이기에, 죄의 유혹에 한없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항상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그 분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모든 일에 항상 복종함으로 그 분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생명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며, 우리들의 믿음의 달음박질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하십시오.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의 빛 된 삶을 살아가십시오. 항상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으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로써 그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빛으로써, 세상에 충격을 주는 호소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치는 사람들의 도끼날에조차 향을 뿌리는 향나무와 같이, 생명력 있는 그윽한 향기를 발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소원하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 있을까요?

셋째로, 주님의 기쁨 가운데 그 기쁨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본문 17절, 18절입니다. 우리 다함께 읽어 볼까요?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위에 내 피라도 쏟아 부을 것이며, 그것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바울은 이 글을 쓰면서, 마음속에 아주 격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비유가 제사의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을 관제로, 다른 말로 제물의 기름으로 뿌려진다 하더라도 자신은 기뻐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이웃을 위해 자신의 피,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각오를 밝히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순교적 섬김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웃을 위해 자신을 관제로 드리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삶이 보여 주신 교훈은 기쁨의 삶을 위하여,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내 삶의 주인이라면, 이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이웃의 구원과 믿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교훈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닮아 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17절 하반절부터 시작되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짧은 두 절에 기뻐한다는 말이 4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바울의 이 기쁨’ 에는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위해, 자기를 내어놓는 섬김의 정신입니다. 이러한 섬김의 희생적 자세가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기쁨이 너무 커서, 이웃을 위해 관제로 부어지는 삶이 너무나 기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 기쁨에 함께 동참하자고 강권합니다.

여기, 진실로 주님이 약속하신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욕심과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고한 기쁨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신의 소원과 목적을 이루는 것이 기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소원을 이루고, 또 한 가지 목적을 이루어도, 우리는 알 수 없는 허무 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렇듯, 세상의 가르침을 따를 때, 우리는 끝없는 불만을 품은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시적인 기쁨, 세상적인 기쁨이 아닌 진정한 기쁨을 원하십니까? 그것은 내가 무엇을 더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어 주고 섬기는데서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듯이, 이제는 이웃을 위해 내어주고 섬겨 보십시오.

어느 듯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섬김의 기쁨, 천국 기쁨의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이웃들에게 복된 이름으로 기억되며, 그리스도의 날에 그들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1773년, 영국 웨인스게이트라는 시골에서 목회하던 존 포셑(John Fawcett) 목사님이 런던의 어느 큰 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통해 영국 전역에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목사님은 청빙을 수락하고, 이삿짐을 꾸렸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시골 교회를 섬기면서,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교인들을 떠나는 일이 마음 아프긴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마차에 이삿짐을 싣고, 사택을 나서는데 교인들이 몰려 왔습니다. 좋은 여건의 목회지로 떠나가는 목사님 내외분을 차마 붙잡지는 못하고, 교인들은 눈물만 흘렸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메리 포셑(Mary Fawcett) 사모님은 그 자리에서 자기 남편에게 “여보, 난 여기를 떠나지 못하겠어요. 이 분들을 두고 난 떠날 수 없어요.”하고 울먹이자, 삽시간에 사택 마당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짐을 사택으로 다시 들여 놓읍시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는 곳, 이보다 더 좋은 교회가 어디 있겠소.” 하더랍니다.

다시 사택으로 들어 온 목사님은 흐르는 눈물을 닦고, 기도하면서 찬송시 하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525장, ‘주 믿는 형제들’입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한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 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는 중 위로를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 안에 교통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사도 바울의 마음을 가졌던,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던 존 포셑 목사님의 노래요, 간증입니다. 우리는 찬송가 525장을 부를 때 마다, 존 포셑 목사님의 복된 이름을 기억하며, 주님을 닮고자 했던 그의 섬김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섬김, 이런 교제의 기쁨을 아십니까? 주 믿는 형제들과 함께 하는 기쁨, 또한 그 형제를 섬기는 기쁨을 아십니까? 주 안에서 교통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섬기며 사랑하는 성도들의 교제의 기쁨을 아십니까?

이웃을 위해 자신을 관제로 드렸던 바울의 기쁨이 바로 이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섬김과 교제가 갖는 최대의 가치는 그 섬김과 교제를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 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는 기쁨, 또한 그 성도를 섬기는 기쁨으로 충만한 인생,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인도의 캘커타 슬럼가에서 평생을 섬겼던 테레사 수녀님의 말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남들에게 섬김을 받고 대접을 받을 때, 거기에는 인간적인 기쁨이 있다. 그러나 내가 이웃을 섬길 때, 거기에는 신적인 기쁨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고 대접해 줄 때, 거기에는 인간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 차원의 기쁨이 아닌, 이웃을 섬길 때 느낄 수 있는 신적인 기쁨, 하나님의 기쁨을 여러분은 가지고 있습니까? 이 신적인 기쁨을 누렸던 바울은, 우리에게 힘 있게 권고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기 위해, 다시 한번 그들 앞에 서 보지 않으시렵니까? 나를 죽기까지 섬기기 위해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정말 내 삶의 주인이시라면, 이제 그 주님을 본받아 우리의 이웃을 섬겨 보지 않으시렵니까?

이 일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일주일에 한 사람씩 혹은 한 달에 한두 사람씩, 가까이 있는 내 이웃, 내 교우들로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시작해 보십시오. 따뜻한 말 한마디, 해맑은 미소, 정겨운 악수, 중보의 기도, 변함없는 이해와 관심, 진심이 담겨 있는 격려의 문자 메시지, 하계봉사, 단기선교, 사랑의 집짓기에 봉사함으로 인해 이마에서 흐르는 땀! 이 모든 것들이 섬김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약간의 햇볕으로도 새싹이 자라고, 한 줄기 빛이 온 어둠을 몰아내듯이, 저와 여러분의 그 작은 섬김이 고달프고 지쳐있는 내 이웃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 넣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은 그들을 섬기는 가운데, 신적인 기쁨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예수님을 닮아 가는 신령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 존 포셑 목사님과 같은 찬송이 흘러나올 것이며, 솔잎처럼 푸르고 향기로운 기쁨의 노래가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올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행복,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참된 진수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이런 기쁨의 삶을 살았던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소개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의 핏자국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시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기쁨 가운데 그 기쁨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우리 평생 기도의 제목이었던 주님의 형상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인쳐지는 천상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천국의 기쁨을 가지고 매일 매일을 사노라면, 그 기쁨은 또 다른 기쁨을 낳게 되고, 여러분은 점점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그 기쁨의 이유를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좌정해 계심을 알려 주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하늘 백성의 기쁨이 있고, 거기에 하늘 아버지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 이 영광이,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성도 여러분 가운데 가득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박원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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