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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눈이 어두우면 (민 22: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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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하던 일이 자꾸 막히고 뜻대로 잘 안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예를 들어, 하던 사업이 자꾸 꼬이고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왠지 모르게 잘 안돌아 갈 때 어떻게 처신을 합니까?

이럴 때 대처 방법을 몇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밀어붙이기 형이 있습니다. 이 종류 사람은 원인분석을 하지 못하고 계속 밀어붙이는 형입니다. 돌진형이라고 합니다. 
2. 반성(反省)형이 있습니다. 이 형태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깊이 돌아보는 형입니다.
3. 책임전가(責任轉嫁)형이 있습니다. 이 형태는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환경 탓이라고 단정하고 책임을 넘기는 형이 있습니다.
4. 자포자기(自暴自棄)형이 있습니다. 될대로 되라는 형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마도 이 4종류 중 하나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형태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반성형 일 것 같으나 실상은 한 단계 더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것을 저는 “경건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문제가 생기고 길이 막히면 기도하고 말씀으로 돌아가서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 형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사면초가가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엎드리고 그분의 뜻을 구하고 그분이 명하는 대로 가야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을 눈앞에 두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 모압 평지에서 오래 동안 기거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그 모압 땅에 들어올 때 그들을 반갑게 맞이할 수 없었던 족속이 있었습니다. 바로 모압 족속입니다. 이 모압 족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에서 살아난 후 그의 큰 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늘 불편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모압 나라에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의 이름은 ‘발락’이란 왕이었습니다. 이름 참 특이하지요? 그 발락 왕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인들을 무섭게 몰살시킨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군사력으로는 당할 수없을 것 같고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계책을 만들었습니다.
그 계책은 다름 아니라 당대에 유명한 메소포타미아 출신으로 가난안 땅에서 선지자 노릇했던 “발람”을 불러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어 발람 선지자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발람은 한마디로 거절을 한 것이 아니고 하루저녁 기도해보겠다는 것입니다.

민22:8절을 읽어보세요.  8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하니라
기도해보니 하나님이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12절을 보세요. 12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결국 다음날 아침 일어나 못가겠다 하니 돌아갑니다.
그러나 발락왕은 포기치 않고 또 더 신분이 높은 귀족을 보내어 요청합니다. 그때도 발람은 그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겠다며 기다리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발람의 마음이 이미 탐욕에 사로잡힌 것을 아시고 가라고 조건부로 허용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욕심이 문제입니다. 탐심 때문에 인생의 비극이 생깁니다. 발람은 선지자이면서도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결국 그 욕심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하신 것입니다. 욕심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욕심이 점점 커지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행하게 됩니다. 결국은 사망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넘어트린 것도 탐심과 욕심입니다. 그토록 위대한 왕, 다윗이 뭐 때문에 넘어집니까?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이면서까지 밧세바를 취하게 했던 것도 육체의 본능대로 하게 만드는 이 탐심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욕심과 탐심이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무서운 강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탐심이 우리 눈이 어두워지게 하여 어떤 상황으로 몰고 가는가를 살펴보게 됩니다.

욕심으로 눈이 어두우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1.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심판을 자초합니다.

발람은 발락 왕이 부탁한 것이 자신의 직분으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겠다는 것은 물질에 대한 탐심과 영화에 대한 명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안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쉽게 포기치 못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사실 기도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미련을 갖고 기도해 보겠다는 것은 실상은 탐심과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 발람의 경우가 없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을 거절하는 것일까요? 왜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 기도 해보나마나 인 것을 가지고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손해 안 보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내 일신의 평안, 명예, 사리사욕, 이것이 있기에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갑니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할까요? 가지 말아야 할 술집에 갑니다. 떼먹지 말아야 할 십일조를 떼먹습니다. 지켜야 할 주일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 배경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요? 겉으로는 이 핑계 저 핑계 댑니다.
아직 때가 안돼서,,, 아직 남편이 안 믿어서... 아직 능력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그러나 엄격히 따져보면 욕심과 탐심 때문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욕심과 탐심이 나를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 모습이 등장합니다. 모두들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살아가고 교회는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젊은 부부가 처참하게 죽음을 당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왜요? 탐심으로 명예를 얻고자 거짓말 한 죄 때문에 무서운 심판을 받습니다. 회개의 기회도 주었지만 그 기회를 잃고 끝까지 거짓말을 하다가 죽습니다.  이것 또한  탐심의 무서운 결과입니다.

두번째 교훈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2. 나를 살리려는 나귀를 걷어 찰 수 있습니다.

  발람은 탐심이라는 것 때문에 이미 영안을 잃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허락했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갑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 길을 막으려고 나타났습니다.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을 막습니다. 그런데 발람을 태우고 가는 나귀는 그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는데 발람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귀도 보는 천사를 하나님의 종은 못보고 있습니다. 결국 애매한 나귀만 매를 맞습니다. 나귀가 길을 이탈합니다. 그대로 가다가는 자기 주인이 죽겠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발람은 “이놈의 나귀가 미쳤나” 하면서 채찍질합니다. 그러다 좌우에 담이 막힌 좁을 길로 들어섰습니다. 나귀가 담벼락에 비벼대니 발람의 발이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자 막 채찍질하며 나귀 배를 걷어찹니다. 그래도 나귀는 그 여호와의 사자를 피하려고 하는데 이젠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귀가 엎드립니다. 이제 발람이 열이 날대로 났습니다. 이제는 지팡이로 나귀를 내려칩니다. “야! 너 죽고 싶어 환장했냐?”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은 안 되었으나 아마도 그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귀 입을 열어 말하게 합니다. 28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그러자 발람이 큰소리칩니다.
29절 “네가 나를 거역한 연고니 내손에 칼이 있었으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성도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솔직히 발람이 나귀를 향해 한 말은 누가 들어야 할 말입니까? “너 죽고 싶어 환장했냐?” 이 말은 발람이 자신에게 해야 할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도 모르고 나귀를 향해 펄펄 뜁니다. 영안이 어두운 자의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죽을 줄도 모르고 그 길로 가려고 애를 쓰는 이 모습이 누구의 모습일까요? 혹시 우리 모습은 아닐까요?

또한 자기를 살려주려는 나귀의 심정도 모르고 자기 뜻대로 안 가준다고 나귀를 걷어차고 있는 모습에서 혹시 우리는 이러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닌 지요? 또 왜 하나님의 사자는 발람을 데리러 온 귀족들을 그 자리에서 처형치 않고 왜 발람하고만 티격태격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모압 귀족들과 함께 가는 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하고는 상대도 않습니다. 왜요?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버려 두고 예수 믿는 사람들만 길을 막는지 깨달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가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욕심 때문에 가는 길이라면 속히 돌아서기를 축원합니다. 또 혹시 길이 막히고 일이 계속 꼬이면 하나님이 막으시는 줄 알고 속히 돌아서기를 축원합니다. 괜히 내 생명을 살려고 도움을 주는 주변 사람과 가족만 걷어차지 말고 돌아서야 합니다.

3. 피조물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짐승도 배가 부르면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과 탐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욕심과 탐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결국 피조물들에게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발람 선지자도 나귀로부터 책망을 당합니다. 나귀가 어떻게 말을 하냐구요? 소설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 선지자가 깨닫게 하기위해 나귀의 입을 여셔서 말하게 하십니다.
30절보세요.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얼마나 창피합니까? 만물의 영장인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다스려야 할 피조물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입니다. 우리 주위의 피조물이 우리가 범죄하면 탄식합니다. 이 미련한 인간들아 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뇨? 왜 그렇게 어리석으냐? 하며 외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남들에게도 저주를 당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남들이 나를 욕하는 것도 저주입니다. 신호를 위반하거나 끼어들기를 해서 남들이 우리를 저 미친놈, 하고 욕하면 그것도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뿐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만물이 우리를 저주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저주를 당하면 안됩니다. 내가 괜찮다고 남들도 괜찮은 것 아닙니다. 남들이 속으로 욕하는 것도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 막으실 때는 속히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길을 가려는 성도에게 천사까지 동원하시어 막으십니다. 그런데도 고집을 부리면 결국 갈 수는 있을지 몰라요. 발림도 결국은 갔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허락합니다. 다만 하나님이 시키는 말만 하라시면서 가게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도 비참합니다. 발림의 말년은 어땠을까요?  그는 가서 발락왕의 부탁대로 저주를 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이 강제로 발람의 입을 통해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다가 결국 민수기31장 8절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왕들을 처형할 때 함께 처형을 당합니다. 비참한 말로(末路)를 맞는 것입니다. 가지 말라 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막을 때 돌아서야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비극은 초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막을 때, 하지 말라 할 때 그때가 복입니다. 사업의 길을 막습니까? 깊이 생각하고 기도해보세요. 자녀의 길을 막으십니까? 그 길이 자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결혼의 길이 자꾸 막힙니까? 거기도 분명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계속하려고 고집부리지 마세요. 내 고집을 꺾고 속히 돌아서는 것이 사는 길임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길을 막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것이 하나님의 막으심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발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탐심(貪心)문제요,  하나는 영안(靈眼)이 감긴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하나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내 영적 눈을 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라면  단호하게 끊어 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내게 유익한 나귀, 내 생명을 살리려고 애쓰는 나귀를 걷어차게 됩니다. 혹시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그리로 들어가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하나님 백성을 축복하는 일에는 언제나 앞장서시고 자신도 모르게 저주하는 일에는 한발도 들여놓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나귀를 걷어차지 않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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